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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량도 지리산 - 옥녀봉 종주

통영길문화연대 토요 걷기

by 파란하늘

통영에 걷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다. 통영길문화연대. 2012년 발족하여 지금껏 잡음 없이 운영되고 있는, 충성도 높은 회원들이 매달 두 번의 토요 걷기를 진행한다. 통영시의 보행환경 실태조사와 통학로 그린로드 대장정을 이끌고 있기도 하다.

그 회원들이 이번에 사량도 지리산-옥녀봉 종주를 했다.

사량도에는 평일에 6번, 주말엔 12번 배가 들고 난다. 가오치항에서 아침 7시부터 오후 6시까지 매시간 배가 들어왔다 나간다. 매년 4만 명의 입도한다. 주로 지리산 옥녀봉 등반을 위한 등산객의 발걸음이 많다.


작년 사량도행은 안개로 배가 결항되면서 무산되었다. 친구 둘이 금요일에 미리 들어오겠단다. 진촌 무무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루 자고 우대식당에서 아침을 든든하게 먹었다. 숙소 체크아웃 때 식사 후 커피 한 잔 하러 오라 하여 갔다가 이야기의 늪에 빠져 배가 닿는 줄도 몰랐다.

회원들은 8시 배를 타고 들어왔다. 40분에 사량도에 도착하여 하선 후 바로 버스를 탔을 것이다. 우리는 45분에서야 아차 싶어 뛰어나왔다. 터미널에서 출발한 버스가 바로 앞에 있었다. 서둘러 버스를 잡아탔다. 민망한 마음에, "배 못 탈까 봐 하루 전 날 들어와서는 버스를 놓쳐 산에 못 갈 뻔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버스는 옥동 사금을 거쳐 돈지마을에 닿았다. 지금껏 돈지마을에서 지리산을 올랐는데, 이번엔 아무도 내리는 사람이 없다. 버스는 다음 정류소인 수우도 전망대에 닿았다. 버스 안의 모든 사람이 다 거기서 내렸다. 수우도 전망대에 조형물이 있다.

여기가 사량도의 새로운 사진스폿이다. 등산객들이 들머리를 돈지에서 수우도 전망대로 바꾼 이유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여기로 달려가 줄을 서서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고서야 등산로 들머리로 발길을 돌린다.

사실 바닷가 마을인 돈지에서 올라가면 해발 390미터쯤 되는 지리산을 진짜 '해발'부터 올라야 한다. 경사도 가파르다. 수우도전망대는 7부 능선쯤부터 시작이라 한 10분 정도 오르니 능선이었다. 훨씬 수월하게 지리산에 오를 수 있다.


사량도 지리산 줄기는 암릉이다. 용암이 훑고 간 무늬가 선명하다. 켜켜이 앉은 주상절리가 비틀어져 세로로 서 있다. 그냥 흙으로 된 산을 오르는 것보다 훨씬 스릴 있고 재미있다. 바위라서 사방에 가리는 것이 없다. 처음에 오르막을 오른 후에는 그저 능선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된다. 물론 예전 밧줄 구간에 데크와 사다리가 있긴 하지만, 두려움이 관건이지 힘을 써야 하는 구간이 아니다. 게다가 한려해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멋진 산행이 또 어디 있겠는가.


지리산은 돈지마을(돈지리)과 내지 마을(내지리) 사이에 있는 산이다. 그래서 지리산이다. 두 지리의 뒷산. 물론 지리산에서 바다 건너 사량도가 보이고, 사량도 지리산에서 저 멀리 육지의 지리산이 선명하다. 그래서 지리망산이라는 설이 생겼고 그렇게 회자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원래 그런 것도 아니니 지리망산이 정설인 것처럼 확산하는 것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지리산 정상을 지나 월암봉(달바위)으로 가는 구간에 바위에 스텐봉을 박아 놓은 구간을 지난다. 칼날 같은 능선을 지나야 한다. 안전바(bar)가 설치되어 있으니 도전해 보자. 여기 아니면 어디에도 그런 곳이 없다.


가마봉 아래 낭떠러지에는 그 아래 펼쳐진 바다와 마을의 지붕이 보이는 곳이라 사진을 찍으려는 젊은이들이 줄을 선다. 인스타 사진 스폿은 수우도전망대뿐이 아니라, 가마봉 이곳 낭떠러지와 옥녀봉 구간에도 있다.

인생 사진을 건지기에 충분하다.


지리산 옥녀봉 구간의 직각 사다리구간이 두 군데 있는데, 사진에서 왼쪽에 보면 우회로가 있다. 물론 초행길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사다리로 내려오더라도 뒤로 돌아서 한 발씩 내려오면 충분히 안전하게 내려올 수 있다. 단, 산행하면서 술을 마시는 분들이 간혹 있다. 가볍게 한 잔 정도라도 개인차가 있으니 사량도 산행에서 음주는 가급적 참아주시길.

요즘에야 안전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 그런 일은 많이 줄었지만, 예전에는 해마다 인사사고가 일어났던 곳이다. 이곳에 119가 있는 것이 아니고 산이 이 모양이라, 구조는 불가하다.

헬기가 뜨면, 섬 주민들은, "에고, 또 죽었구나' 했다 한다.

아무쪼록 조심조심.


가마봉을 지나 옥녀봉으로 가는 길에 출렁다리가 놓여 있다. 진촌 쪽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이 출렁다리를 건넌 이후에 더 갈 엄두를 못 내는 경우가 있다. 다행히 대항마을로 내려가는 길이 있으니 그리로 내려가면 쉽게 터미널로 회귀할 수 있다.


사량. 蛇梁.

우리나라 남해안은 원래 왜구의 침략이 잦았던 곳이다. 사량도에 최영장군 사당이 있다. 고려시대 장군이 왜군을 물리치려고 이곳까지 왔었다는 이야기다. 조선시대라고 달랐을까.

옛날에 사량도는 박도라고 불렀다. 섬의 주민들이 한자를 알 리 없다. 지명은 무엇을 닮았거나, 무엇이 많이 나느냐에 따라 정해졌다. 박도가 왜 박도인지는 기록에 없다. 아마 박 모양을 닮았거나, 박이 많이 났거나였지 않을까. 행정을 다루는 사람들이 주민들의 말을 한자로 기록하다 보니 적당한 한자를 따와서 이름을 붙였다.

사량이라는 말은 세종실록에 등장한다. 조선 수군이 정박처로 이용하던 곳이다. 장계가 올라왔을 것이다.

상도와 하도 사이를 흐르는 해협의 이름을 모르는 상태에서, 그 모양이 뱀이 움직이는 모양이라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해협은 대들보 량자를 쓴다. 노량, 명량, 통영의 견내량은 너른 바다가 양쪽의 섬이나 땅에 의해 좁아지는 부분이다. 대들보를 놓으면 충분히 건널 수 있을 정도로 좁다는 뜻을 지녔다고 한다.

당시에는 섬에 진영이 없던 때라, 이 해협에 머물렀을 것이다. 수군의 배는 땅에 정박하지 않는다. 배에서의 오랜 생활에 지친 수군들이 배가 땅에 닿으면 죄다 도망가기 때문이다.


수군 만호를 옮기고 사량 해협을 칭하던 말이 1437년 10월 1일 드디어 공식적으로 '사량'이라 부르라 세종대왕의 윤허가 떨어졌다.


세종실록 83권, 세종 20년 10월 1일 을사 9번째 기사

의정부에서 병조 정문(呈文)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구량량(仇良梁)의 병선(兵船)을 이미 사량(蛇梁)으로 옮겨 정박하게 하고서, 그대로 구량량 만호(萬戶)라 하는 것은 불가하오니, 사량 만호라고 고쳐 부르게 하옵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그 이후 박도는 사량도가 되었다.



노닥노닥 쉬엄쉬엄 사람들이랑 걷다 보니 5시간이 넘었다. 힘들지 않다 하면 거짓말이지만, 난이도 상이라고 공지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다들 입을 모은다.


대한민국 100대 명산, 사량도. 지리산-옥녀봉 코스, 한 번 와 볼만 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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