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페브르의 삼항 변증법으로 본 모듈러 워크플로우
오늘날 디자이너는 보이지 않는 감정과 관계, 삶의 리듬과 기억, 사회적 맥락 속 공간의 의미를 새롭게 연결하고 재구성하는 실천자에 가까워졌습니다.
앙리 르페브르의 『공간의 생산』 중심으로」 의 흐름을 따라, 디자인이 공간을 어떻게 ‘이야기’로 만들고, ‘이야기’를 다시 ‘경험’으로 재현하는가를 AI 시대의 문맥 안에서 풀어보고자 합니다.
그는 그의 저서 『공간의 생산(The Production of Space, 1974)』에서, 공간을 단순한 배경이나 물리적 실체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공간이 사회적 관계와 권력, 상징과 감각이 중첩되는 살아있는 질서이며, 끊임없이 ‘생산되고 구성되는 실천의 장’이라고 말합니다.
르페브르는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공간을 세 가지 차원, 즉
공간적 실천(Spatial Practice), 공간의 재현(Representations of Space), 재현의 공간(Representational Space)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이 세 가지는 단순히 나열되는 개념이 아니라, 서로 충돌하고 교차하며 공간이라는 복합체를 형성하는 삼항 변증법적 구조입니다.
하지만 르페브르의 이론은 철학적이고 구조주의적인 언어로 서술되어 있어, 오늘날 디자이너나 기획자, 공간을 다루는 다양한 실천자들에게는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에드워드 소자(Edward Soja)와 같은 학자들은 르페브르의 삼분법을 더욱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이 해석적 번역을 시도했습니다:
Spatial Practice _ 인지된 공간 (Perceived Space)
Representations of Space _ 구상된 공간 (Conceived Space)
Representational Space _ 체험된 공간 (Lived Space)
이러한 용어들은 르페브르의 철학적 구조를 실제 도시 경험, 사용자 인터페이스, 브랜드 공간 설계 등 다양한 분야로 확장하는 데 중요한 개념적 발판이 되었습니다.
이제 공간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사회적 실천과 감각, 상상력이 얽히는 창조의 무대로 다시 태어납니다.
오늘은, 앙리 르페브르의 삼항 변증법의 관점을 바탕으로 현대 디자이너들이 사용하는 AI 기반 디자인 툴들과의 연결을 통해 디지털 시대의 창의성과 사회적 실천을 어떻게 조화롭게 이끌어낼 수 있을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주지하듯, 르페브르는 공간을 단지 물리적 실체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공간을 사회적 관계와 권력 구조가 응축된 하나의 ‘사회적 생산물’로 바라보았습니다. 이는 디자이너로 하여금 질문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어떻게 공간을 구성하는가? 그것은 어떻게 장소가 되고, 경험이 되며, 결국 기억으로 각인되는가?
그가 말한 공간의 삼항 변증법은 다음과 같이 디자인 실천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인지된 공간 (Perceived Space): 감각적으로 경험되는 공간, 일상의 장면, 시각적 직관.
구상된 공간 (Conceived Space): 기획과 설계가 반영된 논리적 공간, 시스템과 프로토타입의 무대.
체험된 공간 (Lived Space): 상징과 정서, 사회적 실천이 축적된 공간. 이야기와 감정의 밀도.
디자이너는 이 세 공간을 따로 떼어 사고할 수 없습니다. 디자인은 늘 이 셋 사이에서 균형을 조율하며, 오늘날의 디지털 도구는 그 경계를 유연하게 넘나들게 합니다.
"공간은 사회적으로 생산된다." 그렇다면, 브랜드 아이덴티티 역시 사회적으로 구성된 기호적 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로고 하나의 형태를 넘어서, 사람들이 어디에 소속되어 있고 싶은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AI는 이 아이덴티티의 생성 과정에서 추상과 구체를 오가며, 기업의 서사와 사용자의 경험 사이를 매개합니다. 제스처, 색채, 타이포그래피, 네거티브 스페이스 같은 시각 언어는 끊임없이 권력과 저항, 통일성과 차이, 기억과 망각의 긴장 위에서 다시 쓰입니다.
브랜드는 점차 단일 채널을 떠나 트랜스미디어적 확장성을 갖습니다. 이는 단지 콘텐츠의 다매체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와 브랜드가 만나는 모든 접면에서 일관되게 감정과 가치가 공유되는 것을 뜻합니다.
현대의 디자인 용어들은 '공간적 코드'로 기능합니다.
화이트 스페이스는 여백이 아니라 숨과 여운, 지배된 공간과 전유된 공간의 긴장을 품은 리듬입니다.
컬러 시스템은 단지 미적 요소가 아니라 감정과 의미의 문법입니다.
제스처 인터페이스는 신체와 기술이 만나는 가장 인간적인 접촉면입니다.
페르소나 매핑은 상상의 사용자와 현실의 행동 간 경로를 좁히는 사유 도구이며,
어포던스 디자인은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 아직 말해지지 않은 공간을 감지하고 열어주는 감각의 조각입니다.
예컨대, 브랜드 컬러와 공간 구성의 조화, 사용자 경험 흐름 설계 등은 이러한 공간적 코드를 실천하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디자인은 한동안 미니멀리즘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그것은 정제된 언어였지만, 때로 너무 단순해서 감정의 결을 잃고, 사용자를 소외시키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의 다양한 시각 언어들—뉴브루탈리즘, 키네틱 타이포그래피, 모프 애니메이션, 아이소메트릭 일러스트—이러한 다양성은 표준화에 저항하며, 사용자에게 감각적으로 풍부한 장소성을 선사합니다.
이러한 시도는 표준화된 디자인 언어에 균열을 내는 감각적 실천이며, ‘차이에 대한 권리’를 일상의 리듬 속에 스며들게 하는 작은 몸짓입니다.
제 연구에서는 장소성 형성 요소와 연관 지어 현대의 장소를 온라인 장소, 정신적 장소, 오프라인 장소로 구분했습니다. 디자인 용어 역시 이러한 장소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볼 수 있습니다.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클라이언트를 설득하려면 '공간적 코드'를 이해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이는 공간 생산의 변증법적 과정을 명확히 하는 개념적 도구입니다:
화이트 스페이스 활용: 르페브르의 '빈 공간(empty space)'은 단순한 여백이 아닌, 시각적 리듬과 사회적 관계를 구성하는 정치적 공간입니다. 콘텐츠의 호흡과 시각적 중력을 만드는 이 요소는 '지배된 공간'과 '전유된 공간' 사이의 긴장을 담습니다.
시맨틱 컬러 시스템: 색상은 르페브르가 말한 '공간적 실천'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브랜드 의미론과 사용자 감정을 연결하는 이 체계는 '감각적 시각성'과 '추상적 시각성'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를 구현합니다.
제스처 인터페이스: 르페브르의 '신체와 공간'의 관계를 구현하는 이 인터랙션 방식은 기술의 추상성과 신체의 구체성을 매개합니다. 사용자의 직관적 움직임은 '체험된 공간'의 핵심입니다.
페르소나 매핑: 르페브르의 '사회적 공간' 개념을 적용한 이 방법론은 추상적 사용자와 실제 행동 패턴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를 탐구합니다. 이는 디자인의 '공간 재현'과 실제 사용자의 '공간 실천'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과정입니다.
어포던스 디자인: 르페브르의 '가능한 것(the possible)'과 '불가능한 것(the impossible)' 사이의 긴장을 시각화하는 이 접근법은 사용자와 인터페이스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를 구조화합니다.
르페브르의 ‘지각된 공간', '구상된 공간', '체험된 공간'을 현대 디자인 툴킷에 적용해 보면:
지각된 공간의 도구(Perceived Space): Midjourney, DALL·E, Stable Diffusion과 같은 생성형 AI 도구는 사용자의 상상이나 언어적 명령어를 시각적 이미지로 변환하며, 감각적 공간을 시뮬레이션합니다. 따라서 이들은 '공간적 실천(spatial practice)'의 도구로서, 감각적 경험과 물질적 흐름을 포착하고 재현하는 기능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상된 공간의 도구(Conceived Space): 구상된 공간은 추상적 사고, 설계, 기획 등 전문가의 계획적 의도가 반영되는 영역입니다. Figma와 Adobe CC(Adobe Creative Cloud)는 이러한 공간을 시각적으로 구체화하는 데 특화된 도구이며, '공간의 재현'을 위한 기술적 수단으로 적합합니다. 특히 AI 플러그인은 추상과 구체 사이의 변증법적 매개자로 기능하며, 도구와 의미 사이의 간극을 조율합니다.
체험된 공간의 도구(Lived Space): ‘체험된 공간’(Representational Space)은 단지 지각이나 설계된 공간이 아니라 정서, 상징, 신화, 상상력이 작동하는 장소를 뜻합니다. 이 개념은 사용자 중심 경험 디자인(UX)과도 깊게 닿아 있습니다. 즉, 체험된 공간은 상징, 정서, 사회적 실천을 통해 의미가 부여되는 공간입니다. Framer와 Protopie는 인터랙션, 애니메이션, 감각적 리듬을 시뮬레이션함으로써, 사용자 경험과 정서적 몰입을 설계하는 데 적합합니다. 이들은 단순한 기능적 공간이 아니라, 상징적 의미와 사회적 상상력을 구현하는 '체험의 장'을 구성하는 도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공간적 실천의 도구(Spatial Practice): 이는 사용자, 디자이너, 시민 등 실제 행위자들이 공간을 사용하고 점유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Webflow와 같은 노코드 툴은 이러한 실천을 가능하게 하며, 기존 개발 권위 구조(개발자 중심)로부터의 자기 전유(self-appropriation)를 가능하게 합니다. 이는 디자이너가 기술 엘리트에 의존하지 않고, 공간의 직접적인 생산자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매우 르페브르적인 실천입니다.
차이의 공간 창출 도구(Differential Space): 차이의 공간은 기존의 지배적 질서에 저항하고 새로운 공간적 가능성을 탐색하는 영역입니다. Spline과 Cinema 4D와 같은 3D 실험 툴은 새로운 공간적 가능성을 탐색하고 몰입적이고 상상적인 공간을 창출합니다. 이러한 도구들은 비표준적 시각 실험을 가능하게 하는 차이의 공간 창출 도구로 적절하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현대 디자이너는 르페브르가 말한 '차이의 공간' 속에서 디지털 도구를 활용해 추상과 구체, 기술과 예술 사이의 긴장을 창조적으로 통합해야 합니다.
디지털 물결과 감성이 어우러지는 순간, '차이의 공간'으로 존재하며, 추상과 구체, 이성과 감성, 기술과 예술의 변증법적 통합을 통해 새로운 디자인 실천이 가능해집니다. 침묵 속에서 울려 퍼지는 인간과 기술의 대화는 르페브르가 그토록 강조한 '일상의 혁명'을 실현하는 과정이기도 하죠.
AI와 기술은 이미 우리 곁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혁명은 디자이너의 선택과 감각, 그리고 그 도구가 향하는 '대상'에 의해 시작됩니다.
“모든 혁명은 일상생활의 변혁을 가져오거나,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Lefebvre, 1947/1981). 그렇다면 디자인의 혁명은,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과 삶의 방식을 어떻게 다시 써 내려가는가에 달려 있는지도 모릅니다.
디자인이 열어가는 공간은 단지 형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곧 누구의 목소리를 담고, 누구의 일상을 존중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디자인은 누구의 삶에 다가서고 있으며, 누구의 일상과 기억을 품은 공간을 만들어가고 있을까요?
Reference
박신희. (2021).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을 통한 장소 만들기 연구: 앙리 르페브르의 『공간의 생산』 중심으로(박사학위 논문). 홍익대학교 대학원. https://www.riss.kr/link?id=T15774508
Lefebvre, H. (1974). La production de l’espace. Paris: Éditions Anthrop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