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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벗 Oct 11. 2021

나는 사수를 가져본 적이 없다

일을 배워본 적이 없는 사람이 성장하는 방법


"일하는 사람은 사수의 습관이나 스타일을 체화하게 되는 것 같아요.
처음 일을 배운 사람의 영향이 몸에 각인된다고나 할까요?" 


전에 일하던 스타트업의 회식에 참석했다. 함께 일하던 에디터분 한 명이 6개월의 계약을 마치고 회사 사정 때문에 재계약을 하지 않기로 하셨고, 나도 다른 회사에 재취업해서 일하기 시작한 첫 주차여서 타이밍이 잘 맞았다. 시작하는 사람과 마무리하는 사람을 포함한 대화여서 그런지 역시 커리어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함께 일하시던 에디터분이 본래 프리랜서로 일하시던 분이라서 기자 출신이신 다른 분께 많은 도움을 받으며 회사 생활을 했다고 했다. 기자 출신이신 에디터분은 사수/부사수 체계가 있는 언론사에서 일하셨던 탓인지 처음 일하시는 분과의 거리를 좁혀 세세하게 가르쳐주는 방법을 선호하시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몇 개월 동안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었을 텐데, 나가시는 에디터분은 앞으로 계속 글을 쓰시면서 처음 배운 사람의 지침과 가이드가 계속 떠오를 것 같다는 얘기였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사수가 있었던 적이 없는데... 왠지 조금 억울한 이 기분은 뭐죠?" 


생각해보니 나는 공식적으로 '사수'가 있었던 적이 없던 것은 물론이요, 누가 일을 친절하고 세세하게 가르쳐준 적이 없다. 왠지 모르게 조금 서글픈 느낌이 들었고, 잠시 괜히 불안해졌다. 


사실 나는 태스크에 집중된 기술이나 테크닉은 결국 자신의 스타일에 맞게 배워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일의 목적, 의미, 스타일 등을 본인이 직접 고민하며 나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굳이 나와 잘 맞지 않는 뛰어난 누군가의 방식을 받아들여봤자, 깎고 다듬어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과정은 매한가지가 아닌가. 그렇지만 오랜 경험을 가진 분에게 노하우를 전수받는다는 일이 주는 심리적 안정감이 있다. '그래도 나는 이 분께 계속 무언가를 배워나가고 있지 않은가'하는 느낌이 있을게다. 


사수의 시대 


사수와 부사수는, 각각 군대에서 엎드려서 총을 쏘는 사람과 옆에서 탄피를 주워 세주는 사람을 부르는 명칭이다. '총이란 이렇게 쏘는 거야. 넌 탄피나 주우면서 잘 지켜봐'로 시작되는 대화가 떠오르지 않는가. 이런 표현은 말하자면 일을 도제식으로 가르치고 배워왔던 시대의 산물인 것은 아닐까? 그런데 왜 일은 도제식으로 가르쳐야 하는 것일까? 


'사수'라는 명칭을 가진 사람에게 배워본 적은 없지만 다양한 일의 현장을 경험한 나도 '일은 글로 가르칠 수 없다'는 진리는 잘 이해하고 있다. 예를 들어보면 이렇다. 콜드콜 이메일을 쓴다던지, 클라이언트나 고객과의 회의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말한 것인지, 회사에서 사용하는 문서를 어떤 언어로 채워 넣을 것인지 등 실무자로서 맏딱뜨리게 되는 과업들이 있다. 이런 일들은 전공책에서 외워서 시험 보던 '보편적인 지식'이 아니라 각각의 사회적 상황이나 맥락에 맞게 알고 있는 것을 적절히 적용하는 동시에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의 입장이나 감정까지 이해하고자 노력하면서 진행해야 한다. 


아주 긴 매뉴얼을 써서 건넨다고 해도 그 긴 내용을 모두 외워 기억하는 것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좌뇌로 이해했다고 해도 체화해서 실제 사회적 상황에서 사용하는 차원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메일 잘 쓰는 법'이라는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외우는 것보다, 차라리 이메일을 써보고 미리 써본 사람에게 물어보며 몸으로 살으로 배우는 것이 훨씬 빠르다. 


사실 '도제식 교육'이란 텍스트의 형태로 전해지기 어려운 맥락 의존적이고 사회적인 지식, 암묵지, 실천지(knowing-how)를 전달하는 대다수의 교육 영역에서 사용돼 왔던 훈련 방법이다. 대학원에서 지도교수님을 선택하는 일이 그렇게도 중요한 이유는, 말하자면 '사수를 내가 직접 선택해 평생 함께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만약 사수나 지도교수가 전수해야 할 실천지의 기반이 되는 사회적 상황이 송두리째 바뀌고 있는 상황이라면 어떨까? 예를 들어 큰 변화를 겪고 있는 미디어와 콘텐츠 분야의 경우, 지금 가장 뛰어난 기자에게 훈련을 받는다고 해서 앞으로 바뀌어갈 뉴미디어 지형에 적용할 수 있는 실천지를 얻을 수 있을까? 한국의 언론사에 입사해 구독 모델, 콘텐츠 비즈니스, 콘텐츠 마케팅, 이메일 마케팅 등에 대해 배울 수 있을까? 


감히 이런 생각을 해본다. 한 명의 사수에게 실천지를 전수받는 식의 도제식 교육의 유통기한은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첫째는 어떤 전문 영역이든 연관 영역에 대한 기초 지식이 있어야 비로소 회사라는 곳에서 빛을 발할 수 있기 때문이고, 둘째는 시스템 수준의 변화가 일어날 때는 그 누구도 체계적, 보편적 지식의 권위를 주장하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수는 멘토가 아니라 코치가 되어야 한다. 상대가 맞닥뜨리는 문제가 내가 씨름했던 것과 종류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주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자원을 활용할 것인지를 깊게 고민하고 실행할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모자이크다


'한 명의 사수에게 실천지를 전수받는다'는 모델을 폐기하고 나면, 사수가 없었기에 다소 억울한 듯한 마음도 사그라들게 된다. 내가 통과해온 일의 현장들에서 보고 배웠던 동료들 모두가 나의 사수이기 때문이다. '일을 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읽어온 책과 콘텐츠도 모두 내 선생님이다. 무엇보다 새로운 상황을 맞이해 용기 내어 점을 찍고 필요할 때는 절망하는 마음을 이겨내고 나아갔던 나 자신이 내 사수다. 


예를 들어 내가 지금 회사에서 맡고 있는 일에 대해 조금 이야기해볼까 한다. 아직 일을 시작한 지 1주밖에 되지 않았지만, '회사 내에 콘텐츠와 관련된 모든 일' 정도로 보면 된다. 6년의 업력을 가진 30명이 넘는 직원이 다니는 스타트업이지만 기본적으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코칭하는 인력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콘텐츠를 기획하고, 만들고, 알리는데 특화된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되돌아보면 나는 콘텐츠와 관련된 다양한 일들을 경험했고, 그중에 많은 부분은 직접 주도하고 만들어냈다. 대학원에서는 영어로 논문을 쓰고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가르쳤다. 토론 강사로 일하면서는 초중고등학생은 물론 일반인과 선생님, 공무원, 새터민 등을 대상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강의를 기획하거나 퍼실리테이터로 참여하기도 했고, 새로운 과목을 개설하기 위해 자료 조사를 하기도 했다. 경험이 많지는 않지만 대회나 행사를 운영하는데 참여하기도 했었고, 그 종류의 일이 어떤 호흡과 정동을 수반하는지 알 정도의 경력은 있다. 영상 강의를 찍은 적도 있고, 줌으로 진행하는 새로운 수업을 기획해 진행한 적도 있다. 짧게 일했던 스타트업에서는 에디터로 일하며 콘텐츠를 기획, 작성, 편집했으며 관련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해 반영했다. 이메일 캠페인을 기획하고 실행하기도 했다. 기획자로 직무를 바꾼 후에는 프로젝트와 콘텐츠를 기획했고, 직접 브랜드 스토리를 쓰고 디자이너 분과 협업해 캐릭터 일러스트를 뽑기도 했다. 


점을 여기저기에 찍어두다 보니, 다양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마치 밤하늘에 흩뿌려진 별을 보며 어떻게 연결해 별자리의 이야기를 써 내려갈지 고민하는 작가처럼, 나는 콘텐츠 관련 경력을 연결해 기획직, 연구직, 콘텐츠 생산직(에디터), 마케터, 운영직 등에서 과업을 수행할 수 있다. 무엇보다 사내에 콘텐츠 역량을 가진 다른 팀원들과 협업해 '콘텐츠와 관련된 모든 일'을 주도하거나 보조한다는 지금 역할에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잘 맞는 프로필을 가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나는 계속 찢어서 이어 붙일 수 있는 일종의 모자이크이고, 지금도 계속 점을 찍고 연결점을 찾아나가고 있는 새로운 별자리다. 한 개의 점을 찍게 해 준 사람, 두 개의 점을 연결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게 해 준 동료 등 내가 거쳐온 모든 단계가 나의 사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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