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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뽈입니다 Jan 08. 2021

N차 봉쇄와 새해는 짝꿍


2021년 01월 07일 목요일

날씨 : 따분하게 추움

기록자 : 뽈





새해가 되고도 일주일이 지났다.

별일은 없었다. 그리고 많은 일이 있었지. 


지난 10월로 잠깐 돌아가 보자. 


내게 남은 영국의 시간은 길어야 일 년. 차라리 돈을 좀 적게 벌더라도 조금 더 편한 일을 찾아 하면서 남는 시간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가고 싶은 곳을 가며 지내는 편이 더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까치발 음료 제조기가 될 바에야 가보고 싶었던 바에 가서 칵테일 한 잔을 마셔보는 게 낫지. 이런 시기에 어디서 다시 일을 구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도 있었지만 어차피 상황은 누구도 알 수 없는 것. 남는다고 반드시 안전한 것도 아니고, 이래저래 능사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지체없이 메일을 작성해 인적자원팀에 보냈다.

퇴사에 걸리는 시간, 15분 -Ⅱ 中


그래. 그렇게 생각했지. 그래서 인적자원팀에 퇴사를 알리는 메일을 보낸 날 덜컥 일을 구하고 만 것이다. 아주 쉽게, 너무 빨리. 새로운 일터 후보지는 대영박물관 근처의 일본 라멘샵이었다. 오너 부부와 나까지 셋이서 오픈 키친과 홀을 넘나들며 일하는 아담한 가게.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라고, 쓱 둘러만 봐도 업장의 동선이나 위생 수준이 몹시 훌륭함을 알 수 있었다. 다음은 수월했다. 인터뷰 시작 십 분 만에 채용이 결정됐다. 오너 부부 외에 스태프는 나 혼자이니 여러 사람과 부대낄 일도 없을 테고 일도 복잡하지 않을 테고, 무엇보다 인터뷰 직전 대접해 주신 라멘 맛이 맘에 들었다. 굶어가며 일하던 참인데 매일 한 끼를 맛있는 라멘으로 채울 수 있다니 장족의 발전이지. 잘됐어. 그래. 그렇게 생각했지. 


바로 이튿날부터 트라이얼을 했다. 호텔과는 아직 노티스 기간 중이었기 때문에 오전 11시에서 오후 4시까진 라멘샵에서 일하고, 퇴근하면 바 R로 출근했다. 투잡을 뛰는 게 피곤하기야 했지만 처음도 아니고, 예상대로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 버틸 수 있었다. 나만 잘하면 되는 일이었다. 바지런하게, 꾀부리지 않고. 그리고 그건 내가 가진 유일한 덕목이라 문제 없었다. 고객을 대하는 일은 호텔이나 펍에서 했던 것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쉬웠고 라멘을 끓여 내놓는 일도 초반엔 약간 버벅거렸으나 점점 속도가 붙었다. 


그 사이 영국의 일일 확진자 수는 홍수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내가 영국에 재입국한 8월 31일 기준 2천 명 대였던 게 한 달도 안 되어 6천 명까지 불었다. 3월부터 초여름까지 강력하게 실시한 봉쇄령 덕에 확산세가 살짝 잦아들자 정부가 섣불리 여름휴가 시즌을 개방한 것도 모자라 경기 부양책이랍시고 외식을 장려하는 ‘Eat Out Help Out(먹어서 응원하자…..인데 어느 섬나라 구호랑 겹쳐 보이는 이 기시감은 기분 탓일 거야)’을 실시한 대가라는 분석이 파다했다. 


추이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정부가 9월에 부랴부랴 내놓은 해결책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Rule Of Six’. 실내에서 6인 이상 모이는 것을 금지하는 규칙인데, 구속력이든 실효성이든 하나는 갖춰야 말이지. 열 명인 일행이 레스토랑에 들어갔다고 가정하자. 손님 한 분도 극진히 모셔야 할 판국에 여섯 명이 넘는다고 쫓겨나겠는가? 감사한 마음 받들어 다섯 명씩 두 팀으로 쪼개고 나란한 테이블에 앉혀드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갑자기 식당을 급습해 규칙을 지키고 있는지 단속하는 이들이라도 있다면? 그럴 리가. 그래서 사실상 무의미한 규칙이었다. 


다른 하나는 Track & Tracing으로, 앱 설치와 QR 코드 스캔을 통한 체크인 의무화. 지난여름 동안 보건 당국은 만만치 않은 예산을 들여 ‘NHS COVID-19’ 앱을 개발했다. 이에 따르면 펍, 레스토랑, 카페, 옷가게 할 것 없이 모든 리테일숍은 각자의 사업장을 NHS 홈페이지에 등록한 뒤 부여받은 QR코드를 인쇄해서 입구에 배치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고객은 입구에서 코드를 스캔하고 앱으로 체크인을 마쳐야만 입장할 수 있다. 이를 지키지 않는 업장에는 벌금 천 파운드. 뭐, ROS보다야 그럴듯해 보인다. 그런데 이 ‘NHS COVID-19’ 앱이란 것이 꽤나 잡음을 일으켰다. 우선 기존에 존재하던 NHS 앱과 연동되지 않는 데 따르는 혼선이 있었고, 휴대폰의 기본 사진 앱으로는 즉시 스캔이 불가능해서 꼭 앱을 먼저 다운받아야만 하는데, 이 앱을 다운받으려면 당연하게도 반드시 데이터를 연결해야 한다. 그러면 다운로드하는 동안 손님도 나도, 뒤에 줄 서 있는 손님도 한없이 기다려야 하고, 노트에 수기로 간단히 인명 정보를 적으면 들여보내주는 집도 많던데 여기선 왜 이걸 꼭 해야만 하냐고 따지는 이들에게 나는 계속해서 이유를 설명하며 양해를 구해야 하고, 휴대폰 사용을 어려워하는 중년 이상의 고객이나 데이터를 쓰지 않는 관광객들이라도 올 때면… 제기랄. 아무튼 이 방법도 효용은 크게 없었다.


당국의 노력이 이토록 무색하여 신규 확진자는 쉬지 않고 늘었고 10월 중순에 2만을 넘겼다. 옆 나라 프랑스와 독일은 이미 재봉쇄를 내린 상황. 11월 6일, 영국 전역에도 2차 봉쇄령이 선포됐다. 모든 카페와 펍, 레스토랑은 포장과 배달만 허용. 내부 취식은 금지. 아, 내가 일하는 곳은 라멘샵. 라멘에만 주력하는 집이다. 라멘은 여러모로 포장이나 배달이 어려운 메뉴다. 혹여 포장이나 배달을 한다 쳐도 홀을 열었을 때와는 주문량이 크게 차이 나기 때문에 구태여 나까지 출근할 필요가 없다. 오너 부부는 숙고 끝에 일단 영업 중단을 결정하셨고, 11월 5일 밤 우리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게에서 조촐한 회식을 했다. 


2차 봉쇄가 이뤄지었던 동안 우리 집 할아버지 T는 호텔에서 권고사직을 당했다. 2차 정리해고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결과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퇴사하고 호텔을 나온 L도 이어서 들어간 새 직장을 정리했다. 그리고 나는 무급 휴직. 호텔 소속이었을 땐 그나마 정부를 통해 Furlough Leave 보조금이라도 얼마 받을 수 있었는데 이젠 정말 아무것도 없다. 낙동강 오리알이란 게 이런 건가. 아니지, 내가 2차 정리해고에서 살아남았을지 아닐지 모르는 일이잖아. 어느 쪽이든 위안이 되진 못하지만.


정확히 4주 뒤인 12월 2일. 2차 봉쇄가 해제됐다. 

그러나 확산세는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런 마당에 봉쇄를 해제하겠다니 오히려 우리가 갸우뚱했다. 크리스마스만은 놓칠 수 없다는 건가. 영국인들에게 크리스마스란 한국의 정월 대보름이나 한가위보다도 빅빅빅 이벤트고 대-명절이고 초성수기 하이 시즌이니까. 빗장 풀린 거리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가게도 꽤 바빴다. 우리는 더욱 각별히 조심했고 우리 외에도 조심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훨씬 더 많았는지 확진자 수는 계속 큰 폭으로 솟았다. 매일 다른 가십이 떠돌았다. 아무래도 크리스마스 직전까지 봉쇄가 한 번 더 있을 거 같다더라, 크리스마스 당일을 포함해 전후 5일만 개방하고 나머지 날들은 문 닫게 한다더라 등등. 소문만 무성했다. 우리는 출근하자마자 간밤에 알아 온 확진자 수와 카더라 뉴스를 공유했다.


12월 14일. 영국 남동부에서 코로나 19 변종 바이러스가 출현했다는 뉴스가 떴다. 이틀 뒤부터 런던이 Tier 3, 그러니까 당시까지 유지돼오던 티어 체제 내에서 가장 높은 단계(Very-High)로 격상된다는 소식도 함께. 어깨까지 길렀던 머리를 자르고 집에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그 뉴스를 봤다. Tier 3으로 간다. 그 말은 실내 취식이 다시금 금지된다는 말이자, 내 일도 다시 끊긴다는 말과 같았다. 


12월 18일. 신규 확진자 수가 코로나 19 영국 출현 이래 역대 최대(28,507)를 갱신했다. 정부는 기존 티어 체제에 없었던 Tier 4를 신설해서 런던 전역을 Tier 4로 상향하고 20일 자정부터 긴급 봉쇄를 시작했다. 2차 봉쇄 해제 2주 만에 3차 봉쇄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BBC는 자정 이전에 런던을 빠져나가려는 차들로 꽉꽉 메워진 고속도로 실황을 중계했다. 정부가 알린 다음 브리핑 일정은 12월 30일. 이는 영국이 그토록 사수하고자 했던 민족 최대 명절이자 성수기인 크리스마스 연휴와 박싱데이를 전면 포기한다는 선언과도 같았고.


크리스마스에 진심인 편 1. 일반 가정집들입니다.
크리스마스에 진심인 편 2. 일반 가정집이라고요..!


그래서, 그렇게 크리스마스와 연말과 새해를 맞았다. 집에서. 작년엔 그래도 파리였는데 올해는 집 부엌에서. 무급휴직자 하나와 무직자 둘, 유급휴직자(...부럽네) 하나가 초저녁부터 모여 술잔을 기울이다가, 1월 1일 0시 새해 불꽃놀이를 중계하는 BBC를 보면서 해피뉴이어를 외쳤다.


해피뉴이어… 뉴이어는 왔는데 해피는 언제 올까. 

2만일 때도 무시무시해 보이던 확진자 수치는 허들을 향해 달리는 경주마처럼 달린다. 3만, 4만을 우스운 듯 넘더니 엊그제에는 기어코 6만(01월 06일 62,322)을 찍었다. 새해와 함께 전국 봉쇄도 왔다. 그간 열어두겠다며 고집하던 학교도 이번에는 닫았다. 전국 기준으로는 3번째, 런던 기준으로는 4번째 봉쇄다. 인구 50명 중 1명이 확진자라나.


와중에 새해 벽두부터 코로나 검사를 또 받았다. 드라이브 스루 신청해서 2시간 떨어진 공항까지 달려갔더니 셀프로 하래지 뭐야. 결과는 다행히 음성.  


백신을 신뢰할 수 없어서 맞지 않겠다는 응답률도 높아진다. 1월 말까지라 추정되던 봉쇄 해제 시기가 2월 중순으로 밀려나더니 오늘은 봉쇄를 4월까지 지속할 가능성이 크다는 발표가 나왔다. 새해를 맞아 가까스로 마음을 가다듬었는데 4월이라니. 홀리 몰리. 이럴 수는 없는 거다. 


저 퀭한 눈 좀 보시라요


요즘 끝 모르고 생성되는 밈들.  We've got this beat!


영국 와서 일을 구할 때 들여다본 적도 없었던 ‘Indeed’며 ‘Leed’ 같은 구인구직 사이트를 지난주부터 슬슬 뒤져보고 있다. 뒤진다는 표현도 사실 웃긴 게, 뒤질 게 없다. 일자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 노파심으로 보는 것이긴 하지만 없어도 너무 없다. ‘스타벅스’를 비롯해 ‘코스타’나 ‘카페 네로’, ‘프렛’ 같은 대형 카페 프랜차이즈 홈페이지도 사정은 마찬가지. 겨우 찾아낸 두 군데에 새로 업데이트한 CV를 보냈는데 여태 답이 없다. 답이 없는 휴대폰을 노려본다. 인생이 답이 없다. 정말 엉망진창이네. 


We don't have any jobs right now... Why.. Ddoruru....



12월 15일 저녁. 런던 Tier 3 실시 직전날 밤에, 밀레니엄 브릿지 아래, 자주 찾는 내 자리에서 네온이 명멸하는 강물을 보며 생각했었다. 나는 여기서 여름을 본다. 이번에는 기필코 여름을 만나고야 말 거지. 당장 내일 부러질 다짐이라도 잊지는 말자. 


그 다짐은 오늘까지 대략 64번 정도 부러졌는데. 볼썽사나울 정도로 너덜거리는데. 주워서 한땀 한땀 또 깁는다. 허락되는 한까진 해야지. 나도 깁고. 

영국 생활이 1/3 뿐이 안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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