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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Drink Anew

22화 홍천 두루 양조장 시음기

농사를 직접 짓는 메밀소주!

두루양조장은 길매식당에서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다. 직선거리로는 10킬로미터도 안 되지만 산골을 이리저리 구비구비 가다 보면 시간은 금방 흘러가는 게 강원도길. 두루 양조장 한켠 공터에 차를 대고 내려서 익숙하게 시음장으로 들어간다. 한주로서는 몇 번이나 와보았고, 어제 전화로 미리 약속도 잡아두었으니 말이다. 김경찬 대표가 시음장 문을 열어주며 반긴다.


“어서 오세요.”

“네, 잘 지내셨죠?”

“안녕하세요, 치에라고 합니다.”

“네, 일본에서 여기까지 오셨다구요? 환영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여기, 제 명함입니다.”


두 사람이 명함을 주고받는 사이에 구은경 이사가 뒷 편의 양조장으로부터 시음장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양조장에 일이 좀 있어서 맞이가 늦었네요.”

“네 안녕하세요, 치에입니다.”


구 이사와 치에는 또 명함을 주고받고, 공손히 맞절하듯이 서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그리곤 자리에 앉았다.


“치에 씨는 월드 니혼슈라는 사케 수출업체의 대표입니다. 한주에도 관심이 있어서 홍천까지 왔어요.”

애석_224애석삼선.jpg

한주가 간단히 치에와 상황을 설명했다. 자세한 얘기는 어제 저녁에 통화할 때 했으니까 구구한 얘기를 할 것은 없다.

김경찬 대표가 술냉장고에서 술을 꺼내온다.


“다른 말보다 우선 술을 드셔 보시지요.”


네 개의 병이 나와있다. 삼선, 애석, 메밀로. 그리고 선식초. 이 집은 술뿐 아니라 식초도 하는 집이다. 김 대표가 우선 삼선을 한 잔 따랐다. 두루의 베스트셀러 탁주이다.


치에는 미담에서와 마찬가지로 경건하다고 할 집중력을 발휘해서 차근차근 시음 단계를 밟아나간다. 우선 눈으로 관찰하고, 코로 향을 음미하고 그리고 술을 조금 입에 머금고 굴리다가 넘겼다.


“석탄주(惜㖔酒) 인가요? 보통의 석탄주보다 산미가 강한 것이 인상적이고 좋네요.”

“보통분이 아니시네요. 한 모금만으로 석탄주라는 것도 알아내고.”


김 대표가 놀란 것은 외국인이라는 것을 감안한 것이겠지만 한주도 내심 놀랐다. 이 여인네, 어디서 한주가 모르는 공부를 하고 온 모양이다.


“석탄주는 좀 달아서 많이 마시기 어렵지만 산미가 강한 이 삼선은 자꾸 마시게 될 것 같은 느낌이에요.”


김경찬 대표는 다음 잔으로 맑은술, ‘애석’을 한 잔 따랐다.


치에는 여러 사람이 지켜보고, 같은 동작을 반복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테이스팅 할 때는 혼자만의 세계를 형성한 듯이 계속 조용히, 그러나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지는, 의식 같은 동작들을 반복했다. 마침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에 치에가 든 맑은 술잔이 반짝 빛났다. 아름다운 오후의 한 때와, 아름다운 술과, 아름다운 사람이 삼위일체가 되는 순간이었다.


“아, 이 술도 좋네요. 맑은술은 산미가 훨씬 적은데, 그래도 많이 달게 느껴지지는 않네요. 이건 아마도 감칠맛 덕분이겠죠? 우마미.”

“네. 청주는 달지 않게 한 편이에요. 산뜻한 느낌을 주기 위해서요.”


치에는 말없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자, 이제 증류주 차례입니다. 메밀로라는 술이에요.”


메밀로는 훨씬 작은 잔에 따랐다. 53% 알코올이라서 소주잔 하나 정도만 마셔도 소주 반 병 정도를 마시는 효과다. 시음에는 그 정도 양이 필요하지도 않고, 만약 그런 정도로 몇 잔을 마시면 시음이고 뭐고 취해버릴 게 분명하다. 치에도 이번엔 탁주나 청주를 시음할 때보다 코로 노우징을 하는 시간이 훨씬 길었다. 마지막에 입에서 머금고 굴리는 시간도. 그리고 그 혼자만의 세계에서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고 있다.


“어때?”


메밀로.jpg


한주가 질문을 던져 침묵을 깼다. 방해를 하고싶진 않지만 무작정 기다릴 수도 없으니까. 결계가 깨져 정신이 든 듯이 치에가 급하게 현실의 세계로 돌아왔다.


“이건 정말 놀라운 술이네. 강해. 아주 인상이 강하고, 그리고 시간이 지나도 이 강함이 계속 유지될 것 같아. 이 강함이 메밀의 향을 누르고 있는 것 같아서 약간 언밸런스이지만 아마 숙성을 오래 시키면 자연스럽게 균형을 잡겠지?”


치에가 이례적으로 구체적인 평가를 쏟아낸다. 아마 이 술의 뭔가가 치에의 마음속 어딘가를 움직인 모양이다.


“네 맞아요. 메밀로 말고 용포라는 쌀소주도 있는데, 두 술 다 처음 증류기에서 받아 마실 때가 아주 좋고 그 직후에는 뭔가 좀 거친 느낌이 되죠.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또 반년, 일 년 이렇게 좋아지고요. 아직 출시한 지 오래된 술이 아니라 아주 오래 숙성된 것은 없지만 점점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해요.”

구은경 이사가 해설을 덧붙였다.


“한주 씨도 같이 식초 한 잔 해요.”

선식초.jpg

김 대표가 식초를 따르며 한주에게 권한다. 봄이지만 갑자기 낯까지 뜨거운 느낌의 훈풍이 부는, 태백준령을 타고 넘어온 높새바람이 부는 날이다. 식초라면 시음도 좀 하고, 물을 타서 음료로 만들어 마시고 싶은 더운 날이다. 네 명이 식초를 따라 두고 옹기종기 모여 앉은 모양새가 되었다.




<용어설명>

석탄주(惜㖔酒): ‘삼키기가 아쉽다’는 뜻의 술. 우리나라에서 여러 지역에 널리 전해지는 전통주 중의 하나로 현재 상업양조장중에서 석탄주를 기본으로 술을 만드는 곳도 많다.

우마미:우리말로는 감칠맛으로 번역되는 일본어. 이케다 키쿠나에 교수가 1908년에 우마미를 식별했으나 오랜 기간 동안 기본 오미만이 인정되다가 최근에 감칠맛 수용기제가 발견되면서 제6의 맛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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