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모임에서 시작된 소소하고도 대담한 계획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책의 매력을 말할 때 자주 쓰는 표현이 있다. '물성'이라는 단어다. 손에 잡히지 않는 지식과 이야기들은 가치있지만, 그 자체로 어떤 물성(물건이 가진 성질)을 느끼긴 어렵다. 그런 추상적인 가치들은 책에 담김으로써 글자가 인쇄된 종이, 표지의 질감 같은 여러 가지 재밌고 생생한 물성을 지니게 된다.
난 잡지에서 그 매력을 더 촘촘하게 느꼈다. 매달, 혹은 일 년에 한두 번, 잡지들은 저마다 다른 주기로 독자를 찾아온다. 일반적으로 몇백 페이지를 넘는 단행본들보다 더 빠르게 제작되어서 독자를 만나곤 한다. 잡지는 손에 잡히는 결과물을 빠르게 만들기 좋은 매체고, 페이지 수가 적은 경우가 많으니 그 점에서 부담도 적다.
어느 날, 잡지의 매력에 대해 생각하던 나는 문득 처음부터 끝까지 손수 기획한 잡지를 만들어 보고 싶어졌다. 돈이 얽히지 않아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담을 수 있는 매거진! 그리고 내게는 그것을 도와줄 든든한 친구들이 있었다. 함께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다섯 친구들(나 포함 여섯 명이다). 2017년 첫 연말모임을 시작으로 코로나19가 유행했던 2년을 제외하고 매년 만나온 그 친구들은 이제 어엿하게 각자의 길을 걸어 나가고 있었다. 원래 글 쓰고 읽는 걸 좋아하는 친구들이니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가지고 있을 거였다. 바쁜 일상을 보내는 친구들에게 시간을 내어 주십사, 우리의 잡지를 함께 만들어 보자고 설명하고 설득하는 게 나에게 주어진 일이었다.
그래서 2024년 연말모임에, 나는 친구들에게 줄 깜짝 선물을 준비했다. 함께 방문한 카페는 크리스마스 분위기의 장식으로 가득했다. 모두가 자리에 앉았을 때, 난 그간 혼자 열심히 써온 기획서 여섯 장과 레퍼런스 뭉치를 가방에서 조심스레 꺼냈다. 무슨 내용이 적힌 종이인지 찬찬히 읽어 내려가던 친구들의 표정에 화색이 돌았다. 글을 써서 무언가 만들 수 있다는 기쁨과 약간의 두려움 섞인 설렘, 기대감, 놀라움 같은 감정이 각자의 성격대로 얼굴 위로 떠올랐다. 다행이었다! 떨리는 순간이었지만, 믿었던 친구들이 믿었던 이상으로 반응해 줘서 굉장히 고마웠다. 다 같이 충분히 기뻐한 후에는 기획서의 내용을 설명하고 레퍼런스를 보여주며 의견을 나누고 의욕적으로 잡지 제작 계획을 구체화했다. 삼십 대의 시작을 맞이한 우리들에게 오래도록 남을 즐거운 출발의 순간이었다.
잡지 제작은 지금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완성에 의의를 두고 있어 거창하지는 않지만, 의미 깊은 그 도전의 기록을 이곳에 시리즈로 남겨 보려고 한다. 우리의 도전기가 누군가에게 참고할 만한 정보가 되어 새로운 잡지 탄생의 단초가 되어도 좋을 것이고, 그저 친구들끼리 공유할 만한 즐거운 기록으로만 남더라도 충분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