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델은 천재가 되어가는데, 나와는 늘 '초면'이다
그동안 AI의 거대한 미래에 대해 많은 글을 써왔다. 일자리가 사라지고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담론들 말이다. 하지만 정작 매일 AI를 끼고 사는 내가 느끼는 가장 큰 장벽은 의외로 사소했다. 챗봇을 바꿀 때마다 "내가 누구인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이 프로젝트의 배경은 무엇인지"를 처음부터 다시 설명해야 하는 지독한 번거로움이었다.
모델은 인류의 지식을 통달한 천재가 되어가는데, 정작 사용자와의 관계에서는 늘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군다. 이 '단절된 경험'은 우리가 새로운 AI 플랫폼으로 갈아타는 것을 주저하게 만드는 가장 큰 문턱이었다. 그런데 최근 구글 제미나이(Gemini)에서 포착된 한 가지 변화가 이 해묵은 단절을 정면으로 건드리기 시작했다.
AI 플랫폼을 향한 구글의 '이삿짐 서비스'
최근 외신을 통해 공개된 제미나이의 새로운 실험은 흥미롭다. 바로 '타사 AI 대화 기록 불러오기' 기능이다. 쉽게 말해, 챗GPT나 클로드에서 나누었던 대화 데이터를 제미나이로 통째로 가져와 이어서 대화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AI 플랫폼을 옮길 때 겪어야 했던 '데이터 이사'의 고통을 구글이 직접 해결해 주겠다고 나선 셈이다. 이 변화가 상용화된다면, AI 플랫폼 경쟁의 기준은 '성능'이 아니라 '맥락'이 된다. 지금까지 AI 플랫폼들의 언어는 늘 비슷했다. "우리가 더 빠르다", "우리 모델이 더 똑똑하다", "우리는 더 많은 데이터를 한 번에 읽는다" 같은 성능 위주의 경쟁이었다. 하지만 대화 기록 이식이 가능해지는 순간, 질문은 다음과 같이 변한다.
"이 플랫폼은 내가 쌓아온 사고의 이력을 얼마나 매끄럽게 이어받는가?"
성능이 곧 권력인 AI 시장에서 내가 챗GPT를 고집한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지능이 아닌 '기억'이었다. 챗GPT에는 지난 대화의 맥락이 축적되어 있고, 덕분에 나는 구구절절 설명하는 노동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제미나이가 아무리 뛰어나도, 대화를 시작할 때마다 관계를 새로 정립해야 하는 피로감은 성능의 우위를 상쇄하고도 남았다. 결국 나를 붙잡아둔 것은 기술이 아니라 데이터에 녹아든 나의 '자아'였다. 나의 연구 기록과 문체, 사고의 궤적이 챗GPT라는 그릇에 담겨 있었던 셈이다. 구글의 이번 시도는 이 지점을 정확히 공략한다. 사용자의 기억을 이식해 줌으로써, 타사 플랫폼이 견고하게 쌓아 올린 '맥락의 성벽'을 단숨에 무너뜨리겠다는 전략이다.
락인(Lock-in)의 주인이 바뀌다: 데이터에서 '사고의 흐름'으로
과거의 플랫폼 락인은 파일 형식이나 계정 체계에 묶여 있었다. 하지만 AI 시대의 락인은 '맥락'에서 발생한다. AI와의 대화에는 내가 자주 쓰는 개념, 반복되는 문제 설정 방식, 나만의 사고 순서가 누적된다. 이것은 그냥 텍스트 데이터가 아니라, 나의 사고 구조를 복제한 '디지털 페르소나'에 가깝다. 이 맥락을 가장 손실 없이 이어받는 플랫폼이 결국 최후의 승자가 된다. 이제 플랫폼은 "우리 모델이 더 똑똑하다"는 거대 담론 대신 "당신이 어디서 사고를 시작했든, 우리는 그 흐름을 가장 완벽하게 복원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UX를 넘어 AX(Agent Experience)의 시대로
이 변화는 인간 사용자뿐만 아니라, 나를 대변하는 AI 에이전트와 워크플로우 자체가 통째로 이동하는 'AX(Agent Experience)' 설계의 문제로 넘어간다. '사람에게 얼마나 친절한가'도 중요하지만, '다른 AI가 남긴 맥락을 얼마나 잘 파싱(Parsing)하고 이어받는가'도 함께 중요해진다. 대화의 표준화된 포맷, 이식 가능한 메타데이터 설계가 핵심 기술이 될 가능성이 크다.
제미나이가 챗GPT의 기록을 탐내는 이유는 명확하다. 사용자의 '현재'가 아니라, 사용자가 쌓아온 '과거의 맥락'을 소유해야만 그들의 '미래'를 점유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AI 플랫폼 경쟁은 이제 지능의 높이 쌓기 싸움이 아니다. 누가 더 사용자의 삶과 사고의 흐름에 깊고 연속적으로 개입하느냐는 '맥락의 점유' 싸움으로 접어들었다. 당신의 사고는 지금 어느 플랫폼에 머물고 있는가? 그리고 그 플랫폼은 당신의 내일을 이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참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