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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흑백의 시대,
얼굴이 사라지고 있다.

우리 편 아니면 적이라는 말이 만들어낸 비극

by 한자루
서로 사랑으로 참아 주고, 성령이 주시는 평화를 통해 서로 하나가 되도록 힘쓰십시오.
에베소서 4:2–3




요즘 한국 사회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온 나라가 화약 냄새를 잔뜩 머금은 방 안에 함께 앉아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누가 작은 불씨 하나만 던지면 모든 것이 순식간에 타들어갈 것 같습니다.

서로를 향한 말투가 점점 거칠어지고,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보며 “저 사람들은 아예 없어져야 한다.”고 말하는 대화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정치가 극단으로 가는 것 같다고 하지만, 가끔 이게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마음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이유는 사람을 부르는 호칭에서도 잘나타납니다.

“보수꼴통”, “한남충”, “김치녀”, “틀딱”, “이대남”, “이대녀”...
사람의 얼굴을 가리는 라벨들이 마치 어두운 방 안에 나부끼는 검은 천처럼 여기저기 걸려 있습니다.
라벨을 달면 사람은 놀랍도록 단순해지고 그 단순함은 한 사람의 긴 삶을 너무 쉽게 지워 버립니다.

이렇게 사람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시기에는 극단의 속삭임이 더 또렷하게 들립니다.
극단은 언제나 조용한 틈새로 스며듭니다.

“세상은 우리와 저들로 나뉜다.”
“너는 공격받고 있다.”
“분노는 필요하다.”
“비슷한 사람들 안에 있어야 안전하다.”

이 속삭임은 처음에는 낯설어도, 어느 순간 위로처럼 들립니다.
복잡했던 생각들이 간단해지고 어려웠던 문제들이 한 줄의 문장으로 설명될 때 사람은 안심하게 됩니다.

안심은 때로 위험보다 더 위험한 것이기도 합니다.

어느 날 사람의 마음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일을 멈추고, 그 사람의 삶을 헤아리는 일도 멈추며 이미 알고 있는 라벨을 먼저 떠올립니다.
낯선 얼굴은 위협이 되고 익숙한 말만 위로가 됩니다.
그 사이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는 조용히 깊어집니다.


신앙은 이 간격 앞에서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요?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생각을 강하게 주장할 때 예수께서 성전에서 상을 뒤엎으셨던 사건을 예로 들며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하려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이 예수님의 그 분노가 사람에게 향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무너져야 할 구조와 고쳐져야 할 탐욕이 예수님의 분노의 대상있었지, 사람의 존엄이 짓밟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 분노는 예수님의 분노와는 다른 결을 가집니다.
그리고 사람을 잊게 만드는 말은 신앙의 언어와는 닮지 않았습니다.

라벨로 뒤덮인 한국 사회의 풍경 속에서 신앙이 다시 붙잡도록 부름 받는 것은 아마도 사람의 얼굴을 다시 기억하는 일일 것입니다.


라벨보다 먼저 떠오르는 얼굴, 분노보다 먼저 들리는 삶의 숨결, 두려움보다 먼저 건네는 한 사람의 사연.

사람을 잊지 않는 이 작은 기억 하나가 극단으로 기우는 마음을 붙들어 줍니다.

사람을 빠르게 판단하도록 이끄는 말들 속에서 신앙은 천천히 들리는 작은 속삭임을 기억하게 합니다.

“너희는 서로를 나의 형상으로 보아라.”
“사람은 한마디로 줄일 수 없는 존재다.”
“한 사람의 삶은 그가 품은 상처와 사랑을 모두 함께 가진다.”

이 오래된 진실들이 극단의 언어 사이로 실처럼 흘러 들어와 사람을 향한 감각을 지켜 줍니다.

갈등의 시대라 불리는 지금, 신앙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창한 행동이 아니라 마음의 작은 빛을 지키는 일일지 모릅니다.
어두운 방 안에서 촛불 하나가 주변의 얼굴을 밝혀 주듯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다시 바라보는 그 시선이 사회 전체가 흔들리는 순간에도 희미하게 길을 보여 줍니다.

그 길은 빠르지 않지만 사람을 잃지 않는 길입니다.
사람을 잃지 않을 때, 신앙도 제 빛을 잃지 않습니다.


최근에 극단주의에 가까운 신앙적 언어를 듣고 깊이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유튜브의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라가 공산화되기 직전입니다. 이런 때에는 목숨도 내놓아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거룩한 폭력도 허락될 수 있습니다.”

그 순간 마음속에서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을 미워하고 희생시킬 만큼 위태로운 분이신가.”

비슷한 말을 실제 행동으로 옮긴 사례는 생각보다 많습니다.

2022년 말, 미국 캔자스주에서 한 남성이 어린이 도서관에 난입해 도서관 직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려다 제압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의 논리는 단순했습니다.
“이 책들이 아이들의 영혼을 파괴한다. 나라도 막아야 한다.”

그는 자신이 ‘악을 막는 일을 하고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책이 아니라 사람을 공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끝내 보지 못했습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2023년 초, 한 지역의 시청 앞에서 열린 집회에서 참가자 몇 명이 청사 안으로 난입하려다 경찰과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라가 무너지는 걸 막아야 해서요. 이 정도 행동은 정당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자신의 행동을 옹호할 때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무너지고 있던 것은 나라가 아니라, 사람을 향한 배려와 존중이었습니다.


극단주의가 무섭다는 것은 그들이 “악해서”가 아니라 너무 강력한 정당성을 갖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어떤 신념은 애초에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보다 커지고, 사람보다 앞서기 시작하면 그 신념은 결국 사람을 잃게 만드는 칼이 됩니다.

몇 해 전 한국의 한 중형 교회에서는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교회 내 정치적 이슈를 두고 의견이 갈리자, 성도 한 명이 교회 게시판에 상대 진영의 이름을 적으며 “배교자 명단”이라는 제목을 붙여 게시한 것입니다.
누군가 이 명단을 게시한 그 순간, 성도는 더 이상 성도가 아니었고 단지 ‘분류된 존재’가 되었습니다.

신앙 공동체 안에서조차 사람이 사라지고 라벨만 남는 광경은 극단주의가 어떤 방식으로 신앙을 무너뜨리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예입니다.

극단주의는 이 시선을 가장 먼저 무너뜨립니다. 조금씩 사람을 라벨로 보기 시작합니다.

저 사람은 ‘좌파’, 저 사람은 ‘수구꼴통’, 저 사람은 ‘개혁주의 이단’, 저 사람은 ‘진보 기독교’ 이렇게 라벨이 붙는 순간,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살아온 이야기, 상처, 두려움, 삶의 비밀들은 모두 사라지고 하나의 단어만 남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예수님이 성전에서 상을 엎으신 사건은 ‘의로운 분노’였습니다.

그 장면은 폭력을 정당화하는 본문이 아니라, 폭력을 한없이 조심하게 만드는 본문이라는 사실을 다시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때리지 않으셨습니다. 돈과 제도를 뒤엎으셨지, 사람의 생명을 건드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 바로 이웃한 문맥에는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라는 명령이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의 급진성은 분노의 끝까지가 아니라 사랑의 끝까지 나아가는 급진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급진성도 사람을 밀어내는 방향이 아니라 사람을 끌어안는 방향이어야 합니다.


극단주의적 사고는 언제나 세상을 둘로 나누는 곳에서 시작됩니다.
흑과 백, 선과 악, 우리와 저들.
이 단순한 이분법은 생각보다 달콤해서, 사람의 복잡한 얼굴을 바라보는 일보다 훨씬 쉽고 편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이분법의 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제자들을 거절했을 때, 제자들은 “저들을 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물었지만 예수님은 그 흑백의 경계를 조용히 걷어내셨습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신 장면도 ‘선한 편’과 ‘악한 편’이라는 틀로는 설명되지 않는 풍경이었습니다.

극단주의는 이렇게 예수께서 열어 두신 회색의 세계를 지워 버립니다.
극단주의자들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심어 주고, 마치 세상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말하며, 누군가가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고 속삭입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 위에 혐오를 얹고, 경멸을 덧붙여서 사람을 하나의 상징으로 축소합니다.
그 다음에는 절차와 대화와 시간을 건너뛰라고 재촉합니다.
서두르라고, 기다리지 말라고, 때로는 폭력까지도 ‘정당한 일’이라고 포장합니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이면 이 흐름은 더 빠르게 굳어집니다.
서로의 과격함을 당연하게 만들고 조금씩 한계가 사라져 밖에서 볼 때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말과 행동들까지 마치 신앙의 열심인 것처럼 착각하게 합니다.
극단주의는 이렇게 마음 깊은 곳에서 현실을 단순하게 만들고, 사람을 잊게 하고, 하나님의 형상이 지닌 복잡한 아름다움을 흐려 놓습니다.


서로를 적으로 바라보는 요즘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질문을 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지금 사람을 살리는 방식으로 신앙을 사용하고 있는가, 아니면 사람을 버리는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는가?”

극단주의는 흔히 정치와 이념의 문제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것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더 깊이 들어가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을 미워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이유로 그분의 형상을 만들어진 인간을 파괴할 수는 없습니다.

너무 쉽게 극단으로 흐르는 요즘 사회에서도 희망이 없지는 않습니다.

사람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길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 길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아주 작은 말투 하나, 다른 사람을 향한 시선 하나, 서로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태도 하나에서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작은 길을 지켜낼 수 있다면 한국 사회가 아무리 흔들려도 신앙은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분노의 속도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속도로 세상을 바꾸는 길, 그 길 위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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