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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진영 Oct 27. 2018

그토록 아쉬운 이별

우즈베키스탄 주말여행 7

(이전 글)

https://brunch.co.kr/@akkakii/14



에스라와 마드라사 관계자들

그렇게 우리는 마드라사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는 걸 보고 어떤 백인 커플도 들어가려고 했지만, 마드라사 관리자는 그들을 막고 우리만 들여보내주었다.


마드라사 입구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는데, 에스라가 그걸 촬영하다 혼나서 우리는 얼른 자리를 떴다... 건물 안뜰 정원으로 들어가자 몇 명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분들을 따라 학생들이 꾸란을 배우는 교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신학교의 교실. 아랍 글자 ‘하’(ح)쓰는법을 배우고 있나보다.


그들과 에스라는 터키어로 능숙하게 대화했고,(많은 우즈베인들은 터키어도 구사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못알아들어서 그냥 교실 사진이나 찍었다. 칠판에는 아랍어 글자를 배우는지 글자 몇 개가 맥락없이 씌여있었다. 비록 그들의 대화는 한참을 못알아들었지만, 그리고 마드라사 안에는 생각보다 별게 없었지만, 관광객들이 들어오지 못 하는 곳을 에스라 덕에 들어왔다는 점, 그리고 그 안의 교실, 학생들의 생활공간까지 실제로 구경할 수 있었다는 점에 뭔가 신기하기도 하고 좋았다.


덕분에 우즈베키스탄 곳곳에 폐허로 남아있는 마드라사 유적들이 수 백년 전에는 이런 모습으로 학생들이 꾸란을 배웠겠구나 상상할 수 있었다.


학생들의 생활공간. 기어들어가야 할 정도로 작고 낮다.


그렇게 한참을 에스라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그들과 대화를 했고, 나는 다섯시가 되자 호스텔로 돌아가야 했다. 낙쉬반디 묘소에 가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스라와 작별인사를 하고, (원래는 미노라이 칼론도 가보려고 했는데 돌아오니 올라가는 입구가 잠겨 있었다. 분명히 탑 위에 누군가 있었던게 확실해...) 호스텔로 돌아오니 사포 아저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할아버지랑 같이 티코를 타고 출발했다. 이미 늦은 오후여서 얼른 가야 했다.


들은 얘기는, 그 일본인 룸메이트가 낮에 기차를 타려고 숙소를 출발했는데, 기차역으로 가는 도로를 터키 대통령때문에 막아놔서 3km를 넘게 뙤약볕 아래 그 무거운 짐을 지고 걸었고, 겨우 택시 하나 찾아서 태워 보냈다고 했다. 어휴... 이런 날씨에 호스텔 주인이나 룸메 아저씨나 다 너무 고생 심했겠다고 생각했다.     


곧 낙쉬반드 묘소에 도착했다. 할아버지와 나는 우선 그의 어머니 묘를 보러 갔다. 작은 하우즈(연못)가 있었고 그 옆에 모스크가 있었다. 그 뒤로 그녀와 그 가족의 묘가 있었다.

낙쉬반디 묘소. 우즈벡에서 가장 신성한 곳이다


그리고 나서 다시 되돌아나와 낙쉬반드의 묘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여러 건물이 있었는데, 또다른 모스크가 있었고, '하나카' 라는 건물이 있었는데, 마드라사랑 비슷하게 생긴 이 곳은 집 없는 사람들이 먹고 자고 하면서 성경공부도 하고 기도도 드리는 그런 곳이라고 한다.     


낙쉬반드의 묘


그 건물을 지나니 드디어 낙쉬반드의 묘가 나왔다. 그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 근처에 사포 할아버지와 나는 벽 아래에 걸터앉아서 이슬람교에 대해 이야기했다. 할아버지가 이슬람이 아닌 사람들, 즉, 무함마드가 전한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은 전부 ‘죄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흥미로웠다.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에게, “저는 종교가 없는데요, 그럼 할아버지가 보기에 저도 죄인인가요?” 라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잠시 고민하더니 그런 것은 아니고 단지 아직 깨닫지 못한 자 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다시 일어나서 뒤쪽으로 가니 공동묘지처럼 보이는 곳이 나왔다. 미로처럼 복잡하게 구성된 곳을 여기저기 걷다가 나왔다. 나오니 해가 지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나를 아르크로 데려다 주셨다. 그 와중에 한국의 경제발전, 우즈베키스탄의 민주주의, 한국 사회에 관해 할아버지가 많이 물어보셔서 수다를 떨었다.     


해질녘의 아르크


아르크에 올라가 어제 만난 기념품 아저씨에게 인사를 건네니 나를 알아보았다. 씩 웃으며 나보고 잠깐 기다리라고 했다. 오늘은 러시아 아줌마 한 명이 더 와있었다. 어디서 알았는지 우리 둘은 준비한 돈을 손에 쥐고 경찰이 오기를 기다렸다.     


곧 그가 왔고, 뒷문을 열자 흙 언덕 너머로 환상적인 부하라의 노을 파노라마 뷰가 펼쳐졌다. 그리고 뒤쪽으로는 뉘엿뉘엿 지는 해와, 그 위를 날아다니는 수천마리의 새들이 있었다.     


땅거미 질 무렵, 부하라


살짝 울컥했다. 한참을 그곳에서 머물다 해가 질 때 내려왔다. 호스텔에 돌아오니 8시쯤 되었다. 9시 반에는 기차역으로 출발해야 했어서 잠깐 저녁먹고 마지막 남은 우즈베키스탄 돈을 모두 기념품 사는데 털었다. 파스타 그릇이랑 내 밥그릇을 샀는데 엄청 화려하다. 원래 되게 흥정 못하는 성격인데 내가 남은 돈이 그거밖에 없어서 그 가격 아니면 못산다 하니까 흥정이 엄청 쉬웠다. 역시 흥정할 때는 미련이 없어야해...


그렇게 부하라 여행을 마치고 호스텔로 돌아왔다. 너무 돌아가기 싫었다. 산자르와 사포 할아버지가 너무 좋은 분이어서 떠나고 싶지 않았다. 아쉬운 인사를 하고 우리는 기차역으로 향했다. 할아버지와도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고 기차를 타러 갔다.  


   

야간기차의 침대칸에는 이번엔 우즈벡 아저씨 세 명이 타고 있었다. 한 명은 가이드였고, 한 명은 선생님이었다. (나머지 한 명은 기억안남) 가이드는 나보고 왜 가이드 없이 혼자다니냐고 물어봤다. 그냥 혼자 다니는게 좋아서 그런거지 뭘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싶었다.   

  

밤기차라 곧 그들은 잠들었고, 나도 살짝 잠들자마자 사마르칸트에 도착했다며 차장이 나를 깨웠다.  

   

기차역에 나가자마자 내게 접근한 택시기사 하나 붙잡아서 공항으로 가자고 했다. 가격 얘기는 안 했다. 내 수중에는 만 오천 숨(1.9달러)이 있었고 그걸로 충분하고도 남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마르칸트에서 아무리 멀리 택시를 타도 1불을 넘을 일이 없다)  

  

출발하기 전에 그 기사가 나보고 택시 요금 아냐고 물어봤다. 안다고, 만 숨 줄거라고 하니까 안된다고, 5만 숨은 줘야된다고 한다는거다. 어이가 털려서 나가려고 하니까 기다려 기다려 이랬다. 삼만 숨은 줘야 한다고 하니까 나는 다시 그냥 나가려 했다. 그러니까 또 기다려 기다려. 블라블라 하고 출발했다. 나는 끝까지 만오천 아니면 안탄다고 그랬다. 뭐 만오천에 만족하나보다 이 생각에 그냥 타고 있었다. 도착하고 돈을 다 주었고 내렸는데, 나를 불렀다. 얼마 준거냐고. 삼만에 합의한거 아니냐고. 내 이럴줄 알았어... 그래서 나도 한마디 하니까 (녯~ 녯~ 삣나짜찌 삣나짜찌) 의외로 순순히 알았다고 하고 그냥 가버린다. 솔직히 우즈벡에서 아무리 바가지 써도 5천원을 넘을 일이 없어서 웬만하면 나도 그냥 바가지 당하고 마는데, 잔돈이 없어서 이제 바가지 써줄 수가 없다 ㅠ


아무튼 그렇게 사마르칸트 공항에 무사히 도착했고, 앉아서 기다리다가 아쉬운 발걸음으로 다시 모스크바로 컴백! 이제 내게 남은건 출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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