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 대전이 바꿔놓은 예술 지도

뉴욕으로 간 파리의 예술가들

by 그림좋문가 김책장

20세기 초 파리는 단연 세계 예술의 수도였습니다. 입체주의, 초현실주의, 야수주의 등 혁신적인 미술 운동이 이곳에서 태어났고, 피카소와 마티스를 비롯한 수많은 작가들이 몽마르트와 몽파르나스에 모여 새로운 예술을 실험했습니다.


1907년, 피카소는 [아비뇽의 처녀들, 1907]을 통해 고전적 누드의 질서를 파괴하고, 기하학적 형태로 여성의 신체를 재구성함으로써 입체주의의 서막을 알렸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앙리 마티스는 [붉은 방]을 통해 색채를 독립적인 구성 요소로 전면화했습니다. 이 작품은 실내 장면을 배경과 사물의 경계를 흐리는 붉은색 하나로 통일하며, 형태보다 색이 주도하는 회화라는 야수주의의 핵심을 보여주었습니다.


한 편, 살바도르 달리는 [기억의 지속]에서 일그러진 시계를 통해 무의식의 시간을 시각화하며 초현실주의의 기수로 떠올랐습니다.


이렇듯 당시의 파리는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 예술의 언어가 재창조되는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이 찬란한 세계 예술의 수도는 1939년, 전쟁의 포성과 함께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퇴폐 예술가들의 대이동

2차 세계 대전은 단지 유럽의 지형을 바꾼 것이 아니라, 예술의 지도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습니다. 나치 독일은 현대미술을 "퇴폐 예술(Entartete Kunst)"로 규정하며, 표현주의, 입체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등 당시 가장 실험적인 미술 흐름들을 탄압했습니다. 이에 따라 유대계 예술가들, 좌파 지식인들, 그리고 전위 예술(아방가르드)*을 추구하던 수많은 예술가들이 생존을 위해 유럽을 떠나 미국으로 탈출했습니다.


특히, 파리는 피카소, 마티스, 모딜리아니, 샤갈, 레제, 브르통, 몬드리안 등 수많은 작가들의 실험장이었고, 예술 사조 간의 충돌과 융합이 이루어진 세계 예술의 수도였지만,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되면서 이들 중 많은 예술가들이 파리를 떠나야 했습니다.


샤갈은 프랑스 시민권이 있음에도 추방 명령을 받고 독일군에게 체포될 위기에 처했다가, 미국 정부와 바레 당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마르세유를 통해 뉴욕으로 탈출했습니다. 피에트 몬드리안 역시 전쟁 직전까지 파리에서 활동하며 신조형주의를 이끌었지만, 전운이 고조되자 런던을 거쳐 뉴욕에 정착했고, 이 도시의 격자 구조와 재즈의 리듬에 영감을 받아 [브로드웨이 부기우기]를 완성합니다.


몬드리안 / 브로드웨이 부기우기 (Broadway Boogie Woogie /1942–43 / MoMA


초현실주의 운동의 지도자였던 앙드레 브르통, 그리고 독일 출신이지만 파리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활동하던 막스 에른스트 역시 파리를 떠나 미국으로 향했습니다. 에른스트는 뉴욕에서 페기 구겐하임과의 인연으로 전시회를 열었고, 미국 미술계에 초현실주의의 기법과 상상력을 직접적으로 전파하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막스 에른스트 / 반(反) 교황 (The Antipope) / 1941-1942 / 구겐하임 뮤지엄


이처럼 파리를 떠나 뉴욕으로 이주한 예술가들은 단지 생존을 위한 피난민이 아니라, 한 시대를 마감하고 다른 시대를 여는 미술사적 전령이었습니다. 그들의 존재는 뉴욕이라는 새로운 도시를 문화적으로 자극했고, 뒤이어 등장할 미국 작가들에게 유럽 전위 예술의 정신을 심어주는 매개체가 되었습니다.


예술가들의 이주는 곧 예술 중심의 이주였습니다. 파리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20세기 초의 전위 예술은, 전쟁이라는 거대한 격변 속에서 뉴욕으로 옮겨갔고, 그곳에서 다시 살아 숨 쉬기 시작했습니다.


*전위 예술 (Avant-garde)
예술, 문화, 사회에서 기존의 질서나 관습에 반항하며 새로운 시도나 실험을 추구하는 경향주로 급진적이고 혁신적인 예술 운동을 지칭하며, 전통적인 예술 형식이나 규범에서 벗어나 새로운 표현 방식을 탐구하는 특징을 보입니다.




유럽의 전위를 이은 뉴욕의 실험, 추상표현주의의 탄생

전후 뉴욕에서 등장한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는 유럽에서 건너온 전위 예술의 정신과 미국 작가들의 실험적 시도가 충돌하며 탄생한 완전히 새로운 미술 언어였습니다. 유럽 화가들이 대거 이주해 온 1940년대 초 뉴욕은 거대한 미술적 실험실이 되었습니다.


이곳에는 마르셀 뒤샹, 피에트 몬드리안, 막스 에른스트, 이브 탕기 등 유럽 전위 예술을 이끈 작가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이들과 교류하며 영향을 받은 미국의 젊은 화가들은 점차 새로운 회화 양식을 탐색하기 시작합니다.


초현실주의로부터 무의식과 자동기술 같은 정신적 자극을 얻은 이들은, 동시에 구성주의의 형식 실험, 다다이즘의 급진적 태도, 그리고 미국 내에서 자라난 대형 캔버스와 신체 중심 회화의 전통을 결합해 독자적인 언어를 만들어갔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유럽 미술을 계승하는 데 그치지 않고, 유럽의 전위를 기반 삼되 그것을 뛰어넘는 새로운 회화의 가능성을 뉴욕에서 열고자 했습니다.


한스 호프만은 그 연결의 다리 역할을 했습니다. 파리와 뮌헨에서 유럽 전위 예술의 영향을 받은 그는 뉴욕에서 미술 교육자로 활동하며 수많은 미국 작가들에게 색채의 구성 원리와 회화의 평면성을 가르쳤습니다.


잭슨 폴록은 이러한 전위적 교육과 초현실주의 오토마티슴*(자동기술)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만의 드리핑 기법을 확립합니다. 그는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붓을 사용하지 않고 물감을 흘리거나 튀기며 화면을 채워나갔습니다. 대표작 [넘버 1 라벤더 미스트]는 이러한 방식의 절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작가의 신체와 행위가 그림 속에 그대로 기록되는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의 대표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잭슨 폴록 / 넘버 1 라벤더 미스트 (Number 1 Lavender Mist) / 1950 /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반면, 윌렘 드 쿠닝은 보다 강렬하고 육체적인 붓질로 [여인 I]을 완성합니다. 그는 전통적인 여성 누드의 형식을 파괴하면서도, 여전히 인물의 형상을 유지하려 했고, 이는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특한 긴장감을 만들어냅니다. 드 쿠닝의 회화는 미국적 야성, 도시적 감각, 심리적 불안정성을 동시에 담아냈습니다.

윌렘 드 쿠닝 / 여인 Ⅰ( Woman I) / 1950–52 / MoMA


이러한 역동성과 신체성의 흐름과는 다른 방향에서, 마크 로스코는 추상표현주의의 또 다른 극을 형성합니다. 라트비아 태생으로 유년 시절 미국으로 이주한 로스코는 유럽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흡수하면서도 점차 정신성과 침묵, 감정의 밀도를 강조한 색면 회화(Color Field Painting)로 나아갑니다.


그의 작품들은 단순한 색의 층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관람자를 화면 앞에 멈춰 세우고 명상적 몰입을 유도합니다. 그는 “추상은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비극, 황홀, 운명이라는 인간의 근본 감정에 관한 것”이라 말하며, 회화를 일종의 정신적 공간으로 확장했습니다.


마크 로스코의 작품들 (출처 : Britannica)


이들의 회화는 기존 유럽 미술이 강조했던 신화, 서사, 상징을 거부하고, 화면 그 자체를 주체로 삼았습니다. 이들은 그림이 현실을 재현하는 창이 아니라, 감정과 존재를 표출하는 자율적 장(field)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회화의 전면성**’은 미국 회화를 한 단계 도약시키는 결정적 개념이 됩니다.


*오토마티슴(Automatisme)
이성이나 의식에 지배되지 않고 무의식 가운데에 화필을 자유롭게 움직여서 그림을 그리는 방법

**회화의 전면성 (All-over painting)
화면의 중심이나 구도 설정 없이 전체를 균질하게 표현하는 회화 기법




예술의 수도, 파리에서 뉴욕으로

1945년 이후, 예술의 중심지는 더 이상 파리가 아니었습니다. 파리는 여전히 수많은 예술적 유산과 전통을 지닌 도시였지만, 실험과 대담함, 철학적 모험은 더 이상 이곳에서 자라나지 않았습니다.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옮겨온 작가들과 그들에게서 자극을 받은 새로운 세대의 미국 작가들은 뉴욕이라는 도시 안에서 미술사의 중심축을 완전히 뒤바꾸는 흐름을 만들어 냅니다.


이 변화의 배경에는 미국의 강력한 제도적 기반이 있었습니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은 전쟁 중에도 ‘퇴폐 예술’을 구입하고 전시하는 등 전위 예술의 안전지대 역할을 자처했고, 전후에는 적극적으로 미국 작가들을 소개하며 ‘미국 미술의 시대’를 선언했습니다. 휘트니 미술관은 미국 현대미술만을 전문적으로 수집한 최초의 기관으로, 지역 작가들의 성장을 실질적으로 지원했고, 구겐하임 미술관은 칸딘스키와 모홀리너지 같은 유럽의 전위 작가들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전시하며, 당시 뉴욕에서는 낯설게 여겨지던 실험적인 예술 방식에 설득력과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이 시기 미술 시장도 눈에 띄게 재편됩니다. 뉴욕에는 갤러리, 수집가, 컬렉터, 재단, 비평지, 교육기관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새로운 미술 생태계가 조성되었고, 이는 파리의 개인 아틀리에 중심 미술 구조와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습니다. 미국은 예술을 ‘개인의 천재성’에만 의존하지 않고, 제도와 자본이 조율하는 하나의 산업이자 문화 전략으로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곧 예술가의 정체성에도 변화를 가져옵니다. 파리의 화가들이 ‘고독한 낭만주의적 천재’였다면, 뉴욕의 예술가들은 ‘이론과 시스템 속의 실험자’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같은 구조적 토대 위에서 헬렌 프랑켄탈러는 스테인 기법을 선보이며 색의 물성을 해방했고, 로버트 라우센버그는 회화와 조각, 오브제를 결합한 콤바인 페인팅으로 팝아트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이후 앤디 워홀은 [마릴린 딥티크]를 통해 대중문화와 소비 이미지의 반복을 예술로 전환시켰습니다. 이 모든 흐름은 뉴욕이라는 도시를 단지 미술 중심지가 아니라, 예술의 패러다임을 정의하는 새로운 예술 권력의 장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앤디 워홀 / 마릴린 딥티크 (Marilyn Diptych) / 1962 / 테이트 모던


결국, 2차 세계 대전은 예술계에도 커다란 전환점이었습니다. 파리는 여전히 위대한 예술의 기억을 품고 있지만, 그 중심은 전쟁을 기점으로 대서양을 건너 뉴욕으로 옮겨졌습니다. 유럽의 전위가 뿌리내린 뉴욕에서 미국은 자신만의 예술 언어를 만들었고, 그 언어는 이후 세계 미술사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예술의 지구적 중심은, 파리에서 뉴욕으로 옮겨졌습니다.


The End.

Good Bye 말고 See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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