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우상에 흔들리는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다시 부르실 때

by 한자루


여러분은 이 세상의 풍조를 따르지 마십시오.
오히려 마음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이 변하게 되십시오.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인지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로마서 12장 2절


해가 질 무렵이면 도시의 소음은 조금씩 수그러들고, 사람들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집니다.
그때 문득, 하루 동안 붙들고 살았던 것들이 손 안에서 조금씩 힘을 잃고 흩어지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아침에는 분명 중요해 보였던 것들이 저녁이 되면 이유 없이 초라해 보이기도 하고, 누구의 말 한마디가 마음에 깊게 꽂혀 생각보다 오래 머물기도 합니다.

하루의 끝은 종종 우리가 사랑해 온 것들의 본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가까운 곳에서 아주 잔잔한 목소리로 하루 동안 우리가 무엇을 사랑했는지 묻고 계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만의 사막을 지나게 됩니다.
삶이 마르는 듯한 계절,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는 것이 없는 하루하루, 숨 쉬는 일조차 고단했던 순간들.

그때 우리를 붙들어 주었던 것이 있습니다.
부족한 형편 속에서 몇 푼의 돈이, 흩어질 듯한 마음을 붙들어 주던 누군가의 한마디 말이, 아니면 격렬하게 자신을 증명하고 싶던 욕망이 어떤 형식으로든 생명줄이 되어 주었습니다.

사막에서 물병 하나는 생명이고 목숨이며 전부입니다.
누군가 그 물병을 건드리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두 팔로 감싸 쥐게 됩니다.

그러나 사막을 벗어난 뒤에도 그 물병을 전부인 것처럼 붙들고 있다면 그것은 생명을 지키는 행동이 아니라 이미지를 지키려는 마음일지 모릅니다.

우리가 우상을 갖게 되는 과정은 늘 그렇게 조용하고 자연스럽습니다.
살기 위해 붙들었던 것이 어느 순간 살아가는 ‘이유’가 되어 버릴 때, 필요가 집착으로 뒤바뀌고 집착이 신뢰로 굳어질 때 우상은 마음 깊은 곳에서 형체를 갖습니다.


누구에게나 내려놓기 두려운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걷지만 가방 속 깊은 곳이나 잠들기 전 베개 옆 어딘가에 자신만의 제단을 하나씩 숨겨두고 살아갑니다.

그 제단 앞에서 우리는 누군가에게 말하지 못할 기도를 드립니다.

“이것만 잃지 않게 해 주세요.”
“이것만 있다면 저는 괜찮습니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하나님보다 먼저 ‘괜찮음’을 약속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우상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돈이든, 성취의 자격증이든, 누구의 사랑이든, 심지어 ‘선한 일’이라는 이름을 가진 도구일지라도 하나님보다 앞서 “너를 지켜 주겠다.”라고 속삭이는 것이 있다면 그 목소리는 우리 영혼을 천천히 잠식합니다.


고대의 사람들은 황소 위에 올라탄 바알의 형상을 보며 풍요를 꿈꿨습니다.
풍요는 곧 생존이었고, 생존은 신의 관심과 사랑에 달려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바알에게 마음을 기울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바알은 없지만 바알이 주었던 약속은 여전히 우리 앞을 지납니다.

조금 더 화려한 직업, 조금 더 많은 재산, 조금 더 돋보이는 이미지, 조금 더 인정받는 목표들.

우리도 그 이미지 앞에서 당연하다는 듯 마음을 기울입니다.
이미지는 우리 삶을 더 나아지게 만들 것처럼 말하고, 세상은 끝없이 그 이미지를 반복하며 우리의 시선을 한 곳으로 모읍니다.

그러나 이미지가 약속하는 행복은 실체보다도 더 빠르게 빛이 바래는 법입니다.

무엇이든 붙들수록 더 불안해지고, 가질수록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 우상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조용히 질문을 건네십니다.

“정말 그것이 너를 살게 하느냐?”


이 질문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마음이 잘못 기대고 있는 방식을 부드럽게 바로 세워 주려는 하나님의 깊은 배려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던 날을 떠올려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성전만은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믿어 왔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니 예루살렘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전은 무너졌고, 그날, 그들의 세계도 함께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그 무너짐 속에서 그들은 처음으로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전보다 크신 분이라는 사실과 건물이 아니라 삶 전체에 임재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상이 무너지는 순간은 항상 아프지만 그 순간에야 비로소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하는 법입니다.

우리가 붙들고 지켜 온 것들이 부서질 때 하나님은 멀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가까워지고 계십니다.
우상 앞에서 무너지는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다시 세워지는 마음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다른 방식의 성전을 짓습니다.

계좌의 숫자와 이력서의 줄 수, 그리고 때로는 SNS의 반응들이 성전의 벽처럼 우리를 둘러싸며 말합니다.
“이 정도면 괜찮다. 너는 이만큼 살아낸 사람이다.”

사람들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하지만 그 기준은 늘 변하고, 그 기준에 자신을 맞추며 사는 마음은 언제나 피로합니다.

로마서가 말하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세상이 만들어 놓은 틀에 무비판적으로 맞춰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 틀은 너무 자연스러워서 마치 공기처럼 스며들고,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의 신이 되어 버린 줄도 모릅니다.

행복하려면 이 정도 집은 있어야 한다고, 몸무게는 이 정도를 유지해야 한다고, 취미도 이 정도는 누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기준들은 행복을 열어 주는 문이 아니라 불안이 드나드는 틈이 되기도 합니다.

우상은 황금빛 조각상으로만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집단적 압박 속에서 더 빠르게 자랍니다.

모두가 그 기준에 길들여지는 동안, 뒤처지면 곧바로 불행해진 사람처럼 느끼게 됩니다.
나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겼는데, 누군가가 내 삶을 대신 평가하는 말 한마디가 어느새 내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우상에 길들여지는 방식은 생각보다 단순합니다.
계속 듣다 보면, 그 말이 진실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우상 비판 정신은 세상을 거부하는 태도가 아니라 세상의 말 앞에서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정말 그런가? 정말 그것이 나를 살게 하는가? 정말 그 기준을 따라가야 하나?

이 질문을 멈추지 않는 사람은 더 이상 우상 앞에 무릎 꿇지 않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은 아주 깊고 고요한 방식으로 말씀하십니다.

“너의 가치는 내가 정한 것이다.”

이 한 문장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순간 우상은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습니다.


우상은 사람이 많은 곳에서만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조용한 방 안에서도, 누워 있는 침대에서도, 카페의 작은 테이블 위에서도 우상은 언제든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떠오릅니다.

휴지 한 장을 필요 이상으로 무심히 뽑을 때, 왜인지 모르게 남의 행복이 더 커 보일 때, 살 필요 없는 물건을 충동적으로 사려 할 때, 마음이 이유 없이 쪼그라드는 밤을 마주할 때...

그 순간 모두가 우상이 우리에게 말을 걸 수 있는 틈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그 틈에 들어오셔서 어둠처럼 내려앉은 마음을 조용히 만지십니다.

“너, 지금 무엇을 붙들고 있니?”
“그것이 정말 너를 지켜 주고 있니?”


이 질문을 들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마음을 다시 바라보게 됩니다.

우상은 항상 더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더 큰 성공, 더 빠른 속도, 더 강한 이미지.
그러나 하나님은 더 많이 요구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미 주신 것 속에 담긴 은혜를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상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쉬게 하십니다.
쉼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우상에게서 멀어지는 길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요란해도 하나님의 음성은 언제나 작은 숨처럼 들립니다.

“너는 이미 내 사랑 안에서 충분하다.”

사람이 이 문장을 마음 깊이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상은 힘을 잃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무너져야 하는 것은 우상이 아니라, 우상이 약속하던 거짓된 안전감입니다.

우상에서 돌아선다는 것은 세상을 거절하는 일이 아닙니다.

세상을 등지고 금욕적인 삶을 살아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만든 세상을 하나님의 눈으로 다시 바라보게 되는 일입니다.

그 눈을 가진 사람은 더 이상 불필요하게 움켜쥐지 않습니다.
사막의 물병을 조용히 내려놓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새로운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갑니다.

때로는 광야가 다시 찾아와도 이제는 물병만을 붙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이 이미 그 마음에 뿌리내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상이 무너지는 자리는 항상 조용합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하나님의 숨결이 스며들 때 사람은 처음으로 자유를 경험합니다.

그 자유는 무엇을 더 가지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의 사랑 안에 놓여 있는지 끝까지 잊지 않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애써 쌓아 올린 모든 이미지 대신 한 가지 진실을 다시 들려주십니다.

“너는 내 안에서 이미 온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