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소유 Feb 06. 2024

엄마는 T

   엄마는 나랑 참 안 맞았다. 나의 속상한 마음을 알아주거나 달래주기보다 ‘옳은 말 대마왕’이었다. 옳은 말이니 반박은 못 했지만 되풀이되니 그냥 나에겐 잔소리에 불과했다. 칭찬에도 인색했다. 잘한다고 말해주기보다 못하는 것에 집중하니 더 주눅만 들었다. 엄마는 자식들을 위해 정말 애쓰셨지만 다정한 분은 아니었다. 감정을 표현하는데 서투셨고 화가 나면 불같이 화를 내는 호랑이 같은 엄마였다. 그래서 엄마에게 가볍게 농담을 건네며 재잘재잘 여느 모녀처럼 수다를 떠는 일은 드물었고, 어쩌다 대화를 시도하더라도 잘 통하지 않았고 벽에 가로막힌 기분이라 점점 나는 속 깊은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엄마는 남들에게는 달랐다. 동네에서 오랫동안 알고 지낸 지인분들과 만나거나 전화 통화로 이야기하는 걸 들으면 세상 다정하고 공감능력 뛰어난 사람이었다. 엄마에게 조언을 구하거나 상담하는 지인들이 많았는데, 엄마는 그들의 말을 잘 들어주고 잘 말해주는 해결사처럼 보였다. 이웃에 살던 나랑 친한 언니도 그랬다. 그 언니는 자기 엄마랑 사이가 아주 나빴다. 오히려 우리 엄마와는 대화가 통했고 이런저런 깊은 이야기도 나누었다. 언니는 항상 나에게 우리 엄마가 엄마라 부럽다고 했다. 그럴 때면, 아버지가 교수이고 우리 집보다 부자인 언니가 나를 부러워한다는 사실에 으쓱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돌아서며 의아해하곤 했다. 왜 나한테는 그런 엄마가 아닐까.


  "엄마는 T야."

  요즘 딸들이 하나같이 나에게 하는 말이다. 우리가 예전에 혈액형으로 사람들 성격을 분류해 떠들고 다니듯이, 지금 애들은 MBTI 검사로 사람의 성격 유형을 나누어 서로의 성격을 특정 지으며 논다. T(Thinking)는 그중에 판단기능을 나타내는 지표로, 어떤 일을 결정할 때 논리적이고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성향이라 한다. 사람과 관계를 중심으로 판단해서 공감 능력이 뛰어나다는 F(Feeling) 성향과 반대되는 유형이다. 근데 이게 뭔 소린가. 나는 다정하고 공감해주고 칭찬도 잘하는, 내 엄마와 다른 엄마가 되고 싶었는데 나한테 T라니. 그럴 리가 없다. 나는 아이들에게 다정한 엄마가 되고 싶어서 사랑 표현도 많이 하고 잘하는 일에 칭찬도 해주려 애써왔다. 또 아이 마음도 잘 읽어주려고 온갖 육아서를 찾아 읽고, 유명 강사의 강의도 들었었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우리 엄마와 다른 엄마가 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엄마는 칭찬에도 인색하고 공감도 못 해준단다. 애들이 말하는 전형적인 T란다. 아이들 말에 반박하려다가 가만히 나를 돌아보니 과연 그런 것도 같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잘하는 것보다 못하는 것이 더 눈에 띄고, 간혹 칭찬하려 노력은 하지만 서툴다. 칭찬도 많이 받아봤어야 잘하지. 마음을 읽어주고 분명 속으로 공감도 하는데 이상하게 말은 다르게 나온다. 마음이 앞서간다. 다시는 우리 딸이 그런 속상한 일을 안 겪기를 원하다 보니 위로의 말보다 해결을 위한 말이 앞선다. 자연히 당장 아이 마음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거다. 그래도 엄마에게 서슴없이 그런 말을 하는 딸들을 보니 적어도 무서운 엄마가 안 된 것은 성공인가.


  며칠 전 혹등고래에 대한 다큐를 보았다. 혹등고래는 여름의 극지방에서 새끼를 낳기 위해 적도지방으로 8~9개월간 6,000km가 넘는 거리를 이동한다고 한다. 그리고 새끼를 낳으면 다시 극지방으로 새끼와 함께 돌아간다. 기나긴 여행 동안 새끼는 어미 고래의 젖을 먹겠지만 엄마는 몇 달 동안을 굶는다고 한다. 어미는 어린 새끼를 노리는 적들로부터 보호하고 동시에 앞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생존법을 새끼에게 가르친다. 마침내 극지방에 도착하면 혹등고래들은 놀랍게도 동료 고래들과 소통하고 협력해서 먹이를 잡아먹는다. 그리고 그런 혹등고래만의 특별한 생존 방법을 어미는 자연스럽게 새끼에게 전수해준다. 앞으로 혼자서도 이 세계에서 잘 살아가도록 말이다.


  나의 성향이 어쩔 수 없는 T라서 자식에게 T처럼 행동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엄마는 엄마라서 자식에서 더 T처럼 행동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엄마의 소명이라고 이름 붙이면 너무나 거창하거나 혹은 뜬금없을까. 그것도 혹등고래에 관한 다큐를 보다가 말이다. 오은영 선생님처럼 아이의 마음을 잘 읽어주는 것도 분명 필요한 엄마의 역할이겠지만, 이 거친 세상에 자식이 혼자서도 잘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 엄마의 소명이자 본능이라면, 다소 딱딱하더라도 단단한 엄마가 되기를 택할 수도 있겠다고. (2023)

매거진의 이전글 김태희보다 예쁘다더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