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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과 공존하는 빛

키아로스쿠로 x 라이팅 이펙트

by 예나빠


현대의 게임 회사에는 빛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라이팅 아티스트(lighting artist)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이 있다. 이들은 게임 내에서 발생하는 모든 조명 시나리오 및 효과를 책임지는데, 빛은 공학적이면서 동시에 예술적인 요소를 갖기 때문에 이를 함께 고려하는 디자이너가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이들은 게임 개발 시 그래픽 엔지니어들과 협업을 하면서 최고의 장면을 연출해내곤 한다.


2018년에 출시된 <레드 데드 리뎀션 2>는 뛰어난 조명 효과로 호평받은 비디오 게임이다. 서부 시대를 배경으로 오픈 월드(open world)로 진행되면서도 대기, 조명 효과가 실제에 가깝도록 묘사되어 게이머들의 눈을 호강하게 만든다. 특히, 어두운 실내 야간 조명, 역광 등으로 인해 발생한 명암의 극단적 대비 효과가 매우 뛰어나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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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디오 게임, 레드 데드 리뎀션 2.



이러한 강렬한 명암의 대비는 실제로 영화나 사진과 같은 다른 예술분야에서 극적인 긴장감을 주기 위해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다. 흑백 영화 시절부터 조명을 이용해 극단적인 장면을 연출하는데 쓰였고, 사진기가 발명된 이후부터 명암의 대비 효과를 극대화할 때도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왔다. 특히, 최근엔 스튜디오 인물 사진을 찍을 때 많이 활용하고 있다.


e3f13e004244b9e484916daa5e20619d.jpg 영화 <드라이브>의 한 장면.



이러한 '극단적인 명암의 대비'가 예술에 처음 적용되기 시작한 때를 되짚어 보자면 사실상 르네상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에는 인위적으로 빛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불을 피우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야간이나 지하실 같은 어두운 곳으로 들어갈 때는 한치의 반경 정도만 밝혀주는 촛불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작은 광원에서 출발한 빛은 주변의 사물과 인물을 비추고 점차 암흑 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당시 그려진 그림에는 암흑과 친숙한 당시의 환경이 꽤 많이 반영되어 있다.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갔을 때 본 그림 한 장이 있다. 벌써 7년도 더 되었는데 아직도 기억이 생생할 정도면 꽤 인상에 남은 것 같다. 바로 영국의 화가 조셉 라이트(Jeseph Wright of Derby, 1953-1962)가 그린 <진공 펌프 실험>이라는 그림이다.


어느 짙은 밤, 일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 앞에서 과학자 한 명이 무슨 실험을 하고 있다. 당시 과학자는 그리 대접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사람들 앞에서 '과학 실험 쇼'를 같은 것을 보여주며 생계를 유지하곤 했으니 말이다. 과학이 세상을 바꾸는데 쓰이지 못하고 대중의 흥미를 끄는 수준에 머물렀던 것이다. 산업 혁명이 한창일 때라 아직 제대로 된 학문으로 정착되지는 못한 시대였으니 이해할 만도 하다.


"진공 펌프 실험", 조셉 라이트, 1978, 183 x 244 cm, 캔버스에 오일, 내셔널 갤러리, 런던.


약장수가 약을 팔듯 호기롭게 실험을 하고 있는 붉은 옷의 중년 남자가 바로 과학자다. 지금 그는 커다란 유리병에서 공기를 전부 빼내 진공 상태를 만드는 시연을 하고 있다. 진공 상태임을 입증하기 위해 애꿎은 생명이 희생된다. 유리병에 담긴 불쌍한 앵무새는 사라지는 공기와 함께 유명을 달리하고 있고, 큰 딸로 보이는 아이는 이 장면을 차마 못 보겠는지 고개를 돌리고 만다.


이 그림이 내게 큰 인상을 남긴 것은 바로 테이블 한가운데 놓인 조명이었다. 커다란 유리컵 뒤에 숨겨진 것은 아마도 촛불이었을 것이다. 작은 양초에서 시작된 빛이 유리잔을 투과해 강렬히 빛나고, 모여든 이들의 얼굴에 다른 모양의 음영을 새겨 넣는다. 하지만 이 빛은 방안 전체를 지배하는 어둠을 걷어내지 못하고 꺼져가는 생명과 함께 인물들 앞에서 소멸하고 만다. 이 작은 조명이 빚어내는 긴장감 때문에 나는 이 그림 앞에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을 수밖에 없었다.


유럽 미술관들을 방문하다 보면 이런 그림을 자주 만나곤 한다. 어둠과 빛을 강렬히 대비시켜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그림들 말이다. 그리고, 이런 극단적인 명암의 대비를 잘 묘사하는 화가들을 후대에서 흔히들 '빛을 잘 다룬다'라고 표현하며 심지어 '빛의 화가'라고 칭송해 마지않는다.



비운의 천재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는 이런 화가들의 원조라 할 수 있다. 그는 열네 살에 이미 밀라노의 유명 아뜰리에에 들어가 그림을 배웠고 그곳에서 그림자와 빛의 효과를 터득했다. 이후 로마로 입성한 뒤 교회나 추기경들의 주문으로 종교화를 그렸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다.


"마테오의 소명", 카라바죠, 1599–1600, 322 × 340 cm, 캔버스에 오일,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 로마


<마테오의 소명>은 그가 이 시기에 그린 그림으로 성경의 한 일화를 담고 있다. 사도를 모으러 다니던 예수 그리스도가 세리 마테오를 제자로 지명하는 장면이다. 낯선 자에게 지목받은 마테오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대상이 자신인지를 되묻는다. 카라바조는 이 그림에서 빛을, 말 그대로, 드라마의 한 장면을 묘사하듯 사용했다. 어둠 속에 살던 죄인에게 신의 부르심이 임한 것 같이, 창밖에서 들이치는 조명은 선택받은 자를 향하고 있다. 이 그림을 기점으로 그는 화가로서의 경력에 날개를 달기 시작한다.


하지만, 카라바죠의 승승장구는 오래가지 않았는데, 선천적으로 혈기 왕성했던 그는 저잣거리에서 시비가 붙어 우발적으로 살인죄를 저지른다. 수배를 당하고 도망자의 신세가 된 뒤에도 그림을 계속 그려냈는데, 그림 속의 명암은 그의 죄책감과 맞물려 더욱더 강렬해진다. 이 시기 그는 <세례 요한의 참수><일곱 가지 자비로운 행동><예수 그리스도의 태형><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등 명작을 남겼다. 죄를 고백하고 스스로 벌주듯 그림 속 인물에 계속 자신을 투영시켰다. 하지만, 그는 그가 그린 빛 가운데로 나오지 못하고 끝내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고 만다.


신은 그에게 비추었던 빛을 거둬 네덜란드의 또 다른 천재에게 향하기 시작한다.


800px-Caravaggio_-_Sette_opere_di_Misericordia.jpg "일곱 가지의 자비로운 행동", 카라바죠, 1606–1607, 390 × 260cm, 캔버스에 오일, 피오 몬테 델라 미세리코르디아 교회



미술사를 통틀어 그만큼 '빛의 화가'라고 불린 이가 있을까? 바로 렘브란트 하르먼손 반 레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 말이다. 렘브란트는 빛을 절묘하게 비추어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는 독특한 화풍을 초상화, 역사화, 판화 등 많은 작품에 담아냈다. 특히 초상화를 그릴 때는 조명에 특히 신경을 써서 인물의 외양뿐 아니라 미묘한 감정까지 표현하곤 했는데, 그의 이름을 딴 '램브란트 라이팅'이라 불리는 조명 기법이 있을 정도다. 그의 작품 <야경>은 그가 빛을 다루는 기술을 집대성한 작품으로, 그 인기에 힘입어 오늘날 암스테르담의 상징이 되었다.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에서 <야경>을 직접 본 적이 있는데, 이 그림 앞에서 내가 놀란 점은 세 가지였다. 첫째는 그림 앞에 몰려든 구름 떼 같은 인파. 개인적으로 루브르의 <모나리자> 이래로 이토록 많은 관람객을 빨아들이고 있던 그림은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이 그림을 관람하는데 큰 지장이 없던 것은 두 번째 이유와 관계가 있다. 바로 그림의 스케일이다. 4m가 넘는 그림의 웅장한 규모가 몰려든 관람객을 압도한다. 그래서 꽤 멀리서도 이 그림을 감상하는데 큰 무리가 없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마지막 세 번째 이유는 그림이 뿜어내는 활력, 생동감을 표현한 강렬한 빛이다.


"야경", 렘브란트, 1642, 363 × 437 cm, 캔버스에 오일,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


조명은 이 그림이 극적인 느낌을 자아내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그림에서 렘브란트는 기존의 단체 초상화와는 다른 접근 방식을 사용했는데, 자세히 보면 인물들의 위치나 움직임, 조명 배분도 제각각이다. 정면의 인물들에게 가장 많은 조명이 비치고 뒤로 갈수록 그 비율이 줄어든다. 마치 주인공과 조연이 함께 연기 중인 뮤지컬 무대와 같은 느낌이다. 이는 당대에는 꽤나 혁신적인 시도였는데, 단체 초상화에서 이러한 자연스러운 연출은 전무후무했기 때문이다. 렘브란트는 스냅사진을 찍듯 이 그림을 그려낸 것이다.


이 그림에 사용된 빛은 자연광은 아니다. 정면의 두 주인공인 민병대 대장 '반닝 코크'와 그의 부관 '빌렘 반 로이텐부르흐'에 드려진 음영을 살펴보면 정면 왼쪽 위 어디에선가부터 조명이 비치는 것 같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뒤쪽의 여자는 주인공 못지않게 위에서 별도의 조명을, 뒤의 인물들도 얼굴 주변에서 각자의 조명을 받고 있는 느낌이다. 사실 사선으로 들이치는 자연광 아래에서 저렇게 인물들이 운집하고 있으면 누군가는 반드시 그림자에 가려지게 마련인데 그림 속에는 아무도 그런 인물은 없다.


그래서, <야경>에서 사용한 렘브란트의 빛은 그가 그동안 역사화에서 꾸준히 사용해온 일종의 가상의 조명이다. 의미 있는 얼굴이나 사건에 눈부시게 빛나고 사소한 것을 비추일 때는 색조가 약해지던, 그리고 가끔씩 전경에 커다란 그림자를 던지던 주관적인 빛. 그가 품었던 마음속의 빛을 통해 그는 그렇게 그림에 생명을 불어넣었고 아직까지도 관람객들의 가슴을 뛰게 만든다.


The_Supper_at_Emmaus,_by_Rembrandt.jpg "엠마오의 그리스도", 렘브란트, 1629, 37.4 x 42.3cm, 캔버스에 오일, 자크마르 앙드레 박물관, 파리.




사실 '빛을 그린다' 또는 '빛을 다룬다'는 것은 은유적인 수사에 가깝고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눈에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빛을 어떻게 그리고 다루겠는가. 정확히는 '빛에 반사된 사물을 그린다'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빛은 아래 그림과 같이 광원(light source, 빛을 만들어내는 물체 또는 장치, 이를테면 태양, 전구)에서 생성되어 대기 중으로 전파되고, 사물에 반사된 뒤 카메라(또는 우리 눈)로 입사됨으로써 사물을 인식하게 해 준다. 그렇게 빛은 보이지는 않지만, 인간에게 '무언가를 보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매개 역할을 한다.


빛의 반사를 통해 영상을 맺는 (무언가를 보는) 과정. 출처: Stanford graphics CS248



따라서 빛은 오늘날 컴퓨터 그래픽스에서도 없어서는 안 되는 핵심 요소로 간주된다. 그래픽스의 목표가 실사에 가까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므로 실세계에서 벌어지는 자연현상을 가능한 가깝게 재현해야만 한다. 이후에 또 언급하겠지만, 게임이나 영화 VFX 그래픽스를 처리하는 소프트웨어를 흔히들 렌더러(renderer)라고 부르는데, 그래서 렌더러가 한 장면을 만들어 낼 때 빛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


사물의 한 점을 눈에 보이는 데로 영상에 표현하려면, 위의 그림처럼 그 점에서 반사되어 카메라(눈)로 들어오는 모든 빛줄기들을 찾아 그 에너지를 계산해 누적해주면 된다. 이때 빛이 사물을 만나 '반사'한다고 했는데 사물의 재질에 따라 반사되는 특성도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거울, 유리, 물, 플라스틱, 금속, 대기 등 다양한 액체, 고체, 기체 형태의 사물을 만나면 빛은 정반사, 난반사, 굴절, 투과, 산란될 수도 있다.


또한 광원도 만들어진 빛의 방향성에 따라, 촛불, 백열등처럼 사방으로 고르게 빛을 뿜어내는 점광원(point light), 태양과 같이 무한히 먼 곳에서 온다고 가정하는 방향성 광원(directional light), 그리고 플래시나 무대조명처럼 어떤 반경 내를 비춰주는 스포트라이트(spotlight)로 구분할 수 있다. 렌더러가 이러한 광원이나 물질의 특성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는 빛의 성질을 모두 고려하고, 계산에 더 많은 빛줄기들을 포함시킬수록 결과 영상은 실사에 가깝게 다가간다.


point_light.jpg 점광원. 출처: Washington Univ. graphics. CSE458.
spot_light.jpg 스포트 라이트. 출처: Washington Univ. graphics. CSE458.


위의 두 사진은 마야(Maya)라는 렌더러를 이용해 아주 간단한 형상인 탁구공을 점광원과 스포트라이트로 처리한 시험 영상이다.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든다. 극단적인 명암의 대비. 바로 앞에서 살펴본 카라바죠나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느껴졌던 감정이다. 그들의 빛은 그래서 점광원이나 스포트라이트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듯 어둠을 희미하게 밝히는 빛이 빚어내는 강렬한 명암의 대비를 이탈리아인들은 일찍이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라고 불렀다.



회화와 그래픽스는 이렇게 '빛'을 매개로 함께 닿아있다. 빛은 세상의 사물과 만난 뒤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눈부신 장면을 우리의 망막에 새겨 넣는다. 그 장면이 그림에, 영상에 담기고 또 다시 빛과 소통한다. 세상에는 인간이 만들어낸 많은 빛이 있다. 그 빛이 어둠과 공존할 때 강렬한 대비를 만들어, 보는 이에게 극적인 느낌을 선사한다. 그래서, '키아로스쿠로'는 예리하게 날이선 칼과 같다. 어둠과 빛을 날카롭게 잘라내면서 존재 자체만으로도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니까 말이다.




표지 이미지 출처: Light evaporating with people by teamLab. https://www.teamlab.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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