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딩 전문가의 관점으로 본 이니스프리 리브랜딩 일장일단(一長一短)
2023년 2월, 이니스프리 리브랜딩이 있었다. 새로운 자연주의를 표방하며 브랜드 로고와 컬러, 패키지 등 브랜드 전반에서 과감한 리뉴얼 작업이 이뤄졌다. 리뉴얼 이후 약 1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이니스프리 리브랜딩의 성과와 브랜드 내러티브의 중요성을 돌아본다.
리브랜딩에 대해서는 말이 많았다. 특히 변경된 로고 디자인에 대한 호불호가 엇갈렸다. 그러나 모든 리브랜딩에는 배경과 목적이 있다. 이니스프리 리브랜딩 역시 분명한 배경에서 시작되었다.
2000년 탄생한 이니스프리는 국내 로드숍을 대표하는 1세대 화장품 브랜드로 2016년 총매출 1조 원을 달성하는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중저가 뷰티 카테고리에서의 제품 상향 평준화와 화장품 신규 유통채널 CJ올리브영의 등장으로 상황은 급변했다. 2015년 552개였던 CJ올리브영 매장은 2023년 1,339개로 성장했다. 반면 2016년 1,000개가 넘었던 이니스프리 오프라인 매장은 2023년 350여 개로 축소되었다. 화장품 시장의 주도권이 로드숍에서 드러그스토어로 넘어간 것이다. 이와 함께 매출액 또한 급격하게 감소했다.
이니스프리의 성장을 견인했던 중국 매출 역시 2020년 3,921억 원에서 2023년 680억 원 수준으로 급감했다. 한한령과 코로나 불황의 영향도 있었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우수한 품질과 트렌디한 감성으로 무장한 중국 현지 화장품 브랜드의 성장이었다. 이니스프리 과감한 리브랜딩은 브랜드 노후화 해결로 신규 고객인 Z세대를 공략하고, 글로벌 화장품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생존 전략이었다.
이니스프리는 리브랜딩을 위한 TF팀을 꾸리고, 위기를 극복할 방안을 모색했다. 오랜 고민 끝에 TF팀이 내린 결론은 이름을 제외한 모든 브랜드 자산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는 것. 이니스프리는 순수함을 강조했던 정적인 자연주의를 자연의 액티브한 에너지를 감각적으로 전하는 고효능 자연주의로 새롭게 포지셔닝했다. 또한 브랜드 확장성을 위해 제주라는 한정된 지역에서 벗어나 가상의 섬, 뉴아일(THE NEW ISLE)이라는 새로운 세계관을 창조했다. 새로운 포지셔닝에 따라 비주얼 아이덴티티 역시 전면 리뉴얼되었다.
과연 이니스프리 리뉴얼의 성과는 어땠을까?
이니스프리의 2023년 3분기 매출액은 665억 원. 전년 동기 748억 원 대비 11.1% 감소했다. 결과적으로 이니스프리 리브랜딩은 브랜드 가치 및 고객 관계 개선에 실패한 셈이다. 리브랜딩의 방향성은 매우 타당했다. 젊고 현대적인 감각으로 오래된 브랜드에 새로움을 더했다. 새로운 브랜드 세계관에 대해 진선영 이니스프리 마케팅커뮤니케이션 팀장은 이렇게 말한다. “이야기를 솜씨 있게 쓰는 게 중요하지 않다. 이니스프리의 정신을 제대로 알고, 브랜드 철학에 상상력을 더한 이야기를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실적을 보면, 이니스프리의 새로운 내러티브가 과연 고객에게 설득력이 있었는지 의문이다.
어떤 이들은 브랜딩은 장기적인 것이니 즉각적인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소비자와 유대감을 형성하고 있는 브랜드의 리뉴얼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다. 성공적인 리브랜딩은 매출 증가로 연결된다. 글로벌 럭셔리 그룹 LVMH의 주류 브랜드, 샹동(CHANDON)의 리브랜딩이 좋은 사례이다.
샹동 또한 이니스프리처럼 오랫동안 소비된 브랜드 이미지로 인해 글로벌 2030에게 외면받고 있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샹동은 새로운 정체성과 젊은 페르소나를 바탕으로 BI와 패키지 디자인을 포함한 브랜드 전반의 과감한 리뉴얼을 진행했다. 2021년 리브랜딩 이후 LVMH 와인·스피릿 부문 글로벌 매출액은 전년 동기 20% 증가했으며, 2022년의 매출은 2008년 이후 역대 최고치를 달성했다. 2023년 브랜드 파이낸스(Brand Finance)가 발표한 와인 브랜드 가치 평가에서 글로벌 3위로 올라섰다.
샹동의 성공과 이니스프리의 실패를 가른 결정적 요인은 무엇일까? 같은 젊은 세대를 타겟으로, 새로운 정체성에 기반한 스토리텔링과 디자인을 선보인 두 리브랜딩 프로젝트는 무엇이 어떻게 달랐을까?
브랜드의 지속적 성장을 위해서는 내러티브(narrative)가 필요하다. 브랜드에게 내러티브란 단순한 스토리텔링 이상의 의미가 있다. 브랜딩이란 고유한 주제를 브랜드다움이라는 개연성 높은 서사로 실현하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고객과의 관계 역시 브랜드 내러티브의 일부라는 사실이다. 서사의 완성은 고객에 달려 있다.
때문에 리브랜딩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부분은 기존 고객과의 관계이다. 이니스프리가 리브랜딩을 통해 신규 고객 확보에 성공했다고 해도 기존 고객에게 외면을 받는다면 그것은 반쪽짜리 성공에 불과하다. 충성 고객을 상실한 브랜드는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리브랜딩의 성패를 가르는 것은 개연성이다. 브랜드가 축적한 기존의 이미지와 새로운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연결하여 개연성을 확보한 내러티브가 필요하다. 기존 고객과 신규 고객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브랜드다움을 공유해야 하는 것이다.
2000년부터 지금까지 풍부한 자산을 축적했던 이니스프리에게 새로움을 목적에 둔 리브랜딩은 기존 브랜드 자산과 고객 관계를 부정하는 결과를 보였다. 더구나 가상의 세계관에 기반한 스토리텔링은 브랜드 내러티브의 개연성을 저해했다. 오랫동안 사랑받는 브랜드들이 구체적인 지역과 인물에 기반하여 브랜드 내러티브에 개연성과 설득력을 부여하는 것과는 상반된 모습이다.
샹동 역시 젊은 페르소나를 바탕으로 전면적인 리브랜딩을 진행했다. 그러나 브랜드 정체성을 새롭게 정의하면서도 브랜드 내러티브의 근원인 프랑스 와이너리를 그대로 계승했다. 대신 글로벌 브랜드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해 6개의 글로벌 와이너리를 스토리텔링의 핵심 자산으로 활용해 브랜드 세계관을 확장했다. 재미있는 것은 샹동이 리브랜딩에서 다루는 '가능성으로 가득한 세계(A WORLD OF POSSIBILITIES)' 역시 고객에게 새로운 설렘과 상상의 여지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제주라는 현실의 섬에서 벗어나 가상의 세계관을 창조한 이니스프리와는 달리, 샹동의 상상력은 전 세계에 위치한 6개의 와이너리와 고객의 일상을 연결하는 영감에 대한 이야기다. 이런 접근 방식의 차이는 캠페인에서도 드러난다. 가상의 섬에서 모델들이 춤추고 뛰노는 판타지를 묘사한 이니스프리의 광고와는 달리, 샹동은 전 세계의 청춘들이 각자의 일상에서 와인을 즐기는 모습을 친근하게 묘사한다. 샹동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글로벌 MZ의 공감을 얻었다.
샹동이 새롭게 쓴 내러티브의 핵심은 기존 브랜드 자산을 온전히 활용하여 새로운 고객이 공감할 수 있는 개연성 높은 이야기를 전했다는 점이다. 브랜드 내러티브의 설득력은 개연성에 있다. 때문에 브랜드 정체성에서 스토리텔링, 디자인, 마케팅에 이르는 모든 브랜드 활동에서 개연성은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2020년 아모레퍼시픽그룹 서경배 대표이사 회장은 고객 중심의 가치와 시대정신을 반영한 고유의 이야기로 독보적 브랜드 지위를 구축해야 한다고 밝혔다. 과연 브랜딩에 있어 중요한 것은 고객 가치와 이를 설득력 있게 전하는 내러티브이다. 그렇다면 이니스프리가 리브랜딩을 통해 글로벌 고객에게 전하는 메시지란 무엇인가? 가상의 세계관에 근거한 이니스프리의 자연주의에서 고객은 과연 어떤 가치를 느낄 수 있을까?
고객의 피부에 직접 닿는 화장품에 있어 중요한 가치는 새로움이 아닌, 진정성이다. 가상의 섬이라는 세계관을 통해 피부에 와닿는 브랜드 진정성을 전할 수 있을까? 오히려 가상의 섬에서 온 청정한 원료보다 제주라는 구체적인 지역에 기반한 스토리텔링이 피부에 와닿지 않았을까 싶다. 이는 이니스프리가 의도했던 글로벌 시장 진출과 브랜드 확장 측면에서도 와닿지 않는 브랜딩이다. 호주 멜버른의 골목 미용실에서 시작된 로컬 브랜드 이솝(Aesop)이 글로벌 브랜드로 널리 소비되고 있는 것을 봐도 그렇다. 이솝의 브랜드 가치가 새로움에 근거한 것이 아니듯, 자연주의라는 이니스프리 고유의 주제 의식을 보다 진정성이 느껴지는 이야기로 전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솝의 창립자 데니스 파피티스(Dennis Paphitis)는 브랜드의 진정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많은 화장품이 혁신과 새로움을 강조하지만, 애당초 기초가 잘된 제품은 시간이라는 테스트를 견뎌냅니다. 시즌마다 리뉴얼한 제품을 내놓을 이유가 없죠." 이것은 브랜딩의 관점에서도 통용되는 이야기이다. 정말 가치 있는 주제를 다루는 브랜드라면 파격적인 리뉴얼을 할 이유가 없다. 이니스프리의 자연주의 역시 그 자체로는 훌륭한 주제였고, 그것을 전하는 구성 방식에 있어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했다.
다양한 리브랜딩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입장에서 보면, 파격에 가까운 이니스프리의 변신은 어떤 면에서는 매우 합리적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다만 합리적이라는 기준으로 브랜드의 서사를 구성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그렇지 않다. 국내 화장품의 중심은 로드숍에서 드러그스토어로 바뀌었고, 중국 화장품 시장은 트렌디한 중국 브랜드가 주도하고 있다. 고객의 브랜드 경험은 풍부해졌고, 브랜드 간의 경쟁은 치열해졌다. 이런 위기를 타개하는 것이 바로 브랜드 내러티브의 힘이다. 오랜 시간 이니스프리가 고객과 함께 만들어 온 내러티브적 맥락에서 보면 이번 리브랜딩은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 새로움이 아니라 기존 고객과의 유대감을 이어가며 자연주의에 신선함을 더했다면 어땠을까? 물론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는 사실은 틀림없다.
다음 연재글에서 이어집니다.
브랜딩 전문가의 관점으로 본 이니스프리 리브랜딩 일장일단(一長一短)
이니스프리 리브랜딩, 핵심은 브랜드 내러티브에 있다. (현재글)
이니스프리 리브랜딩, 브랜드 로고는 디자인이 아니다. (예정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