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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hry는 PM Dec 07. 2023

좋아하는 것들을 안 다는 것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는 과정

나는 거의 평생 동안 불안과 우울에 휩싸여 살았다. 별 다른 이유가 없어도 마음에 항상 파도가 쳤다.


30대가 되어서야 불안을 견디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건 나는 나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20대 전부를 내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어떤 게 나를 불안하게 하고 어떤 게 내 불안을 잠재우는지 고민하며 보냈다. 나에 대해 잘 안다는 것은 사실 아주 간단했다. 나의 호불호가 어디에 기인하는지 깊게 이해하는 과정일 뿐이었다.


나의 호불호에 대해 안 다는 것은 회사 생활에도 도움이 됐다. 내가 생각하기에 회사 생활의 대부분은 사회생활이었고, 사회생활을 잘하려면 주변 사람들과 잘 지내야 했다. 주변 사람들과 잘 지내려면 소통이 필요했고, 소통은 보통 크고 작은 갈등을 낳았다. 이러한 갈등을 피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잘 이해해야 했고, 다른 사람을 잘 이해하려면 나를 잘 이해해야 했다. 결론적으로 나를 잘 이해하는 것이 남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었고, 남을 잘 이해하면 소통이 잘 됐으니 결과적으로 회사 생활도 잘 헤쳐나갈 수 있었다.


주변에 꽤 많은 사람들이 은연중에 취미에 급을 나눈다. 예를 들어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든지, 아이돌을 좋아하는 것 따위는 독서나 언어 공부와 같이 남들 앞에서 내세울 수 있는 취미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에 몰두하고, 많은 시간을 녹여내고, 그게 어떤 것이든 잘 알거나 할 수 있게 된다면 취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취미는 즐기기 위해 하는 것이니 더 그렇다.


코로나로 잃어버린 2년 동안 나는 기계식 키보드를 취미로 삼았다. 매일 기계식 키보드에 대해서 찾아보며 재택근무로 쌓인 스트레스를 풀었다. 우연히 주변의 제법 많은 사람들이 키보드는 취미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키보드에 대해서 뭐라고 생각하든 상관없었다.


취미로 쌓은 지식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도대체 기계식 키보드에 대한 지식이 살아가는데 어떤 도움을 준다는 말인가? 하지만 취미가 무엇이 되었든 아무리 사소한 지식도 반드시 어딘가에 쓰인다. 예를 들면, 나는 회사 최종 면접에서 가방에 들어있던 키보드를 꺼내 면접관들에게 자랑했고 생각지도 못하게 좋은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애초에 그런 상황이 올 수 있었던 건 이력서에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기계식 키보드를 조립한다고 써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마따나 취미로 쌓은 지식이 살아가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다고 하더라도 알 게 뭐야, 내가 좋다는데.

면접관들에게 자랑했던 Corne-ish Zen

나는 종종 키보드로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아이스브레이킹한다. 내 취미를 상대방에게 소개하고 의견을 나누는 게 즐거운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의 취미에 대해 알아가는 것도 무척 즐거운 일이다. 비단 취미가 아니더라도 상대방이 좋아하는 음식이나 싫어하는 음식, 커피 취향 같은 것들도 나에겐 항상 흥미롭게 느껴진다.


나는 인생의 고난을 견디게 해주는 게 ‘일상’이라는 생각을 한다. 매일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것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가. 힘든 날에도 기쁜 날에도 반복적으로 해야 하는 것들이 일상으로 쌓인다. 일상이 무너지지만 않는다면 나는 언제든 그 속으로 돌아갈 수 있다. 스스로의 호불호에 대해 아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떤 것에 실패하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나를 떠나지 않는다. 내가 이직에 실패했다고 해서 기계식 키보드가 나를 떠나진 않을 테지. 그러니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내 안에 쌓여 나의 중심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싫어하는 것들은 나의 보험이 된다. 내가 왜 화가 나고 불편한 지 파악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쓰지 않아도 될 때 비로소 빛을 발하게 되는 보험.


이렇게 이야기하면 ‘나는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없는데 어떡하죠?’하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그것조차도 호불호의 연장선이라고 본다. 아주 좋아하는 것도 아주 싫어하는 것도 없는 무던한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면보다 진라면을 좋아하고, 팔도 비빔면보다 진쫄면을 좋아하는 정도의 호불호 차이는 존재할 테니 그 정도만 알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나는 앞으로도 불안한 나날들을 힘겹게 이겨내야 하겠지만,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음료, 좋아하는 음악, 좋아하는 옷을 입고 매일을 살아나갈 예정이다. 나의 2024년 목표는 '더 많은 것들을 사랑하기'이다. 나에 대해 이해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나 자신도 사랑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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