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 델프트

<델프트 #1> | 페르메이르의 영혼이 숨쉬는 곳

by 예나빠

페르메이르(Vermeer)는 루벤스, 렘브란트, 고흐와 함께 네덜란드의 간판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화가다. 그에 대한 작금의 유명세는 그림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한 편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다름없는데, 특히, 트레이시 슈발리에가 99년에 발표한 동명 소설과, 스칼렛 요한슨이 주연한 동명의 영화가 성공하면서, 그와 그의 작품세계가 전 세계적으로 재조명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니, 그 전까지 무명에 가까운 존재였던 트레이시 슈발리에나 스칼렛 요한슨 모두 해당 소설과 영화를 통해 일약 스타가 되었으니, 그들 또한 이 그림의 직접적인 수혜자인 셈이다.


wm.jpg 페르메이르의 작품속의 여인들, 그리고 군계일학 (이미지 출처: http://www.essentialvermeer.com/)


그림을 직접 보기만 하면, 누구라도 대번에 '금사빠'가 되어버릴 만큼 진주 귀걸이의 그녀는 참 아름답기만 하다. 지금까지 많은 설이 있었지만 아쉽게도(?) 그녀는 실존하는 모델이 아니었으며, 페르메이르가 상상력으로 빚은 이상향의 여인이라고 한다. 하긴, 그의 작품들에 많은 여인이 등장하지만 그녀들 모두 진주 귀걸이의 그녀에 비하면 평범하기 짝이 없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래서 현실과 이상은 언제나 큰 간극이 있는 법인가.


상대적으로 페르메이르를 뒤늦게 접해, 이 진주녀에 대한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당연히, 그 영화나 소설을 본 적이 없었던 터였는데, 지난 주말에 마음먹고 스칼렛 요한슨이 연기하는 진주녀를 만나기 위해 영화를 찾아 보았다. 명분은 뭐 네덜란드에 가기 전에 페르메이르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 (웃음).

Girl.with.a.Pearl.Earring.2003.BDRip.1080p.BluRay.DTS.x264.OCSRerip.mkv_00274061.jpg * 페르메이르는 자신의 그림을 이해하는 하녀 그리트와 정신적 교감을 나누게 된다.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화가가 연심을 품은 하녀를 모델로 초상화를 그린다는 한 줄로도 요약되는 심플한 영화였다. 극적인 서사가 있거나 가슴에 울림을 주는 음악이 있던 영화도 아니었다. 뜻밖에도 이 영화가 나를 사로잡은 것은 비주얼이었다. 고색창연한 컬러가 넘실대는 식의 비주얼이 아니라, 딱 페르메이르다운 느낌을 주고, 그동안 보아온 그의 작품 속의 배경과 인물이 느껴지는 비주얼. 창가를 넘어 들어온 은은한 채광, 눈에 익숙한 그의 작업실안의 테이블, 의자, 소품. 그리고 그의 그림 속에서 미장센으로 자주 활용하던 그림 안의 그림이 데자뷔를 일으켜, 묘한 설렘을 일으켰다. 관객에게 이런 감정을 선사한다는 것은 이 영화가 그만큼 꼼꼼하게 미술과 고증에 공을 들였기 때문이 아닐까.

Girl.with.a.Pearl.Earring.2003.BDRip.1080p.BluRay.DTS.x264.OCSRerip.mkv_00061440.jpg 이 영화는 페르메이르 그림의 실사판이다.


몇몇 장면에서 이 영화의 또 다른 디테일은 엿볼 수 있다. 이 영화에 페르메이르의 작품들이 등장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심심치 않게 다른 이들의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페르메이르의 작업실을 겸하던 거주하던 집(페르메이르는 부인과 11명의 아이들과 함께 그의 처가댁에서 살면서 작품 활동을 했다. 요즘 말로 하면 데릴사위였던 셈)의 복도에 걸려 있어 화면에 스쳐 지나던 그림들이 실제로 다 그 시절에 있을 만한 그림들이었다.


예를 들어, 벽에 걸려 얼핏 보이는 그림은 플로리스 반 다이크의 <빵과 과일이 함께 있는 테이블>로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장르화중 하나다. 이 그림이 실제로 그려진 해가 1615년이고 영화의 배경인 1665년이니 당시 나이로 50살 정도 된 셈. 또한, 페르메이르의 후원자였던 반 라이벤의 집의 벽엔 루벤스의 <시몬과 페로>가 걸려있다. 옥살이를 하는 애비(시몬)가 굶어 죽게 되자 보다 못한 딸(페로)이 애비에게 옥중 수유를 하는 멜랑콜릭 한 장면으로, 로마시대의 야사를 옮긴 루벤스의 1612년 작품이다. 과연 페르메이르나 라이벤의 집에 이 그림들이 걸려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증을 기반으로 한 이런 영화적 허구가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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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A-4821.jpg 플로리스 반 다이크 (Floris van Dijck), <빵과 과일이 함께 있는 테이블> 1615년, 패널에 유채, 82.2x111.2cm,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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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A-345.jpg 피터 폴 루벤스 (Peter Paul Rubens), <시몬과 페로>, 캔버스에 유채, 155×190cm,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페르메이르가 생애를 보내던 네덜란드의 델프트의 배경 묘사도 꽤 섬세했다. 델프트 시청이나 신교회의 건물도 그대로이고, 습기 많은 운하의 아침과 아기자기한 골목들의 묘사도 17세기의 네덜란드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실제 촬영은 대부분 암스테르담, 룩셈부르크에서 했으며, 시청 및 신교회가 배경으로 나오는 몇 장면만 델프트에서 했다는 것이 함정)


영화에서처럼 페르메이르는 대부분의 작품을 그의 작업실에서 작업했고, 야외로 이젤을 들고 나와 그림을 그려 작품을 남긴 것은 딱 두 점이다. 델프트의 풍경과, 작은 골목. 이 두 작품을 통해 페르메이르의 눈으로 바라본 당시의 델프트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파란 하늘에 낮게 드리워진 뭉게구름과,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빛을 받은 노란 벽, 그늘진 빨간 지붕, 그리고 습기 찬 운하에 반영된 이들의 물그림자. 이 모든 것들이 어울려 있는 델프트의 어느 날은 너무나도 평화롭고 서정적이다.

Vermeer-view-of-delft.jpg 페르메이르 (Johannes Vermeer), <델프트 풍경> 1660-1661년, 캔버스에 유채, 98.5x117.5cm, 마우리츠호이스 미술관


페르메이르가 평생을 바쳐 델프트를 그려왔지만, 정작 델프트에는 페르메이르의 그림 한점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대부분 그의 작품을 소유했던 반 라이벤의 자손에 의해 그림들이 암스테르담으로 팔려나갔고, 이후 헤이그, 파리, 런던, 베를린, 드레스덴, 프랑크푸르트 등 유럽 각지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아쉽게나마 그에 대한 오마쥬로 윔 쉬퍼스가 1976년 세운 <우유를 따르는 여인>의 조각상이 쓸쓸하게 델프트의 페르메이르를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Melkmeisje-Delft.jpg 윔 쉬퍼스 (Wim T. Schippers), 1976년, <우유를 따르는 여인상>, 델프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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