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기간이 긴 와중에 많은 곳을 다녀온 만큼 머물러 본 숙소도 한 두 곳이 아니다. 숙소를 예약하면서 느낀 건 지역마다 숙소의 보편화된 수준이란 게 있다. 아무리 숙소가 많아도 8점 중반은커녕 8점 초반대만 가득한 곳도 있고, 반면에 숙소가 별로 없는데도 9점대 이상인 숙소가 가득한 곳이 있다는 말.
대체로 9점 이상의 10만 원 초반대 숙소를 찾아다녔지만, 만약 숙소들이 대체적으로 평점이 낮은 곳이라면 8점 중반까지 고려하고, 심각하게 없을 경우에만 8점 초반에 머물렀다. 10점 만점에 8점이라면 높은 편인 거 같지만, 6-7점은 거의 최악의 숙소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될 만큼이란 걸 고려하면 8점 대도 분명 뭔가 하자는 있을 거란 말이다. 없으면 당연히 좋겠지만.
그렇게 신중에 신중을 기해 예약한 숙소들 사이에서 기억에 남는 숙소가 하나 있다. 47박의 유럽여행 속에서 유일하게 단점을 찾아보기 힘들었던 말라가 숙소. 누군가 말라가에 온다면 추천해주고 싶을 만큼 만족스러워 지금도 말라가 얘기를 할 때면 이 아파트 얘기가 빠지지 않는다. 다른 지역에 대해 얘기할 때면 관광지 이야기를 하다 숙소에서 있었던 에피소드가 나온다면, 말라가에 대해서 얘기할 때면 관광지보다도 먼저 얘기를 할 만큼 이곳에 대한 기억이 좋았다.
세비야 버스터미널
"드디어 왔다."
세비야에서 말라가로 넘어가는 날. 유럽 특유의 돌길과 좁디좁은 인도를 따라 15분 정도 걸어 버스터미널까지 왔다. 돌길에서 캐리어 끌어본 사람들은 알 거다. 그냥 걷는 15분과 캐리어를 일반 인도에서 끌며 걷는 15분, 그리고 돌길 위에서 끄는 15분은 차이가 많다는 것을.
돌길 위에서는 바퀴가 틈 사이로 계속 들어가며 덜덜덜 떨리는 게 팔뚝살까지 떨려오고 턱에 걸리기 때문에 캐리어를 무조건 비스듬히 눕혀 세게 당겨야 하기 때문에 에너지 소모가 많다. 거기다 캐리어 바퀴 파손 위험도 있기 때문에 쉽지 않다.
하지만 국내처럼 시내로 수많은 대중교통이 지나다니는 환경이 아니니 걷는 것만큼 빠른 길은 없다. 결국 캐리어가 무사하길 바라며 걷는 체력이 좋은 우린 캐리어를 끌고 버스터미널로 온 것이다.
그렇게 우린 ALSA 버스를 타고 약 3시간 정도 달린 끝에 말라가에 도착했다. 그리고 바로 트램을 타 숙소로 향했다.
"Hello?"
이번 숙소는 아파트인 만큼 호스트를 만나 키를 받아가야 한다. 거기다 호텔이나 호스텔처럼 직원이 상주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직원과 시간도 잘 맞춰야 한다. 다행히도 우린 미리 연락을 하며 시간을 맞췄기 때문에 숙소에 가자마자 호스트를 만나 열쇠를 받을 수 있었다.
독특한 문고리 위치
"문 손잡이가 가운데에 있어."
"이게 왜 여기 있는 걸까?"
"글쎄 밀기 편한가?"
밀기 편할 리가 없다. 지렛대의 원리를 접목시키면 당연히 문이 열리는 끝부분을 밀어야 되는 거 아닌가. 처음 보는 독특한 문 손잡이 위치에 어리둥절했다. 돌아가지도 않는 단단하게 박힌 손잡이. 숙소를 오가며 몇 번이고 같이 잡고 열어보며 파악해보려 했지만 용도는 알 수 없었다.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아파트 숙소 내부
"오, 여기 너무 괜찮아."
"예뻐!"
커튼을 뚫고 들어오는 햇빛이 은은하니 인스타그램 감성 카페 온 느낌이었다. 식사용 테이블도 있고, 티타임 테이블도 있고, 소파 침대도 있는 거실. 짧게 머무는 것이니 굳이 모두가 없어도 되지만, 10만 원 초반대의 가격으로 이만큼의 깔끔하고 넓은 숙소를 만났다는 게 놀라웠다.
깔끔한 걸 넘어서 모던 심플한 느낌에 싱그러운 청록색 포인트와 회색 톤들로 이루어진 인테리어가 일단 예뻤다. 나중에 돌아와 집 인테리어를 바꿀 때 저 분위기가 좋아, 참고해서 빛이 많이 들어오는 반투명 커튼으로 했을 만큼. 이 공간 자체가 마음에 들었다.
침실 내부
"이쪽이 침실이네."
"잠은 여기서 자고, 생활은 거실에서 하고?"
문 열고 들어가면 침대만 있던 숙소에서 투룸으로 오니 갑자기 비싼 숙소를 온 것 같이 낯설었다. 그냥 정말 사람 사는 집인데 공간이 분리된 것이 어찌나 신기하던지. 깔끔한 침대보도 널찍한 침실 공간도 모두 마음에 들었다.
왼쪽 - 화장실, 오른쪽 - 식기 선반
"화장실도 넓어."
"근데 세면대가 너무 높은데?"
세면대가 보통 높은 게 아니다. 키가 160 중반인 나도 조금 높다고 느낄 만큼의 높이. 주인이 키가 커서였을까, 여행객 모두가 키가 큰 건 아닐 텐데 세면대 높이가 무지 높다. 덕분에 의자 위에 올라가 씻고 있는 엄마의 모습 때문에 씻을 때마다 서로가 즐겁게 웃었다.
"식기류는 써도 되는 건가?"
마치 인테리어 장식품처럼 놓여있는 식기들. 부엌과 화장실 사이의 벽면에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다. 물론 여기까지 와서 굳이 요리를 하진 않을 예정이니 접시가 필요할 일이 없겠지만, 이런 게 가득 준비되어 있다는 게 흥미로웠다.
숙소 내에서 한식
"오늘은 우리가 가져온 것 좀 먹어보자."
한국인이라면 여행 갈 때 꼭 챙긴다는 것들을 우리 역시도 챙겼다. 햇반, 볶음김치, 김, 참치, 고추장 등등 다양하게. 우리만의 개별적인 식사 공간도 있으니 오랜만에 한식을 먹기로 했다. 49일 중 이게 유일한 한식 식사였던 만큼 이것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이 숙소는 장기 여행 중간에 반드시 필요했던 숙소다. 캐리어 하나가 제대로 펼쳐지지 않는 좁은 방, 개인 공간이 없는 호스텔 등 숙소에 머물며 알게 모르게 피곤해진 몸을 마음 편히 내려놓고 쉴 수 있었다. 무엇보다 세탁기가 있어 밀린 빨래를 굳이 손빨래하거나 세탁방까지 가지 않아도 할 수 있다는 것이 장기 여행자인 우리에게 큰 장점이었다.
여느 숙소들과 가격대가 비슷하거나 오히려 저렴한데도 청결도, 시설, 관광지와의 거리 등 빠지는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가성비가 좋다 못해 엄청나게 좋았던 곳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여전히 말라가 하면 화이트톤의 인테리어와 화사하게 들어오는 빛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