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굵게, 세비야
다른 여행 계획을 세우며 49일의 일정을 다시 한번 복기했다. 볼 건 다 보고, 그래서 그만큼 다녀온 도시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대단한 우리의 여행 체력 덕분에 많은 소도시를 다녀왔을 뿐, 숙소가 있던 큰 거점도시들은 마을을 잘 알 만큼의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세비야는 더 그렇다. 세비야에서의 일정을 떠올려보면, 관광지만 급하게 보고 다닌 말 그대로의 '관광객'이었다. 그것도 짧은 일정으로 멀리 온 관광객.
일정이 유독 타이트했던 건 섣부른 판단이 불러온 것이다. 여행지 선정할 때 봤던 세비야에 대한 정보는 매력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오래 머무를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스페인 전역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것의 집합체 같아서. 세비야는 리스본에서 스페인의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기 위한 중간 거점지였을 뿐이었다.
생각보다 세비야는 매력적인 도시였다. 길거리에서 플라멩코 버스킹도 볼 수 있는 다채로운 도시. 물론 이곳에 할애한 시간이 많지 않아서 이곳을 잘 안다고 할 수 없지만, 그 짧은 1박 2일 일정에 근교지도 다녀오고 이후에 3곳의 관광지를 빠듯하게 다녀오고 느낀 바다. 일정이 너무 짧았다는 생각에 다시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곳이다. WANT를 넘어 MUST다.
1) 현재도 스페인 왕족이 들르는 알카사르
세비야에도 알카사르가 있다. 코르도바에서 도착할 시간까지 고려해 예약까지 했다. 단기여행이 익숙한 과거의 내가 짠 아주 빠듯한 일정. 지금 보면 혀를 내두를 정도. 그래도 여행 체력이 좋은 엄마와 나는 숙소에 잠시 머물렀다가 알카사르로 향했다.
여느 스페인 남부 지방처럼 이슬람의 흔적이 곳곳에 있는 세비야 알카사르는 그라나다 알함브라와 코르도바 메스키타와 유사한 점이 많아 맛보기로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라나다나 코르도바 여행 일정이 있는 많은 여행객은 이곳을 그냥 지나치곤 한다. 그래도 여전히 스페인 왕족이 세비야에 올 때 머무는 곳으로 의미가 있는 곳. 또 다른 곳보다 작다고 해서 짧게 둘러볼 정도도 아니었다.
알카사르 입장 Info.
알카사르는 온라인 예약을 추천한다. 성인은 12.5유로, 학생은 4유로 (2019년 기준). 오디오 가이드도 있으니 관심 있는 사람들은 함께 대여하길 바란다. 현장에서 표를 구매할 경우 1유로 정도 저렴하지만, 엄청난 줄이 있어 들어가기 힘들다. 또한, 월요일에는 무료입장 시간이 정해져 있는데, 이 역시 온라인으로 예매가 가능하며, 예매 수수료 1유로가 든다. 무료입장 시간은 홈페이지에서 미리 참고하고 가자.
"이젠 딱 알겠다. 이슬람인 거."
이미 개성 있는 이슬람의 양식을 보고 왔더니 이제는 신기함 보다는 반가움에 가까웠다. 그래도 평소 에스닉 문양을 좋아해서 그런지 벽면마다 있는 새로운 문양들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
"진짜 정원을 잘해 놓는다."
기독교와 이슬람 양식이 교묘하게 섞인 듯한 궁전의 방들을 지나니 정원이 나왔다. 정원도 구역이 나뉘어 있었는데, 사이사이에 있는 문들이 정원의 미적 포인트로 눈에 띄었다. 빠지지 않는 가운데의 분수대까지. 궁전 내부도 화려한 천장과 타일이 매력 있었지만, 세비야 알카사르는 이 정원이 더 기억에 남는다.
"여기 끝도 없어. 다 못 봐."
"그럼 그냥 여기로 갈까?"
지도를 보며 정원을 걷는데,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문을 넘고 넘을 때마다 계속 나오는 정원에 마치 미로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왜 정원이 이렇게 커야 할까 의문만 가득 생기는 크기. 결국 가던 길에서 방향을 틀어 정원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으로 올라가 구경하는 걸로 만족했다.
"이제 가자."
끝도 없이 나오는 볼거리에 결국 지쳐버린 나는 연신 하품을 했다. 궁전 벽면과 정원의 많은 부분에 자리 잡고 있던 타일에 대한 관심을 놓을 수 없었지만. 예상치 못하게 넓었던 정원을 다니며 강하게 햇빛을 받아 더 금방 지쳤다. 결국 강행군으로 지친 엄마와 나는 알카사르는 가볍게 둘러보고 나왔다.
2) 타일 모자이크가 매력적인 스페인 광장
김태희가 휴대폰 광고를 찍었다는 광장. 어릴 때 일이라 그 광고는 잘 모르지만, 유명하다길래 궁금했다. 중심지에서도 조금 떨어져 있는데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는 건 무슨 이유가 있을 테니까.
"아침에 가자."
이럴 땐 생활패턴이며 여행 성향까지 잘 맞는 우리가 너무 다행이다. 고민할 것도 없이 아침잠이 없는 우린 아침부터 광장에 가보기로 했다.
"여기네."
"예쁘다."
"이게 광장이야?"
나무가 울창하고 나무 벤치가 있고 가운데 공간이 텅 빈, 단순한 쉼터 같은 곳을 생각하며 별 기대 없이 갔는데 스페인 광장은 예상과 다르게 화려함이 가득했다. 광장 가운데에 형성된 작은 운하에 다리까지 이색적이었다.
"우리가 갔다 온 곳도 있어!"
스페인 광장을 가장 돋보이게 만든 타일 모자이크들. 도착했을 때부터 돌아가는 순간까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광장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띄어 보는데, 스페인의 지역명이 눈에 띄었다. 알고 보니 스페인의 각 지역과 그 지역을 대표하는 역사적 장면이 담겨있는 타일. 우리가 다녀온 톨레도, 코르도바, 마드리드, 그리고 앞으로 갈 곳들의 이름들이 보이니 반가웠다. 자세히 보니 눈에 익은 건물들도 있고. 나중에 스페인을 더 알고 이 광장에 돌아오면 재밌을 거 같다.
"우리 이제 가야 된다."
타일을 보며 크게 한 바퀴 돌고 나니 한국에서 미리 예약하고 온 세비야 대성당에 갈 시간. 광장은 가만히 앉아서 분위기를 느끼는 곳이라고 생각해 얼마 안 걸릴 거라고 생각하고 왔는데, 생각보다 많이 촉박했다. 반도 못 본 느낌이었다. 조금 더 머물고 싶은 아쉬운 마음이 가득했다.
"여기에도 이런 게 있네."
"근데 다 똑같은 거 팔아."
유적지 가면 노점상이 많은 건 여기도 마찬가지인가. 광장을 돌아 나가는 길에는 물건이 한가득 진열되어 있는 노점상이 줄지어있었다. 플라멩코가 떠오르는 부채와 작은 양산들부터 도시 마그넷도 있고, 그 외에도 각종 기념품을 볼 수 있었다. 모두가 너무 비슷한 게 걸려있어서 뭐가 다른지는 모르겠지만, 많다.
물건의 질을 믿을 수 없고 시간도 없어서 빠르게 지나가면서 봤지만, 무엇보다 좋았던 건 이 노점상들도 질서 있게 광장 한쪽 구석에 줄 지어 있는 것이었다. 자칫하면 지저분해지고 놀이공원 같아질 수 있는데 덕분에 광장이 잘 정돈된 느낌이었기 때문에.
세비야에 오래 머무는 사람들이 1일 1 스페인 광장을 한다는 이야기를 봤는데, 왠지 이해가 된다. 여행 중 본 광장 중 제일 좋았다. 세비야를 다시 가고 싶은 이유에 스페인 광장이 가장 큰 이유일만큼.
3) 세계에서 3번째로 큰 성당, 세비야 대성당
성당을 계속 봐서 질릴 때가 됐더라도 또 가봐야 할 성당이다. 성당 앞에 '대'자가 붙으면 뭔가 항상 특별하기 때문에. 큰 규모도 큰 규모지만, 이곳은 콜럼버스의 묘가 있는 곳이다.
"여기 일단 서 있어봐. 알아보고 올게."
세비야 대성당을 둘러싼 엄청난 인파. 예약시간은 다가오는데, 안내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대성당 앞에서 한참을 헤맸다.
"엄마 여기래. 우린 그냥 안으로 들어가면 돼."
세비야 대성당 입장 Info.
세비야 대성당은 알카사르처럼 온라인 예약을 추천한다. 성인 9유로, 학생 4유로 (2019년 기준). 세계에서 3번째로 큰 성당인 데다가 콜럼버스 유해가 있는 곳으로,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세비야 대성당은 오프라인 티켓 구매 줄이 어마어마하니 오프라인 구매 시도는 장기 여행객에게만 추천한다. 온라인으로 티켓을 구매했을 경우 밖에 늘어진 줄에 서지 않고 해당 예약 시간에 내부로 들어가면 된다. 내부에 들어갈 때 티켓을 휴대폰으로 확인하니 인터넷 연결이 원활하지 않을 때를 대비해 화면을 미리 캡처해놓는게 좋다.
"하하.... 하하;;"
휴대폰으로 예약을 확인한다고 해 건네주는데 도난 방지로 연결해놓은 탓에 민망한 상황이 생겼다. 의도치 않게 직원과 휴대폰을 들고 도난 방지 줄과 밀당하다 멋쩍어 서로 웃기만 했다. 생각 없이 들고 가던 직원과 질질 끌려가는 가방 때문에 식은땀 빼다 들어갔다.
"진짜 커!"
입장하자 규모에 놀랐다. 층고가 대단히 높았던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 톨레도 대성당을 본 이후로 대부분의 성당이 아담하게 느껴졌는데, 더 큰 세비야 대성당을 보고는 감탄만 나왔다. 길게 쭉 뻗은 측랑과 신랑을 향해 카메라 셔터를 안 누를 수 없었다.
층고가 높으니 기다란 스테인드글라스도 곳곳에 있었다. 규모가 커지니 어떤 내용의 그림인지까지 세세하게 잘 보였다. 화창한 날씨 덕에 밖에서 들어오는 햇빛도 한가득. 스테인드글라스가 유독 더 빛나는 듯했다.
"이거는 공중 부벽이고, 이게 이렇게 T자 형이고....."
성당 내부를 둘러보다가 세비야도 높은 곳에서 경치를 보기 위해 성당의 첨탑인 히랄다 탑 위로 올라왔다. 성당의 윗면 구조가 훤히 다 보이는 게 뭔가 새로웠다.
비교적 큰 도시인 세비야는 또 여느 소도시들보다는 높은 건물들이 있어 다른 풍경 같았다. 전체적으로 이색적이었다. 건물들 앞으로 성당이 함께하니 부조화로운 듯 조화로우면서. 마치 북촌 한옥마을에서 마천루와 한옥을 함께 본 느낌이랄까.
"이거야?"
"응. 콜럼버스래."
"진짜 공중에 떠 있네."
탑에서 내려와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으로 가니 나타난 콜럼버스의 묘. 앞 뒤로 들고 있는 이들은 스페인의 왕들이란다. 대성당에 오기 전 알아본 바로는, 콜럼버스가 죽기 전 스페인 땅을 다시는 두 발로 밟지 않으리라고 단언했던 것을 존중하여 공중에 띄어놓은 것이라고 한다.
비록 스페인과 콜럼버스의 관계의 끝은 좋지 않았기에 콜럼버스는 스페인으로 돌아오는 것을 원치 않았지만, 사후 그를 데리고 돌아와 뜻을 존중하여 이렇게 둔 것이 현재는 스페인이 잘 나가던 대항해시대의 주역인 콜럼버스를 인정해주는 듯했다.
"이거 저기 위에서 빛 내려오는 건가 봐."
방 곳곳에서도 눈에 띄는 예술작품들이 많았지만,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 하나. 동그랗게 뚫려있는 햇빛 들어오는 창과 그 아래에 있는 그 빛을 받고 있는 듯한 그림. 하나는 건축이고 하나는 그림이지만, 처음부터 계획된 듯 배치되어 있는 게 인상 깊은 요소였다.
결과적으로 세비야는 하루하고 반나절 정도 되는 시간에 1시간 거리의 근교지와 볼거리가 많은 3곳을 다녀왔다. 세비야는 1박 2일로 충분하다는 말만 듣고 잡았던 일정인데, 예상과 달리 매우 타이트했다. 대성당, 광장, 알카사르 외에도 분명 거리에는 볼거리가 다양했다.
세비야가 아니더라도 그곳을 잘 알려면 기본적으로 하룻밤 이상은 머물러야 하고, 조금 큰 도시일 경우 2박 이상은 머물러야 여유롭게 머물다 갈 수 있고, 더 기억에 잘 남는다는 걸 알게 된 세비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