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


한겨울의 한낮이 좋다.


인천대교를 달리며 창밖으로 보이는

시린 서해, 하지만 따사롭게 내리쬐는 햇살.

서늘하면서도 따뜻한 이 기분.


히터를 끄고 라디오를 틀었다.

오늘부터 다시 한파가 시작되며 온도는 점점 더 내려갈 것이라고 하였다.



공항의 입국자 출구 게이트 앞에는

초조하면서도 들뜬 얼굴을 한 사람들 무리가 오직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지루한 금붕어 입처럼 가끔씩 뻐끔거리는 두 평 남짓의 자동문,

그 위 어느 집 거실보다 훨씬 더 큰 전광판에는

오사카 발 12시 반 비행기가 이미 도착해 있다는 표시가 반짝이고 있었다.

'나오는 사람만 있는 문이라니...'

라던가, 공항의 어떤 분위기가 좋아 스튜어디스가 된 사촌 등을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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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여나 못 알아보지는 않을까.

정말이지 걱정이 되었다.

요코가 이탈리아를 떠난 지 벌써 2년이 훨씬 넘었다니.




다시 자동문이 열렸고

다행히 나는 요코가 문을 나오기도 전에 얼굴이 저만치 작게 보이는데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손을 흔들었고, 요코야말로 이런 나를 누구인가 하는 얼굴로 잠시 쳐다보았다.


우리는 상기된 얼굴로 한국이나 일본식 목례를 해야 하나 이탈리아식 포옹을 해야 하나

서로 잠깐 망설이다

딱딱한 포옹을 하였다.

그러고 보니 요코와는 이탈리아에서도 이탈리아식 인사를 한 적이 없었다.


요코는 배가 고프다는 말을 시작으로 차 안을 이탈리아말로 채워가기 시작했다.

"나 너무 이상해. 너랑 나랑 이렇게 함께인데 창 밖 풍경이 이탈리아가 아니잖아!"


요코에게 한국에서 삼겹살에 김치를 구워 먹자고 몇 번 말을 하였지만

이렇게 얼 것 같은 손으로 뜨거운 호떡을 먹으며 종묘를 돌아다닐 줄은 몰랐다.

요코는 달랑 배낭 하나에 왕복 비행기 표와 호텔 주소만 가지고 한국에 왔다.


잠깐 들어가 본 호텔은 작지만 깨끗하였고 큰 창으로 해가 잘 들어왔다.

요코는 잘 포장된 녹차와 초콜릿 같은 것을 나에게 건넸고

나는 내가 좋아하는 와인을 건넸다.

"와! 와인 고마워! 근데 기내에는 액체가 안 되니까 언제 여기서 함께 마시자."


꿈틀거리는 산낙지, 경적을 울리며 추월하는 봉고차들,

당장이라도 칼 맞은 사람이 달려올 것 같은 공구 골목들.

신발을 벗을까 말까 망설이는 전철 노약자석의 할아버지.

스테인리스 그릇에 담긴 데일만큼 뜨거운 쌀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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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천정에 엮어진 굴비라던지 오래된 몰딩집 간판이라던지

요코는 나는 한 번도 멋지다고 생각한 적 없는 것들에 놀라며 사진을 찍었다.

"와! 엄청 멋져!"




총 2박 중 첫 번째 밤은 남산을 올랐다.

영하가 넘는 평일 겨울날 밤

남산타워를 향해 오르는 사람은 우리 둘 뿐이었다.

도시의 불빛에 안산의 테두리가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날은 맑았다.

얼마나 많은 사랑 자물쇠가 걸려 있던지, 예를 들면 cctv라던가 가로등 꼭대기까지도,

천공의 라퓨타에나 나올 것 같은 기괴하고 그로테스크한 괴팍한 천재 작가의 작품을 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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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자정이 다 되어 남산 꼭대기에 도착했다.

요코는 이것저것 정자나 역사에 대해 물었지만

설명해 줄 정도로 아는 게 없어서 조금 민망했다.


남산타워의 조명 색은 날마다 변한다고 하는데

오늘은 보라색이었다.

어제 내린 눈은 아직도 군데군데 하얗게 쌓여 있었고

가끔 청설모들이 바스락거리며 나타났다 사라졌다.

저 멀리 롯데타워가 보일 정도로 맑디맑은 날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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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는 거의 아무 정보도 없이 이렇게 한국에 처음 오게 되었다.

"정말 아무 데도 생각한 곳이 없어? 너 가고 싶은 데 가자."

"여기... 콤포트..."

주머니에서 꺼낸 포스트잇에는 가타카나로(아마도) 콤포트 서울이라고 적혀 있었다.

언젠가 잡지에서 본 곳이었다. 나도 가볼까 생각한 곳이라

바로 택시를 잡아타고 향했다.

무질서하고 허름한 다세대 빌라촌 사이에

곡선과 직선, 그리고 여백이 완벽한 이 장소가 나쁘지 않았다.

전봇대와 까맣고 두꺼운 전깃줄들이 아무렇게나 그어진 사이로 서울 시내가 석양에 물들어 있었다.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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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순식간에 닥친 두 번째 밤, 그러니까 서울에서의 마지막 밤은

동네 시장에 있는 라이브 재즈바에 우연히 들어가게 되었다.

불 꺼진 떡집과 돼지머리집 사이에서 딕실랜드 풍 재즈가 흘러나오다니.

크고 작은 트럼펫, 피아노, 베이스... 드럼 그리고 색소폰.

좌석을 거의 채운 건 연주자들이었다. 공연을 보러 온 약간의 사람들이 뒤섞여 호주 에일 맥주 같은 것을 마시며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주인처럼 보이는 화가 모자를 쓴 흰머리 아저씨가 다가와 약간의 설명을 해 주었다.

"오늘은 아마추어들이 잼을 하는 날이에요. 저는 트럼펫을 좋아합니다. 하하."

그리고 팔뚝의 트럼펫 문신을 보여 주었다.

요코가 잠깐 놀란 표정이라 설명을 해 주고 함께 웃었다.

리듬과 뭔가 흥겨움으로 공간은 터질 듯했지만

누구도 떠들거나 하지 않아서인지 굉장히 조용하다고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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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날 아침.

요코는 한국 기념품으로 감태를 사갔다.

하얀색 궁서체로 크게 감태라고 써진 포장이 멋지다며

셀피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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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만에 다시 돌아온 인천공항.

요코는 차 안에서 뭐라고 많은 말을 한 것 같은데

나는 혹여라도 길을 잘못 들키라도 해서 비행기를 놓칠까 귓등으로 들은 것 같다.

주차를 하지 않고 그냥 내려만 줄까 하다가

지하 주차장에 들어갔는데 자리가 없어서 주차 장소가 아닌 구석에 차를 세웠다.

"여기 차를 세운다고! 안 돼! 경찰 오는 거 아니야?"

"너 비행기 타야지. 난 금방 올 거야. 가자."


둘이서 땀을 흘리며 겨우 셀프 체크인을 했다.

보안 검색 게이트 앞.

이제 나는 저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너랑 서울에서 간장게장을 먹다니! 나 사실 이게 아직도 현실이 아닌 것만 같아서 무슨 느낌인지 모르겠어.

와줘서 고마워!"

"아리가또! Siamo 친구! (이탈리아어로 Siamo는 '우리는'이라는 뜻)"

요코는 이탈리아어와 한국어와 일본어를 섞어서 '시아모 친구'라는 말을 하며

눈을 붉혔다.

계속 웃고 떠드는 시간을 보냈어서 요코의 촉촉하고 빨간 눈동자가 순간 조금 당황스러워

어떻게 할지 몰랐다.

우리는 한번 세게 포옹을 하고 서로의 방향으로 걸었다.

한번 뒤를 돌아보았는데, 요코도 내 쪽을 보고 있었다.

안경을 쓰지 않아 어떤 표정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라디오를 틀었다.

오늘부터 한파가 풀린다고 했다.

차 안이 더워 히터를 끄려고 보니 히터는 켜지지도 않은 상태였다.

창문을 잠깐 열고 목도리를 풀었다.

'1월의 서해 바람은 참 시원하구나.'


친구.

오랜만에 직접 들어본 단어라 어색하기도 하고 뭔가 심장이 눌린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요코를 누구라고 정의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 단어를 듣고,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연락을 자주 할 수 없어도

어떤 '사이'로 계속 남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무언가 안심이 되었다.


저녁때 즈음 요코는

간사이 공항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영화관에 잠깐 들러 한국 영화를 한 편 보았고

지금 집에 도착하였다고 사진 하나를 보내왔다.


콤포트. 금연. 서울.

모두 내가 좋아하는 단어라고 답장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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