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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다 Sep 28. 2020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생긴 일

용기와 객기는 한 끝 차이다.

“정상까지 이제 한 시간밖에 안 남았어."
“저 내려갈래요.” 
“뭐라고?”
“저 내려간다고요. 하산합니다.”




내가 여행하던 시기는 각종 여행 커뮤니티들의 성장세가 가파른 곡선을 그렸을 때라, 너도 나도 '나만의 여행'이라는 키워드를 내세워 '삶의 커다란 깨달음', '여행지에서 얻은 삶의 변화'가 담긴(또는 담겨야만 좋아 보이는) 콘텐츠를 마구마구 뽑아내고, 또 그게 먹히는 시기였다. 여행 정보를 위해 가입한 각종 카페와 커뮤니티를 눈팅하다 보니 점차 정보보다는 특별한 에피소드에 눈길이 가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그들과 나의 여행을 크고 작게 저울질을 하게 됐고, 나도 남들이 하지 않은 길을 가봐야 한다는 압박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그러다 보니 남과는 다른 차별화한 포인트가 있어야 했고 남들 다 가보는 곳에 가야 별 거 없을 거라―사실, 별로 주목받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생각하며 서칭을 하다가 발견한 곳이 콩고민주공화국의 '고마'라는 도시에 있는 '니라공고 화산'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콩고와는 다른 나라인 것조차 몰랐고 마침 내가 방문할 나라인 르완다와 접경지역이라 바로 건너갈 수도 있으며, 인터넷 검색해보니 후기도 몇 개 없어. 게다가 활화산을 눈 앞에서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하니 이보다 더 어그로를 끌기에 안성맞춤인 곳이 있을까 싶다. 


서칭을 좀 더 해보니 외교부에 의하면 반군이 활동하고 있는 곳이고, 철수 권고 단계네? 그래, 설마 피랍이야 되겠어? 보니까 관광지로 어느 정도 구색은 갖추고 있는 곳이니까 괜찮겠지. 이 정도는 있어야 짜릿한 스토리가 나오지 않겠어. 혹시 갔는데 화산이 폭발하지 않을까? 최근 터진 게 2002년인가. 여하튼 활화산의 분화구 앞에 설 내 멋진 모습을 상상하며 비자를 신청했다. 


<고마에 위치한 니라공고 화산, 사진 출처: Africa Tour Operators>


아, 역시 아프리카. 투어 비용이 비싸다. 입국 비자를 얻는데 미화 $105, 투어 신청비 $400, 포터와 요리사를 대동하기로 하니 $700이 넘어가는 투어였다. 투어는 아침 9시에 집합이었지만 국경을 넘을 때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먼저 넘기로 한다. 검문소가 앞에 보이자 읽은 후기 중 뒷 돈을 요구했다는 얘기가 있어 준비를 단디하고 갔는데 너무 쉽게 도장을 찍어줘서 희희낙락하던 차였다. 그렇게 고마에 첫 발을 내딛자, 공기가 사뭇 다른 것이 느껴진다. 국경을 넘자마자 웬 1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눈 풀린 친구가 다가와서 뭐라 뭐라 말하는데 뜻은 모르지만 결코 반가운 말이 아님은 알 수 있었다. 괜히 왔나 싶은 생각이 들던 찰나, 주변에 한 무리의 남자들이 와서 그 소년을 떼어내고 나를 보호해준다. 아, 그래. 이게 여행이고, 사람 사는 세상이지. 숙소에 체크인을 하러 들어갔는데 비용이 지불이 안됐다나? 근데 난 이미 선불로 냈는걸. 이리저리 옥신각신 하다가 결국 디펜스에 성공하고 허름한 방으로 들어와 누웠다. 그렇게 성공적인 하루가 지나 대망의 투어 날이 밝았다. 


투어 집결지인 트래킹 시작 지점까지의 이동은 개인이 해야 하기 때문에, 투어를 주관하는 정부 산하 기관인 ICCN에 가서 차량 픽업을 요청했다.

“운송비가 얼마예요?”
“모토 택시는 $20, 차량은 $60이에요.
“그럼 모토 택시 탈래요.”
“길이 험해서 힘들 텐데…”
“괜찮아요. 모토 택시 불러주세요.”
“아, 맞다. 오늘 모토 택시 영업 안 해요.”

이때 뭔가 이상한 점을 눈치채야 했다. 왜냐면 오늘은 월요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이때 왜 모토 택시가 운행을 안 하는지 알았다면 결코 투어를 강행하는 선택은 하지 않았을 거다. 결국 이동에만 7만 원이 넘어가는 비싼 차를 타긴 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가서 멋진 마그마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용암 호수만 보면 대망의 아프리카 일정이 마무리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 산은 하루에 입장객이 15명으로 제한돼 있는데 오늘 투어를 신청 한 사람은 오직 나 혼자였다. 나를 위해 2명의 무장한 레인저와 1명의 포터, 1명의 요리사가 입구에서 날 기다리고 있다. 세상에 이런 호화스러운 투어가 있나. The most luxury tour ever! 나의 부푼 꿈을 안고 가이드와 함께 차를 타고 출발한다.


그렇게 몇 분 달렸을까, 갑자기 차가 멈췄다. 멀리에 군중들이 가득 모여있다. 뭐지? 하고 옆을 바라보니 UN 평화유지군의 기지가 보인다. 모두가 한 곳을 주시하고 있다. 낌새가 이상해 뒤를 보니 공포탄과 고무탄, 진압봉과 방패를 든 경찰들이 몇 트럭씩 타고 와 앞으로 열을 맞추어 걸어간다. 커다란 시위가 있었다. 하필 이때 세계 최고의 치안을 자랑하는 국민의 안심 DNA가 발동한 걸까, 경찰 뒤를 따라가니 괜찮겠지 생각했다. 그때 차를 돌렸어야 했다. 경찰이 공포탄을 쏴서 시위대를 해산시킬 때….


<당시의 상황, 이때까지만 해도 화산으로 향할 생각에 희희낙락했지만...>


운전수가 말한다. "메인 도로로는 못 갈 것 같고, 우리는 약간 우회를 해야겠어." 그렇게 외진 골목으로 방향을 틀어 다시 출발했는데, 거기도 시위대가 있었다. 운전수에게 물었다. “이거 뭐야? 왜 사람들이 이렇게 다 나와있는 거야?” 그러자 운전수가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기름값이 너무 비싸서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하는 거야.”

약간의 설명을 덧붙이자면 고마의 인구가 100만이고 그중 오토바이로 생계를 이어나가는 사람들의 비중이 꽤 컸는데, 정부가 기름값을 올린다고 하자 도시 전체가 총파업을 하는 그런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제야 사태 파악이 조금씩 되기 시작한다. 예상 밖의 변수였다. 여기에 오기까지 나름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여행 8개월 차의 날카로운 촉은 얻다 팔아먹었는지 오간데 없고 기름 값이 없어 못살겠다 뛰쳐나온 사람들 사이로 기름 먹는 하마인 지프차를 몰고 그들 속으로 뛰어든, 그런 상황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밖을 보니 물류를 운송하는 트럭, 택시, 오토바이를 타고 이동하는 현지인이든 바퀴 달려 움직이는 모든 것들을 잡아 세우고는 놓아주지 않았다. 


우리 차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수많은 군중들이 우리 차를 둘러싸며 연신 뭐라고 말을 해대고, 운전수는 그들을 진정시킨다. 위험하지 않냐고 돌아가야 하지 않냐고 물었는데 운전수 왈 “나 여기 사람들 다 알아.” 아니 고마시의 인구가 100만인데, 이 사람들을 다 안다고? 그런데 놀라운 것은 가는 곳마다 그의 지인(?)이 있어서  어찌어찌 또 해결됐다는 것이다. 나는 무슨 그게 친구끼리 야 좀 지나가자~~ 이런 건 줄 알았다. 6번인가 시위대에 갇혔는데 문을 열려고 하고 돈을 달라고 하고, 가방을 쳐다보고 트렁크를 열어 뒤에 있는 내 커다란 배낭을 꺼내가려 했다. 몇 마디 알지도 못 하는 스와힐리어를 창문 밖으로 지껄이며, 최대한 친한 척하려고 악수를 청하며 온갖 잡소리를 쏟아낸다. 왠지 그러면 조금은 호감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흥분한 사람들에게 내가 연신 했던 말은 ‘카리부’, 그러니까 ‘웰컴’이라고 연신 지껄여댔던 것이다. 여하튼 간에, 어떤 이는 커다란 돌을 들어서 날 찍는 시늉을 하는 걸 보니 이제 뭘 해야 할지 감도 안 온다. 여권이라도 챙겨야지 하고 카시트 밑으로 여권을 숨기다가 차 문이 반쯤 열렸을 때는 여기서 오체 분시 당해 죽는구나 싶었다. 영화 <블랙호크다운>의 성난 군중들이 생각났다. 좀비 영화에 나오는 차에 갇힌 사람들을 잡아먹으려 창문에 붙어있는 좀비들이 딱 그 모양이었다. 세계일주 가기 전 장난 삼아 엄마한테 내 머리카락과 손톱이 든 봉지를 내밀며 죽으면 이거라도 써 달라고 하는데 드디어 그걸 쓰게 되는구나. 사실, 어떻게 거기서 빠져나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려보니 사람들이 길을 조금씩 터주고 있었고 우린 그곳을 탈출했다. 이때 정말 돌아갔어야 했는데, 몇 번 시위대를 지나치니 다음에도 그럴 거라는 어이없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한 걸까, 아니면 여기까지 왔는데 더 오기가 생긴 걸까.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그냥 정신을 못 차렸구나 싶다. 억겁 같은 10여 분이 지나고, 운전수가 말했다. “이건 내 일이고, 내 임무는 너를 여기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는 일이야.”


그렇게 차를 달리다가 한 무리의 군인을 만났다. 운전수가 신호를 하니 그들의 차량 중 한 대가 따라붙었는데, 그때 정말 안도를 했으나 그것도 잠시. 그 차는 성난 시위대에 막혀 더 이상 우리를 에스코트 하지 못 했다. 이때 잠깐 정신을 차리고 돌아갈까? 물어봤지만 운전수는 안전하다며 자신을 믿으라고 한다. 그렇게 작은 고비를 넘겨 트래킹의 출발지에 도착했다. 내리자마자 헛구역질을 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입산 등록을 하고 앉아서 기다리는데 눈물이 막 났다. 이 때는 정말 총 든 레인저들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포터와 요리사를 만나 간단히 인사를 마치고 등반을 시작했다. 6시간 정도 걸리는 코스였다. 올라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냐면, ‘오늘이야 어찌어찌 넘어왔는데, 내일 대규모 폭동이라도 일어나면 어쩌지?’ ‘아냐, 괜찮을 거야. 오늘도 괜찮았잖아?’ ‘어차피 되돌릴 수 없어.’ 그런 생각으로 3 시간 여를 등반했다. 처음엔 그랬다. 저 위의 멋진 풍경이 모든 것을 잊게 해 줄 거야. 저기에만 올라가면 모든 것이 괜찮을 거야. 올라가는 동안 내 상상력의 한계는 날개를 달고 미친 듯이 부풀어올라 이윽고 ‘내가 없는 사이에 무자비한 진압으로 대규모 유혈사태라도 일어났으면 어쩌지? 모든 국경이 봉쇄되고 계엄령이 떨어지면 어떡하지?’라는 곳까지 도달한다. 그러고 보니 다음 달에 이 나라의 대통령 선거가 있다. 그게 이제야 기억이 났다. 계속 헛구역질을 하자 가이드가 물어본다. “약 있어?” '이거는 물리적이 아니라 정신적인 스트레스에서 온 거라 약이 소용이 없어….' 마음을 부여잡고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정상까지 한 시간 여를 남겨둔 지점에서 레인저가 지상에 있는 상관에게 하산 보고를 하고 있다.>

등반 5 시간 차였다. 조금만 있으면 고대하고 고대하던, 용암호를 보는 것이다. 가이드가 기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며 말한다. “정상까지 한 시간이면 갈 거야.” 이 말을 들으니 생각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시간은 5시쯤 됐고, 대충 보니 하산에는 두 시간 정도 걸릴 것 같다. 7시면 날이 어둑해지니 그 이후로 하산하는 것은 정말 너무나도 무모한 일이었다. 결정의 시간이 왔다.

“저 내려갈래요.”
“뭐라고?”
“저 내려간다고요. 못 올라가겠어요.”

내려가는데 문제는 없었다. 그룹 투어였다면 어쩔 수 없이 다 같이 올라가야 하지만, 나는 마침 혼자였기 때문에 내가 안 가고 싶다고 말하면 그만인 것이었다. 사실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는 극한의 공포감에 온 몸을 지배당한 상태라 육체가 도저히 따라주지 않았다. 태어나서 이런 공포감을 느껴본 적이 없다. 내일 나의 육신에서 영혼이 빠져나가고, 네이버 세계 뉴스 카테고리에 '(속보) 여행자 A 씨, 콩고 민주공화국에서 피랍 후 사망… 외교부, 긴급대응팀 급파'라는 기사가 뜰 것을 생각하니 도저히 머물 수가 없었다. 하산은 초스피드로 이뤄졌다. 초입으로 돌아오니 너무 기쁜 마음에 앞으로 튀어나갔는데, 갑자기 레인저가 제지를 했다. 조용하라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경계 태세를 취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아무래도 반군이 있나 확인하는 것 같았다. 다시 여기서 론 서바이버 2를 찍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여하튼 레인저 중 한 명은 내가 거기까지 갔다가 그 장관을 못 보고 내려온 것이 너무나 아쉬웠는지, 내게 이메일 주소를 주면 사진을 보내주겠다고 한다. 콩고민주공화국인 친구(?)가 생겼다. 그렇게 고생한 사람들에게 팁을 나누어주고 운전수를 다시 불러 국경으로 향하는, 가로등 하나 없이 어두운 길을 달리며 운전수에게 물었다. 

“시위는 끝났어?”
“응. 그거 오늘 아침에만 한 거야. 내일은 없어.”
“너 아까 사람들이 너한테 뭐라고 막 하고, 너도 거기다가 뭐라고 하던데 그거 뭐라고 한 거야?”
“아 그거, 사람들이 정부에게 보여주려고 모든 차량 이용을 하지 말자고 했거든. 그래서 차량 이용하는 사람들마다 붙잡고는, '너희 기름 많냐?', '부자야?', '왜 동참 안 해?' 이러고 항의한 거야.”
“그래서 네가 뭐라고 대답했는데 그 사람들이 우리를 보내준 거야??”
“아니 내가 대통령, 장관, 정치인도 아닌데 왜 나한테 그걸 말하냐고, 가서 정치인한테 말하라고 했지."

그래, 다시 생각해보면 네가 그 사람들을 다 안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사람은 정말 믿고 싶은 대로 보고, 듣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근데 그 사람들이 진짜 폭도였으면 우리 진짜 죽은 목숨 아니었음…? 여하튼 지금 살아있으니까 됐다. 가는 길에 나 쫄지 말라고 '여긴 가로등이 없어서 어쩌다가 강도들이 차량에 총질을 할 때도 있다'며 되도 않는 농담도 해준다. 그렇게 20여분을 달려 국경에 도착했다. 운전수가 차에서 내려 간단한 인사 후 자기 지인이 고릴라 투어를 하니까 여기서 예약하면 싸게 해 준다고, 명함을 한 장 준다. 미안해요. 다신 여기 올 일은 없을 거예요. 뒤도 안 돌아보고 국경을 향해 뛰어가 출국 도장과 르완다 입국 도장을 받았다. 드디어 끝난 것이다. 그렇게 내 여행의 두 번째 탈출은 막을 내렸다. 첫 번째 탈출은 워싱턴 DC에 기록적인 폭설이 내린다고 했을 때 도망친 게 첫 번째이다. 그때는 플로리다 가는 비행기 표를 급히 구매했는데, 알고 보니 다음 주 표였지. 그래서 60만 원을 주고 템파로 이동했지만... 여하튼, 이제는 그냥 생각하기 나름이다. 혼자 투어를 신청하게 된 것이 일찍 나갈 기회를 준건지도 모르고,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딱 하루 오늘 시위가 있었는데, 그것도 오전에만. 그때 재수가 나쁘게 내가 간 거지. 


분명 내가 어디든 새로운 곳에 가기로 결정한 것은 크나큰 용기였다. 하지만, 명백한 위험 앞에 나의 용기를 내세웠던 것은 객기임에 틀림이 없었다. 값 비싼 투어라 그런 걸까, 교훈도 몇 배는 값진 것 같고. 용기와 객기는 정말 한 끝 차이라는 것을 깨달은, 기억하고 싶진 않지만 잊지 못할 악몽이자 추억이었다.


※본 필자는 철수 권고 지역에 들어간 것을 뼈저리게 후회, 반성, 통탄 중입니다. 부디 저와 같은 우를 범하지 않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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