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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kas Dec 07. 2020

7.7

나에 대하여

7.7


오늘 내가 알게 된 나의 남성호르몬 수치이다.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로는 일반적인 남성들이 가지는 수치가 3-8 정도라고 하셨고, 이 정도 수치면 괜찮다고 하셨다. 그렇다. 나의 남성호르몬에는 문제가 없었다. 



언제부턴가 나에게 자꾸 찾아오는 우울은 그 방문 빈도가 점점 잦아진다. 술을 퍼먹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서 달리기, 영상 일기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우울의 크기를 조절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많은 글을 찾아 읽어보고, 영상들을 시청하며 관련 정보를 습득하려고 했다. 그중 알게 된 것 중 하나가 남성호르몬의 수치가 낮으면 쉽게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진다는 것이었다. 이에 흥미가 생긴 나는 민망함과 뻘쭘함을 무릅쓰고 비뇨기과를 찾아 호르몬 검사를 했던 것이었다.



7.7이란 숫자가 나에게 주는 묘한 안도감과 함께, 도대체 왜 나는 이 모양으로 살고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다른 동나이 대의 남자들에 비해 더 파이팅 넘치지 않을까? 왜 나는 스스로가 피곤해질 만큼 예민한 것일까? 감수성은 쓸데없이 왜 이리 풍부한 걸까? '너는 내 운명', '8월의 크리스마스' 같은 영화를 소개하는 유튜브 영상만 봐도 왜 나는 눈물이 펑펑 나는 걸까?



이런 고민들은 스스로 하여금 나 자신이 수컷으로서의 매력이 없다고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외관 등의 신체적인 매력을 제외하고 내가 생각하는 남자의 매력은 바로 '수컷으로서의 매력'이다. 물론, 수컷/암컷 구분 짓는 것이 굉장히 고리타분한 생각이고, 젠더 감수성이 떨어지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수컷으로서의 매력'은 흔히 생각하는 '마초'와는 다른 느낌이다. 과단성, 용기, 결정력, 끈기, 위험을 감수하는 능력 등 무언가 진취적인 모습을 뽐내는 요소들이 바로 '수컷으로서의 매력'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소심함, 우유부단함, 시니컬함, 너무 많은 생각과 쓸데없는 과한 상상력. 이러한 것들이 내가 가진 것들이었고, 이것들은 나의 인간관계에서도 잘 드러난다. 대립과 경쟁을 피하려는 태도, 모두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과한 욕심, 상대방의 시선에 과한 신경을 쓰며 작은 것들에 많은 의미를 두려는 행동들은 나를 너무나도 피곤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는 곧 나의 낮은 자신감과 자존감으로 이어졌다. 



낮은 자신감과 자존감은 특히 연애에 있어서 더욱 그 모습을 잘 드러낸다. 매번 만나는 사람마다 항상 내가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던 고민 중에 절대 사라지지 않는 고민 하나가 바로 '너는 나를 정말 사랑하는가'였다. 항상 상대방이 나를 좋아하는지 전전긍긍했고,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의 모든 말투, 행동, 표정 등 하나하나에 신경을 써야 했으며,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곤 했다. 사랑에 있어서 어설픈 실증 주의자였던 나는 그래서인지, 나를 더 좋아해 주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었다. 물론 내가 진심으로 좋아했던 사람들은 있었으나, 나는 그 흔한 '들이대'는 것조차도 못했다. 왜냐면 낮은 자존감은 상대방이 나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으니까. 이렇듯 연애는 나에게 너무 많은 감정 소비를 하게 만드는 힘든 것이었다.



결국엔 7.7이란 숫자가 증명하듯 몸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나의 우울과 낮은 자존감과 자신감은 호르몬과는 무관했던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원인일까? 당장은 모르겠지만, 아마 내 머릿속에 특정한 사고 패턴이 옛날부터 자리 잡게 된 것 아닌가 싶다. A를 생각하면 B로 나와야 하는 일반적인 사고와 다르게 나는 A를 생각하면 X, Y, Z로 나오게끔 무언가 정형화된 사고 패턴이 머릿속에 습관화된 것 같다. 마치 종이 치면 침을 질질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 마냥 말이다. 이러한 패배주의적 사고 패턴은 아마 내 머릿속 안에 자리 잡고 나를 계속 갉아먹어 왔는지 모른다. 



진단은 잘 내릴 수 있어도, 치료는 항상 쉽지 않은 법이다. 오래 고착화된 습관을 고친다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 역시 노력이 필요한 일일 테고, 어떻게 보면 운동과 같이 훈련이 필요한 일일 수도 있다. 그동안 몸만 건강하게 만들 줄 알았지, 마음을 건강하게 만드는 법에 대해서는 외면해왔다. 이젠 나를 다시 한번 돌아보며, 나의 마음을 요양하는 시간들을 자주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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