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한다는 헛된 최면의 말
우리는 흔히 누군가가 본인에게 사회적, 금전적, 심리적, 신체적으로 비교적 이득을 주거나
성인군자는 아니더라도 그 사람의 인격이 본인의 인격과 충돌하는 일이 적어서 용인 할만할 때 '착하다'라는 말로 묘사한다.
이 착하다 라는 말... 과연 옳은 걸까?
"어? 00는 착한 줄 알았는데......?"
초등학교 4학년 때였을 거다. 그때의 난 지금보다 훨씬 더 소심하고 훨씬 더 자기 주장이 불분명하며, 훨씬 더 '착했다'.
어느날, 과학 조별 발표가 있었는데 4~5명이서 한 조가 되었다. 그런데 다른 조의 어떤 아이가 우리조의 한 아이와 단짝이었나 보다.
그 둘은 나에게 다가와 조를 바꾸지 않겠느냐고 했었다. 사실 이런 일은 나로서는 흔한 일이었다.
친구도 별로 없고 말수도 없어서 이런 포지션 조정의 희생자가 으레 되기 마련이다. 당번, 청소, 주번 등등 조를 이루어야 하거나 짝을 이루는 일들에서 가끔 소외됬지만 난 별로 개의치 않는 편이었다. 쉽게 물러서고 쉽게 숙이는 데 길들여진 탓에..
하지만 문제는 내가 원래 속한 조는 그나마 얼굴을 자주 익히거나 그나마 소위 기싸움을 덜 하는 무던한 아이들이 모인 조였다.
다른 조로 가라면 적응을 못하거나 과학실험에서 열외가 될 가능성은 커 보였다.
아마도 그때 난 얼버무리면서 답을 회피한거 같다. 아님 "아.. 선생님이 조 함부로 바꾸지 말라고 했는데.. 번호 순으로 하는거 아닌가.."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면 상대방이 하는 말은 과히 가관이었다.
"어? 00는 착한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고 어른이 되면서 이 말뜻을 이해 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상대가 나로 하여금 원하는 대로 행동 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심리를 교묘히 조정하기 위한 하나의 술책이라는 것.
그리고 비교적 어른이 아닌 어린나이부터 터득 했다는 점에서 난 이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환멸을 느꼈을 지도.
그 아이가 한 말을 풀어 보면 다음과 같다.
"넌 내가 알기로는 다른 사람을 부탁을 잘 들어 줬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그 이점을 이용한다.
너는 별다른 이의 없이 다른 사람의 부탁을 들어 주고 불만을 품지 않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심리적 부담감 및 일방적 부탁에 대한 죄책감을 주지 않는다. 이것은 상대방에게 큰 편리함 및 편안함을 준다. 그러므로 넌 내게 착한 사람이다.
나에게 심리적 사회적 이득을 주므로.
그런데 넌 내 부탁을 거절했다. 넌 착하지 않은 건가? 이러한 작은 예외적 모습이 네가 그동안 보여왔던 '착한' 이미지에 균열을 줄 것이다.
다른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전해 지겠지. 하지만 여전히 넌 학우들에게 큰 영향력이나 입지를 차지 하는 성격이나 위치가 아니다.
널 불안하게 하기 위해서 난 이말을 해야 겠다. 내 예상에 어긋 나는 의외의 모습에 놀랐다는 식으로 말이다. "
그래서 수면으로 떠오른 말이 그런 말이었다.
위의 해당하는 긴 문장은 그 상대방 아이의 머릿 속에서 찰나의 순간에 계산된 생각을 나열한 것이다...난 분명히 그렇게 느꼈다.
이런 애들은 그렇게 말하고 주위의 동료아이들의 반응과 호응을 살핀다.
역시 '착하다'라는 말은 그렇게 정의 된다. 씁쓸하다. 어른이 된 후에도 나는 수도 없이 '착하다'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녔다.
그리고 사람들도 저마다 '착한 여자', '착한 남자' - '착한 사람'을 찾기 위해 열을 올린다.
그들이 찾는 '착한 사람' 이란 과연 사전적 의미의 일부분인 '도덕적, 윤리적 그리고 법적으로' 옳은 사람일까?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바보에게 완곡한 표현으로 '착하다' 라고 열광했다.
우선 착한 아내를 예로 들어 보자. 착한 아내는 남편이 설령 믿음을 져버리더라도 결국 용서한다. 시댁 식구들이 섭섭하게 하더라도 참고 견딘다. 남편월급이 적더라도 불만을 품지 않는다. 직업을 가졌다 하더라도 매일 1시간 더 일찍일어나서 밥을 준비한다.
남편에게는 아내가 참 '착하다'. 본인에게 심리적, 사회적 그 밖의 나아가서는 경제적 이득을 준다.
그리고 끊임없는 관용을 베푼다.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건 그 사람에게 면죄부를 부여한다. 면죄부는 그 사람의 죄책감 및 도덕적 심리적 짐을 덜어 줌으로써 그 사람을 정신적으로 해방하는 것이다. 그러한 '절대적 해방감과 도덕적 자유'를 부여한다는 것은 큰 장점에 해당한다. 결국 사람은 외적으로 우수해 보이거나 돈이 많은 것보다는 '성자와도 같은' 아내나 남편을 원할 수 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이런 속물스러운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착한 남편이 있다. 그도 아내의 심리적, 경제적, 사회적 이득을 위해서 밤낮 고심한다. 착하기 때문이다.
착한 남편은 아내가 경제적 능력을 타박해도 묵묵히 참는다. 아이들이 아버지에게서 멀어지고 무시하더라도 자연스런 이치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돈이 많으면 많은 데로 아낌없이 남자답게 베푼다.
고용주 및 부하직원이 자신의 실적이나 성과급을 가로 채도 결국은 팀을 위한 거니까 하고 자신을 위로한다. 보증좀 서달라는 친구 부탁도 거절 못 한다. 착해야 하니까.
이들은 끊임없이 피해를 보거나 상처를 받아도 괜찮음으로 착함을 완성한다.
동시에 전통적 관습의 희생자 이거도 한데 주제를 벗어날 가능성이 있으므로 여기서 그 얘기는 하지 않기로 한다.
이런 식의 착한 사람, 착한 친구, 착한 배우자를 찾는 사람들을 한때 '공짜고기를 찾는 하이에나'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찬사를 늘어 놓는 사람들의 특징을 추측해 보면 그들의 이익을 위해 열심히 열과 성을 다하는 안타까운 '바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전반적 영역에 잠정적 이득을 줄 수 있는 바보에게 완곡한 표현으로 '착하다' 라고 열광했다.
'착하다'라는 말 말큼 주관적인 말도 없다.
화자가 대상에게 자기관점에서 부여하는 속성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방적이다. 그리고 이런 표현은 이성적이기 보다는 감정에 바탕을 둔 표현이다. 화자의 대상에 대한 감정에 따라 가변적이면서 불완전 할 수 있단 뜻이다.
'바르다'라는 표현을 봐도 일수 있다. 이는 보편적 또는 객관적이다. 대상의 도덕적 특성이나 행동에 대한 대다수 사회 구성원의 가치판단을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다시 '착하다'라는 표현을 보자. '화자'의 개인적 느낌을 반영한 표현이 확실하지 않은가.
왜 그런 식으로 착해야 하는 거지?
미국 어느 대학교의 백인학생이 주위 동료들의 이민자 차별이나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듣고 '아, 난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한다면 그 학생은 착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어떤 학생이 계단을 올라가는 할머니의 짐을 들어 준다거나, 비를 맞고 가는 어린이에게 우산을 씌워 주는 평범한 회사원은 착하다 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언급한 3개의 예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이득...그들은 이득을 취하려 하지 않았고 요구당하지도 않았다.
수혜를 받은 사람이 호혜를 배푼 사람에게 언제 갚을 지 모르는데도 (그럴 가능성도 없다) 그들은 아무 댓가없이 타인을 도왔다.
이런 행동은 보편적으로 옳다. 이타적인 행동이며 가족, 친구, 연인에게만 적용 해도 될텐데 남에게 적용했다. 이것이야 말로 착한 것이다.
남의 부탁을 받고 그 사람의 바램으로 움직여서 그 사람에게 착한 것이 아니라...
난 옳은 것이기에 착하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이득이 되어서 착하기에 옳다고 말한다. 이것은 정말이지 숨막이는 이론이다. 역으로는 성립이 안 될때도 있으련만 굳이 역으로 대입시키려 한다.
조금은 부탁을 거절해도 조금은 까다롭고 까칠해도 '착할 수는 없을까?'
옳기 때문에..바르기 때문에 적어도 착하다의 영역에 한 쪽 발을 담글 수는 없나?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해 주지 않아서 그럴 수 없다면 당당하게 착하다는 조종의 최면을 벗어버리길... 나에게도 바라고 또 사람들에게도 바란다.
※ '착하다'라는 표현에 관한 무조건 적인 혐오의 글은 아님을 밝혀 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