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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약산진달래 Aug 16. 2024

건망증

50대를 지내며 뇌도 함께 나이가 들어가는 것일까? 깜빡 깜빡 할때가 많아진다. 그럴때마다 좌절하고 자책하고 살가치가 없는것처럼 느껴진다.


깜박하는 건망증은 뇌가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다 과부하가 생긴 탓에 일시적으로 저장된 기억을 끄집어내는 능력에 문제가 생긴 상태를 말한다. 20대 젊은 나이에 건망증이 라면 병일 수 있지만 반평생을 살았다면 노화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제 여러가지 일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없는 나이듦을 받아들일 준비가 필요하다.

물을 끓이고 난 후 물병에 부으려고 하니 있어야 할 자리에 있던 물병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늘 두었던 자리인데 어디 다른 곳에 둔 것일까? 아침부터 숨은 물병 찾기가 시작되었다.


찬장은 높이가 낮아서 물병이 들어갈 수 없었지만 모든 찬장을 열어보았다. 역시 보이지 않았다. 방에 둔 것은 아닌지 방안을 둘러보고, 화장실일지도 모르니 화장실도 두리번거려보았다. 베란다도 찾아보았지만 아무 곳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냉장고가 생각났다.


밤사이 냉장고에 물병을 넣어 둘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났다. 며칠 전 밤 물병의 물이 많이 남아 냉장고에 보관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냉장고에도 물병은 보이지 않았다. 냉동고도 열어보았다. 있을 리 없었다. 이럴 때 귀신이 곡할 노릇이란 말을 쓰는 거겠지.


어젯밤 잠들기 전까지 나의 동선을 뇌를 사용해 시뮬레이션 해보았지만 온통 검은색 칠을 할 뿐 생각나지 않았다. 단지 지난밤 조금 소란스러운 소리가 주방 어딘가에서 들렸던 것 같은 기억이 스멀스멀 솟아났다. 그래 귀신이 가져갔거나 도둑이 들었을 수도 있겠다. 사실 물병을 훔쳐 갈 도둑이 있겠는가? 귀신도 물병을 가져갈 수는 없지만 물병을 찾다가 찾기 못하자 나의 생각은 절대 있을 수 없는 그것까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러다 아직 열어보지 않은 싱크대 아래 서랍이 생각났다. 냄비를 보관해 둔 곳과. 커피믹스 상자를 넣어둔 장을 열어보았다. 그곳에도 없었다. 이쯤 되니 마음은 지난번 유리컵 깨서 버린 것이 혹시 물병이 깨져서 버린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집안 모든 곳을 둘러보았지만 물병이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하다가 거짓말처럼 사라진 물병 이야기를 했다.

" 어딘가 있을 텐데, 슬프게도 이제 우리 나이가 그런 나이가 되었다"

서로를 위로하던 찰나 갑자기 아직 열어보지 않은 서랍장이 생각났다. 바로 간장이나 식용유 등을 보관하는 장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문을 열자마자 간장 옆에 눈 건강을 위해 마시고 있는 결명자차가 담긴 물병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침에 요리를 하며 식용유를 꺼낼 때만 해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곳에 얌전히 보관되어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도 그럴 것이 물병은 왼쪽 문 앞에 있었고, 식용유는 오른쪽 문 앞에 놓여 있었다. 나는 오른쪽 문만 열어 식용을 꺼내 썼던 것이다.


물병은 귀신이 가져간 것도 도둑이 들어서 훔쳐 간 것도 아니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내가 며칠 전 깨트린 것도 물병이 아니라 그냥 유리컵이었다. 물병을 찾자 얼토당토 않는 생각까지 수긍할 뻔한 내가 우프기도 했다. 생각나지 않지만 어젯밤 요리 시 간장을 사용하고 난 후 주변에 있던 물병까지 함께 넣은 것이라고 짐작이 되었다.


심한 건망증은 종종 찾아올 수 있고 이런 사소한 실패들은 나를 좌절하게 할 수 있지만 무기력해지지 말자. 있어야 할 것은 어딘가에 분명 있는 것이다. 그저 내가 찾지 못하거나. 잊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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