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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대건 Sep 30. 2019

용기의 의무를 가진 마음

노다 마사야키의 <떠나보내는 길 위에서>를 읽고

읽는 내내, 피로했다. 견딜 수 없었으며 잊고 싶을 정도로 속이 끓었다. 어쩜 그렇게도 잔인한 말과 행동들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상상했다. 나라면, 내가 JAL 유족 보상 담당자라면, 내가 세월호 유족 담당자라면, 나였다면 나는 어땠을까.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힘들었다. 4월 16일, 나는 사건을 생방송으로 보고 있었다. 아이들이 물에 빠져 죽어가는 것을, 또 물에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마치 박지성이 뛰던 맨유의 축구경기처럼. 별일 아니라고 여긴 것도 같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나는 내가 끔찍해서 참을 수 없다. 그래서 저 물음의 답, 나도 잔인하게 그들에게 상처 줄 것이다. 끝나버린 축구경기에서 오심 때문에 졌다며 따지듯이.


아직도 진도체육관의 분위기가 기억난다. 그것은 내 마음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평생의 감각으로 남을 것이다. 머리로 이해하거나 마음으로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 분명 체육관 안쪽에 존재했던 중력은 밖과 달랐다. 들리지 않는 소리가 있었다. 그곳에는 수많은 울음과 비명 욕과, 탄식과 절망과 자조와, 한숨과 끝도 없는 슬픔과 슬픈 소리들이 회색빛 먼지에 매달려 부유하고 있었다. 그것들이 짓누르고 있었다.


대단한 책을 읽은 서평이 한갓 반성문으로 되어버린 것은 어쩔 수 없다. 우리나라 돌아가는 꼴을 보고 있는 같잖은 내 생각엔, 그들의 상처에 공감했다든지,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좋다든지, 무슨 방식으로 유족들을 생각해야 한다든지… 다 부질없다는 회의감도 든다. 국가는 변하지 않고, 기업은 영원하며, 국민은 내 편이 아니다. 이 나라에서 그들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으며, 끊임없이 썩어 곪아버릴 것이다. 아마 이런 말을 꺼낸다면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왜 내 시간과 돈을 들여서 그들을 돌봐야 하느냐고.” 그 사람들을 모두 데려다 이성의 여신 앞에 제물로 바쳐 그들을 멍청하게 만든 국가를 위해 축원하리니.


결국 남은 것은 내가 또는 내 가족이 재난에 속하지 않을 ‘운명’이어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재난을 일어나지 않게끔 관심을 두고 지켜보는 ‘용기’다. 용기라고 말해야 할 정도로 우리는 쉽게 나서지 않는다. 기꺼이 언제라도 사람들을 구해낼 준비를 해야 한다.


이제 진도 팽목항에는 세월호가 없다. 가보지는 못했지만, 군마현의 우에노무라에도 JAL 점보기도 없을 것이다. 오랫동안 간호한 가족이 서서히 죽었을 때, 유족은 비교적 쉽게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는다. 하지만 가족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경험한 유족들은 참사 이후에도 죽음의 과정을 천천히 되밟아야 한다. 그것이 ‘죽은 사람을 죽이는’ 과정이다.(백승찬). 그 과정에 은연중 나도 모르게 동참한 것 같다. 또 마음이 무겁다.(16.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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