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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의 날개

아르누보 x 비실사 렌더링

by 예나빠


얼마 전 공개된 비디오 게임 하나가 게이머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면서 점점 인기를 끌고 있다. 바로 인디 스튜디오 엠버랩(Ember Lab)이 제작한 '케나: 정령의 다리(Kena: Bridge of Spirits)'다. 엠버랩은 원래 단편영화용 VFX나 상업 광고의 캐릭터 디자인을 주력으로 하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였는데, 비디오 게임을 만들고 싶었던 CEO의 강력한 의지로 야심 차게 개발에 나섰고 그 첫 결과물을 내놓게 된 것이다. 아래 스틸컷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작풍은 흡사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하고, 게임 스토리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지브리 애니메이션까지 연상시킨다. 애니메이션 제작사로써 오랜 기간 쌓아왔던 노하우를 비디오 게임에 쏟아부은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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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게임 '케나: 정령의 다리'



이 게임에는 만화적으로 처리된 캐릭터, 사실적인 배경과 자연현상, 판타지가 반영된 스토리 등 그래픽 애니메이션의 요소가 골고루 담겨있다. 그동안 월트 디즈니는 애니메이션을 통해 상상력 넘치는 매력적인 이야기를 전달해왔지만, 이는 결국 관람자가 단순히 '보는 행위'를 하는 영상 매체에 불과했다. 하지만, '정령의 다리'는 이런 세계관을 그대로 게임으로 옮겨옴으로써, 게이머들에게 마치 디즈니가 창조한 세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듯한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게 된 것이다.


또 다른 게임으로 가보자. 로블록스(Roblox)가 최근 메타버스 시대와 맞물려 공전의 히트를 치고 있다. 로블록스는 특정 게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들이 직접 게임을 쉽게 만들어 배포하고 다른 사용자들과 소통할 수도 있는 통합 플랫폼이다. 따라서 이런 게임 플랫폼에서 더 많은 사용자들을 유입시키기 위해서는 게임을 제작할 수 있는 저작 도구 자체가 직관적이고 쉬워야 한다. 따라서, 저작 도구에서 제공하는 게임 내 캐릭터, 건물, 아이템 등의 형상은 매우 단순하게 구성된다. 아래 스크린샷과 같이 게임 내 아바타들은 레고 블록을 이어 붙인 것같이 조악하기 짝이 없지만, 게임 자체가 주는 유머와 재미에 가입자 1억 명을 돌파하며 전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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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 로블록스 게임들. 위로부터, Meep City, Natural Disaster Survival, My Restaurant, Mad City



이전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그래픽 애니메이션이나 상상력을 발휘하게 만드는 게임들은 인물이나 캐릭터를 표현하는 데 있어 의도적으로 추상화 수준을 높인다. 구체적 묘사를 배제하여 관람자와 캐릭터 간의 동질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다. 사실적인 묘사는 때에 따라 시각적 경이로움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지만, 시각 효과보다 스토리텔링이 더 중요한 상황에서는 구체성이 오히려 이야기 몰입에 방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래픽스가 무조건 실사를 지향하는 것만은 아니다. 오랜 기간 동안 컴퓨터 그래픽스가 사실적인 표현을 추구해왔지만, 이를 위해서는 형상을 제작하거나 렌더링 하는 비용도 함께 증가했다. 이에 몇몇 연구자들은 '왜 꼭 그래픽스가 비싼 비용을 지불하며 사실적인 영상을 만들어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이 그래픽스의 다양한 응용분야들을 살펴본 결과, 일러스트레이션, 스케치, 카툰, 페인팅 등 몇몇 경우에는 오히려 형상의 추상화 수준을 높였을 때, 사용자가 메시지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어 전달력이 높아지는 것을 알게 되었다. 컴퓨터 그래픽스의 목적 자체가 다양한 형식(form)의 영상을 생성하고, 사용자가 이러한 영상을 시각적 정보로 활용하는 것임을 상기한다면, 최종 사용자가 '정보로써의 의미'를 충분히 소비할 수만 있다면 이는 반드시 실사일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실사 그래픽에 대한 반감에서 시작된 새로운 그래픽스 분야가 바로 비실사 렌더링 (NPR: Non-photorealistic Rendering)이다. 비실사 렌더링은 90년대 초에 태동해 20여 년간 많은 알고리즘들이 연구되었다. 현재 학계에서는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지는 않고 있지만, 게임과 같은 응용 분야에서 아직까지 적극적으로 적용되는 기술이다. 넓은 의미에서 위의 예들은 모두 비실사 렌더링의 한 장르라고 볼 수 있다. 비실사 렌더링은 크게 스케치, 페인팅, 만화/카툰 분야로 나눌 수 있는데, 어찌 보면 컴퓨터 그래픽스에 인간의 감성을 담은 경우라 할 수 있다. 사람이 수작업으로 그려왔던 스케치나 페인팅, 그리고 카툰과 같은 표현을 컴퓨터로 자동화하기 때문이다.


스케치(sketch)는 선을 통해 물체의 모양과 경계를 시각적으로 구분시킬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표현 방식으로, 쉽고 빠르게 그릴 수 있기 때문에 인류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후 다양하게 활용되어 왔다. 꼭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일생동안 어떤 형태로든 스케치를 한다. 전화 통화로 시간을 보내거나, 친구에게 길을 안내하거나, 동료에게 복잡한 생각을 설명할 때와 같이 말이다.


고급 스케치는 패션 디자인, 그림, 조각 또는 그 자체의 목적으로 예술 커뮤니티 전반에 걸쳐 사용되고 있다. 또한, 더 정교하고 전문화된 스케치는 일반적으로 매뉴얼, 의학 서적, 건축 설계의 일러스트레이션 등 에서 만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친숙함때문에 스케치는 비실사 렌더링의 주요 연구 소재가 되었다.


winkenbach_1994_CGPI_05 (1).png 스케치 렌더링의 예. 출처: Georges Winkenbach and David H. Salesin.Computer-Generated Pen-And-Ink Illustration.



컴퓨터 그래픽스로 회화양식을 모사하여 렌더링 하는 페인팅(painting)도 (상대적으로 그 응용범위가 좁긴 하지만) 비실사 렌더링의 주요한 연구 주제가 되었다. 회화는 인류가 창의성이 발현되기 시작한 이래, 인간의 양식과 일상을 후세에 보존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를 컴퓨터 그래픽스로 옮기는 것도 매우 흥미롭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과거에 그려진 정물화나 풍경화에 그렇게 감동받을 수 있다면, 그래픽스로 표현된 회화에서도 유사한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teaser_b.jpg 비실사 렌더링으로 생성된 장면. 출처: Mingtian Zhao, 'Customizing Painterly Rendering Styles Using Stroke Processes'


특히, 비실사 렌더링으로 페인팅 효과가 가미된 애니메이션이나 비디오는 관람자의 감성을 더욱 자극할 수 있다. 이러한 동기에서 제작된 영화가 바로 '러빙 빈센트(Loving Vincent, 2017)'다. 러빙 빈센트는 엄밀히 말해 비실사 렌더링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경우는 아니다. 영화의 취지 자체가 빈센트 반 고흐의 작업 방식을 최대한 지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블루 스크린에서 연기한 배우의 영상을 가이드 이미지로 변환하고, 이를 화가들이 캔버스에 유화로 그려냈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할 수 있을 정도로 매 프레임을 수작업 유화로 그려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컴퓨터 그래픽이 부분적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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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화 <Loving Vincent>


초당 12 프레임으로 88 분에 걸쳐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 위해, 107 명의 화가 팀이 총 64,000 개의 유화를 그려 냈다고 한다. 참으로 엄청난 양인데, 덕분에 영화 전체적으로 고흐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고스란히 유지하게 되었다. 물론 모든 영상을 처음부터 그림으로 그려 낸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장면은 블루 스크린에서 배우가 연기하고, 새로운 배경과 합성시킨 뒤, 화가에게 가이드라인이 되는 영상으로 가공된 후, 이 영상을 기반으로 화가가 유화 작업을 하는 것이다. 화가들은 촬영된 모든 프레임 영상에 유화로 색을 입여 초당 12 프레임 비율을 갖는 애니메이션을 생성하고, 마지막으로, 그래픽의 도움을 받아 선형 보간 된 이미지들을 각 프레임에 채워 넣어 초당 24 프레임 비율을 달성했다.


R1280x0[1].jpg 블루 스크린에서 배우의 연기(좌). 고흐의 그림 배경 합성(우). 출처: 'Tha Making of Loving Vincent", SIGGRAPH 2018
다운로드 (6).jpg 화가에 전달되는 가이드 이미지(좌). 유화 페인팅이 완료된 최종 영상(우). 출처: 'Tha Making of Loving Vincent", SIGGRAPH 2018



코믹스, 카툰(cartoon)은 그래픽스 응용에서 비실사 렌더링 기법을 가장 활발히 적용하는 분야다. 카툰, 코믹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만화의 역사는 사실 100년이 넘는다. 어린이용 그림책에서 출발하여, 신문 연재, 대본소 만화, 코믹스, 그리고 현재 하나의 장르로 구축된 웹툰까지, 오늘날 아이에서 어른까지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노출되어있는 만화의 영향력은 실로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나는 앞에서도 계속 인물의 '추상화(abstraction)'를 '만화적 표현, 처리'라는 말로 표현해 왔는데, 그렇기에 시각적 충실함보다 정보, 이야기 전달에 집중하는 비실사 렌더링의 그 목적과 개념이 만화만큼 일치하는 분야도 없을 것이다.


cartoon.png 자기 동일시 도구로써의 만화. 출처: McCloud Scott, “Understanding Comics - The Invisible Art”


위 그림을 한번 보자. 왼쪽의 실물사진을 스케치로 표현하면서 오른쪽으로 갈수록 점차 추상화 수준을 높여 최종적으로는 아이콘에 이를 정도로 단순해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각 그림 아래에 쓰인 숫자는 그 그림을 닮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인지를 의미한다. 이것은 이미지가 더욱 추상적이 될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이미지를 자신과 동일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만화의 위력이 나타난다.


추상화 수준이 높을수록 세부 디테일은 감소하는데, 결국 마지막 그림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얼굴로 인식할 것이다. 나이, 성별, 인종을 따져도 특정 인물과 유사할 가능성도 없다. 따라서 모든 연령, 성별, 인종 등을 아우르는 얼굴을 상징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이 경우 구체적인 정보가 없다고 해서 그 존재가 부정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런 추상화 표현을 우리가 쉽게 볼 수 있는 예는 바로 공중 화장실이다. 화장실 문에 달려있는 남/녀 아이콘은 극도로 단순화된 형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만일 화장실 문에 어떤 인물의 사진이 붙어있다고 상상해보자. 화장실을 드나드는 사람은 "이 사람이 실종된 사람인가요?", "이 사람이 여기에 사나요?"와 같은 쓸데없는 생각이 들 가능성이 클 것이다. 따라서, 만화 표현의 이미지가 제공하는 추상화는 불필요한 정보를 제거하고 관람자의 자연스러운 인식을 이끌어 낸다.


따라서, 단순함과 보편성을 담보하는 만화적 표현은 관람자에게 자기 동일시의 기회를 높여 보다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에, 앞에서 살펴본 오늘날 비디오 게임이나 그래픽 애니메이션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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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카툰 렌더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게임. 젤다의 전설(좌), 원신(우)




이런 만화적 표현, 아니 만화 그 자체를 연상시키는 회화 양식이 있다. 이전 글에서 현대 추상 미술의 기원은 몬드리안, 칸딘스키로 대변된다고 했다. 사물을 가능한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고전주의, 사실주의 그리고 빛에 의한 장면의 인상을 담으려 했던 인상주의까지, 종래의 회화 양식을 거부하고 대상을 최대한 단순화시켜 본질만 남기는 것이 그들의 철학이었다. 그리고, 인상주의가 전 유럽을 휩쓸던 시절, 방향은 다르지만 사실성, 구체성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은 또 다른 양식으로 일어났다. 바로 장식 미술의 기원인 아르누보(Art Nouveau)다. 명암, 양감, 질감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던 전통적인 회화에서 벗어나, 평면적인 느낌에 간략화된 묘사로 공간을 다양한 장식적 방법으로 채우는 회화 양식이다.


그리고 이 아르누보의 대표 주자가 바로 체코의 화가 알폰스 무하(Alphonse Mucha, 1860–1939)다. 문학, 음악, 회화 등 모든 예술성이 뛰어난 체코 민족주의의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라 어린 시절부터 그림, 음악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무하는 성장기부터 연극 포스터, 무대 배경, 전단지 디자인을 그리는 일을 해왔고, 성인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장식미 넘치는 화풍을 정립하게 이른다. 프랑스 파리에서 잡지와 광고 삽화를 그리며 생활하던 시절 유명 여배우의 광고용 포스터를 그려주었다가 대박을 치며, 본격적인 상업 포스터 화가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이후로 극장, 출판사, 배우, 정부, 교회 등의 다양한 주문처로부터 주문을 받아, 섬세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줄기차게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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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코, 몬테카를로 여행 광고 포스터, 1897 (좌), 몽상, 1897 (중), 계절 - 봄, 1896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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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디악(12간지) 달력, 1897 (좌), 예술-춤, 1898 (우)


그의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는 이상화된 여성을 전경으로 삼고, 꽃, 넝쿨, 긴 머릿결 등 다양한 곡선과 문양을 배경으로 채워 극도의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화풍을 고수했다. 아르누보 양식이 인기를 끌면서 전 유럽과 미국에까지 명성을 떨치기도 했지만, 그 양식의 전성기가 오래지 않아 끝나면서 무하의 그림은 퇴폐 예술로 매도당해 대중에게 잊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의 사후 오랜 시간이 지나 60년대부터 그의 작품이 재평가되면서 다시 사랑받기에 이른다. 특히, 작품에 살아있는 감각적인 장식미가 국가와 문화를 불문하고 현대인들의 미감에 부합하면서 대중에게 인기를 끌게 된 것이다.


그의 포스터들에 실린 여인을 보면 흡사 현대 순정만화, 애니메이션의 미소녀들을 보는 듯한 기시감을 느끼게 된다. 아니라 다를까, 무하의 그림체는 실제로 일본 및 한국의 만화가들, 일러스터레이터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고 그들은 작품 여기저기에서 무하를 오마주하는 장면을 삽입하기도 했다.


체코 프라하를 찾는 관광객들은 프라하성이나 카를교 등의 알려진 관광지들을 많이 방문하곤 하는데,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놓치게 되는 장소가 있다. 꼭 들려야 할 곳으로 무하 박물관(Mucha Museum)과 국립 미술관(National Gallery)을 개인적으로 추천한다. 다양한 포스터와 컬렉션, 그리고 회화 희귀본들이 전시되어 있어 무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분명히 잊지 못할 경험이 될 것이다. 특히, 국립 미술관에 상시 전시 중인 슬라브 서사시(Slavic Epic)는 그가 민족에 대한 사랑으로 말년에 마지막 생의 불꽃을 태우며 그린 연작으로, 그 압도적인 스케일에 숨이 멎을 것 같은 감동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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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 박물관. 무하의 이쁜 그림체를 좋아하는 것은 대부분 여성들이라는 것이 함정. 예나빠 촬영. 2014.




철학자 헤겔은 예술은 대립과 통합의 반복적인 과정을 통해 발전한다고 설파했다. 조화, 비례, 법칙의 엄격한 기준에 따라 사물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전통적 양식이 한 세대를 풍미했다면,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보다 자유롭고 가상의 세계를 추구하는 새로운 양식이 태동한다. 그리고, 이 또한 이들을 아우르는 새로운 사조에게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이런 반복적인 정반합(辯證法)의 역사는 비단 예술에 국한되지 않는다. 과학, 기술, 문화 전반은 과거를 부정하거나 보완하는 끊임없는 과정을 통해 진화해 왔다. 대표적인 시각적 기술 분야인 그래픽스는 오랜 기간 실사를 최고의 미덕으로 간주해 왔고 이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하지만, 인간에게 절대 가치라는 것은 없다. 대상과의 닮음을 부정하고, 더 큰 상상의 날개를 펼칠 수 있게 하는 비실사 그래픽은 그래서 여전히 의미가 있다. 다양한 응용분야에서 현실과 가상이 혼재되어 가는 지금, 앞으로 실사와 비실사의 경계가 어떻게 허물어질지 무척이나 기대된다.



표지 이미지: "Chess mask on sea", Salvador Da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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