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깃거리가 생길 특별한 경험을 좋아했다. 프랑스 남부에서 스위스로 넘어갈 때가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다음 스위스 목적지까지 단번에 기차를 타고 이동하기엔 거리가 애매하고, 그 사이에 갈만한 도시는 끌리는 곳이 없었으니까. 지도를 한참 바라보던 중, 일정이 잡힌 두 도시 사이를 적절하게 이어 줄 곳을 찾았다. 바로, 제네바. 정확히는 제네바에서 가는 샤모니 몽블랑이었다.
샤모니 몽블랑은 프랑스령으로, 제네바에서 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곳이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있으며, 알프스에서 최고봉인 몽블랑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 당일치기이지만 국경을 넘어갔다 온다는 점, 프랑스에 다시 돌아갔다 온다는 점에서,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대륙의 여행이 처음인 나에겐 모두 매력적이었다.
Info. 제네바에서 샤모니 가는 방법
제네바에서 샤모니까지 가는 방법은 기차, 버스 두 가지가 있다. 기차가 버스보다 2배 이상 걸리고, 직행도 없기 때문에 버스를 추천한다. 당시(2019년)에는 easy Bus만 제네바 공항에서부터 운행되었으나, 현재는 SwissTours, BlaBlaCar가 운행 중이다. 공항뿐만 아니라 시내에서도 갈 수 있으며, 시간대마다 적합한 버스가 다르니, 검색 후 미리 예매하고 가기를 바란다. 출발지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약 1시간 정도 걸린다.
몽블랑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 에귀 뒤 미디
에귀 디 미디 케이블카 역
버스를 타고 오며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이미 한차례 마음을 빼앗긴 나는 누구보다도 설레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길도 모르는데 마음만 앞서서 되려 헤매다 찾아왔지만. 케이블카 정류장 앞에 딱 서서 주변을 둘러보니 웅장한 산들이 눈앞에 있는 것이 이미 하얀 눈에 안긴 느낌이었다.
에귀 디 미디
"우와!"
6월 말에 눈이 가득 쌓인 풍경이라니. 날카롭게 깎인 돌산 위를 덮고 있는 눈은 감탄을 자아낼 뿐이었다. 장관에 말을 잃었다. 어떤 말로도 표현을 할 수 없었다. 그저 사방을 가리키며 소리를 지를 뿐. 무언가를 보고 온몸에 전율이 돋기는 처음이었다. 가슴이 울렸고 정신을 그대로 자연에게 놓아주었다. 직접 경험해보지 못하고선 이 느낌을 이해할 수 없다. 멋진 풍경을 보고서 '소름이 돋는다'며 난리 친 적은 있어도 실제로 '전율이 돋는' 감정을 느껴본 건 처음이었기에 그 순간을 아직 잊지 못한다.
영상의 기온이라 전혀 춥지도 않았다. 햇빛을 모두 반사하는 눈의 특성을 생각해서라도 우리가 여행한 이 시기인, 6월이 가장 최적의 여행 시기이지 않을까 싶다. 5월까지만 해도 눈이 꽤 오면서 기온이 낮고, 7월엔 햇빛이 더욱 강해지면서 다니기 힘드니까.
에귀 디 미디 인증샷
3842M. 한라산 백록담보다 약 2배 높이. 2000M가 넘는 산도 없는 한국에서 살던 우리가 이런 높이를 상상이나 해봤을까. 고산병을 느끼며 조심히 걷는 거 조차 즐거웠다. 차오르는 숨도, 머리가 조여 오는 느낌도 두려움도 불편함도 아닌 흥미로운 경험으로 다가왔다.
여담이지만, 고산지대에 다녀오면 가지고 있던 물통, 선크림 등의 액체들이 평지에 돌아와 뚜껑을 열면 내용물이 갑작스레 폭발하듯 나온다. 용기가 고산지대에서 쪼그라들었다가 돌아오면서 발생하는 일이다. 이것처럼 높은 산에 올라가면 뇌의 혈관이 수축하고, 두통을 유발하는 것. 과학적 지식을 두 눈으로 경험하며 얻었다.
액티비티 즐기는 사람들
산 위에서는 패러글라이딩을 하는 사람들, 설산을 등반하는 사람들 등 액티비티를 즐기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패러글라이딩은 혼자서 뛰는 숙련된 사람들이 꽤나 있었다. 파란 하늘을 자유로이 누비는 이들의 모습이 부러웠다. 한걸음 한걸음 열심히 올라오는 등산객들의 체력마저도. 파랗고 하얀 도화지 위에 점 같은 존재로 자연과 어울리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 눈이 즐거웠다.
에귀 디 미디 정상에서
우린 그저 전망대 위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감을 느꼈고, 만족했다. 사실, 지도 없이는 그 봉우리가 그 봉우리라 뭣도 모르고 좋아한 거지만. 여기를 보고 저기를 봐도 그저 눈이 내린 산이니까.다만, 그 풍경이 어떤 변화 없이도 모든 것을 압도할 만큼의 대단한 장관일 뿐.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어도 다른 풍경을 보고 있는 것 마냥 끊임없이 카메라를 들었다. 새로운 자극에 신났다. 난관 앞에만 서면 장난감 본 어린아이처럼.
에귀 디 미디 중간 케이블카 역
산 중턱에서 봉우리들을 볼 수 있는 포인트로 이어지는 케이블카 정류장에서 내렸다. 개인적으로는 이곳에서 가장 큰 울림을 받았는지, 샤모니를 떠올리면 이곳이 생각난다. 설산이 눈앞에 있어 모든 것을 가로막는 듯한 그 모습이. 푸른 바위, 그 위의 눈. 선 하나하나가 선명해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듯했다. 이렇게 나를 압도하는 산이 따뜻한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눈에게 덮여있다는 게 비현실적이어서였을까, 자연을 눈앞에 두고 감정이 울컥 올라왔다. 입가에는 미소를 띠고 있지만 차오르는 감정에 입술이 떨렸고, 코끝이 찡했다. 이런 복합적인 감정이 처음이었다. 점점 고산병 후유증이 나타나는지 기력이 약해지고 있는 엄마와 이 기분을 나눌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빙하 동굴을 볼 수 있는 곳, 메르 드 글라스
메르 드 글라스 기차역
에귀 디 미디에서 내려와 마을 깊숙이 더 들어가면, 빨간색 열차가 서 있는 또 다른 역사가 있다. 이름은 메르 드 글라스. 해가 넘어가기 전, 빙하를 가까이서 보기 위해 발걸음을 또 한 번 재촉했다.
녹지대와 잘 어울리는 빨간 열차를 타고 올라가면 머지않아 정상에 도착한다. 이곳은 에귀 디 미디만큼 높지는 않아 고산지대 걱정할 필요는 없다. 참, 열차의 뷰가 중요하다면 올라갈 때는 좌측, 내려올 때는 우측을 추천한다.
멀리서 본 빙하 동굴
"저기인가?"
절벽 아래 애매하게 생긴 하얀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사람들이 향하고 있는 방향의 끝에 있는 우리의 목적지 같았다. 공사 현장에 포장지로 덮여있는 듯한 외관은, 또 다른 장관을 예상하고 있던 나의 환상을 깨버렸다. 끝이 보이지 않을 듯 이어지는 수많은 계단을 보니 굳이 내려가야 하나 싶었고, 황량한 풍경에 당황스러웠다.
빙하 물
모녀 여행만큼은 계단은 핑계가 되지 않는다. 우린 이날을 위해 계단에서 단련해왔으니까. 여기까지 제 발로 찾아왔으면, 그 끝은 봐야 한다. 호기심을 가득 안고 동굴 앞까지 왔다. 그리곤 영롱한 푸른빛을 띠는 빙하 물을 만났다. 흐르고 있는 물의 색깔마저 신비한 약을 탄 듯, 비현실적인 모습. 손을 담가보니 뼛속까지 시릴 만큼 차가웠다.
빙하 동굴
가방 속 외투를 꺼내 들곤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빙하답게 깨끗하고 투명한 푸른빛을 띠는 동굴은 마치 수족관에 온 느낌을 줬다. 묘하게 전해오는 신비로움에 계속 주변을 둘러봤다.
빙하 동굴 내부
동굴 내부엔 얼음조각들이 곳곳에 있었다. 누가 여기까지 와서 조각을 놓고 간 것일까? 실제로 보면 별 볼 일 없지만, 존재만으로 물음표가 가득 생겼다. 단순히 보고 즐기는 입장에서는 반가운 모습이지만, 한쪽 구석에서 빙하가 녹으면서 쏟아져내리고 있는 물을 보아하니, 한편으로는 자연파괴가 걱정되었다.
빙하 레벨 표지판
다시 열차 타러 계단을 올라가는 길. 동굴만 바라보며 내려올 때와 다르게 하늘을 쳐다보며 가니 벽에 붙어있는 안내판이 눈에 띄었다. 바로, 빙하 레벨 표시선. 이를 통해 지구온난화가 얼마나 급속도로 진행되는지 한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20년 전과 10년 전의 감소세에는 굉장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앞으로 이 빙하가 모두 녹아내리면 지구는 어떻게 될지. 환경문제를 깊게 생각하게 되는 표지판이었다.
에귀 디 미디 마을 풍경
생각보다 몽블랑 구경은 일찍 끝나, 예정된 버스 시간보다 일찍 타고 제네바로 돌아오기로 했다. 한참 여행 중이었던지라 휴식도 필요해서 금방 복귀했는데, 지나고 보면 마을도 둘러볼 걸 생각이 든다. 한겨울에는 스키, 스노보드 등 겨울 스포츠를 즐기러 오는 이들이 많은 만큼, 나름 마을도 잘 형성되어 있는데 말이다.
엄마와 나는 지금도 샤모니 몽블랑 이야기를 한다. 알프스 얘기를 하면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아도 이곳을 먼저 떠올리곤 한다. 이후로 무엇을 봐도 울림이 없을 만큼 아주 강력했으니까. 여행이 어땠는지 떠올리면 바로 생각나는 장소 중 하나. 샤모니는 언젠가 또 다른 매력을 찾아 다시 방문하고 싶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