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집에 거주하면서 발생하는 노동의 개수가 몇 개쯤 될까?
언듯 생각나는 것만 크게 분류해도 청소, 정리, 빨래, 요리(및 설거지), 쓰레기 배출이 있고, 여기에 각 분야별로 수십 개씩의 세부적인 노동이 더 따라붙는다.
예를 들어 '청소'라고만 하면 그냥 먼지를 쓸고 닦는 것이 아니라 청소기 돌리기, 걸레질, 걸레 빨기, 청소기 필터 청소, 청소용품 정리 등이 생겨나고 이 각각을 관리하는 하위 노동이 또다시 존재한다.
이렇게 많은 가사노동 중에서 사람마다 조금 더 적성에 맞는 일이 있고, 특히 힘들어하는 일이 있을 지어다. 그리하여 저마다 가장 힘든 가사노동을 하나쯤은 뽑아볼 수 있을 것인데, 나의 경우에는 냉장고 청소가 가장 힘들다.
냉장고는 집 안에서 일종의 플랫폼이다.
외부에서 선별하여 들여놓고, 필요할 때 꺼내서 가공(요리)을 거친 후 입 속으로 도착하는 재료들의 플랫폼. 집 안에 있는 또 하나의 집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문과 방이 있고, 생물(?)과 쓰레기가 공존하는 공간.
그다지 부지런한 편은 아니나 매일 여닫는 냉장고에서 역한 냄새가 풍겨오기 시작하면 이제는 더 미룰 수 없는 시기가 왔다는 신호로 보아 며칠 더 미루다 청소에 돌입한다. 그렇게 한 계절에 한번 정도 청소를 하게 된다.
냉장고 청소는 가사 노동계의 3D(Difficult, Dirty, Dangerous) 노동이다. 우선 Difficult 까다롭다. 켜켜이 쌓인 이런저런 짐들을 모두 들어내고 분류해야 한다. Dirty. 그렇게 꺼내놓고 보면 절반 이상은 음식물로서 가치를 예전에 상실한 쓰레기인 경우가 많다. 이것들을 하나하나 처리하는 과정이 그다지 위생적이진 않다. 마지막으로 Dangerous. 언제 마지막으로 열었었는지 모를 반찬통을 (심지어 불투명일 경우) 열기 위해 실눈을 뜨며 숨을 참는 것은 생존 본능이다. 질식의 위험이 존재하는 밀폐된 물건을 열어야 하니 상당한 스트레스가 따른다.
얼마 전부터 냉장고는 여느 때처럼 냄새를 풍김으로써 청소할 시가기 되었음을 알려왔다. 그리하여 이번 시즌의 냉장고 청소가 시작되었다.
어느 토요일, 전날부터 단단히 마음을 먹었던 대로 앞치마와 고무장갑을 착용하고 노동요를 틀고 나서 비장하게 문을 열었다.
가장 심하게 냄새가 풍기는 야채칸을 열었더니 물러 터진 감과 배가 하나씩 나온다. 지난겨울 회사를 다닐 때 부장님이 퇴근길에 밀어 넣어 준 자취생용 비타민인데, 보다시피 모두 버려지고 있다(자취생에게 과일은 귀한 것이지만 한편으로 너무 귀찮은 것이기도 하다). 이웃에서 챙겨준 김치가 삭을 대로 삭아져 존재감을 풀풀 풍기고, 그 아래에선 오래된 멸치 볶음과 무말랭이가 나왔다. 몽땅 개수대에 쏟아놓고 고무장갑을 낀 채 음식물 쓰레기봉투에 옮겨 담는 작업을 한다. 그렇게 하나씩 쏟아붓고 버리고 나니 음식물 쓰레기가 세 봉지나 나온다. 오 마이 갓.
냄새의 원인이 된 것들을 얼추 들어냈으니 이제 음식 찌꺼기가 묻은 각 칸들을 분리해내어 물로 씻고 닦아줘야 한다. 씻고, 닦고, 한편에 앉은 서리까지 벅벅 긁어내고 나니 어느새 몸은 땀범벅이다.
이렇게 내부를 정리하고 아직 먹을 수 있는, 유통기한이 유효한 찬거리와 소스들을 하나씩 닦아서 넣고 나면 싱크대에 비워진 반찬통과 각종 용기가 넘칠 듯 쌓여 있다. 이것들을 또 설거지하고, 정리하고, 닦고, 수납한다.
이렇게 냉장고 청소를 하고 나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다. 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데 힘이 쭈욱 빠져서 오늘은 더 이상 무엇을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녹록할 리가. 한 가지 일이 끝나면 다른 일이 남아있는 걸. 기왕 주방에 손을 댄 김에 싱크대 하부장도 한번 정리하고, 가스레인지 묵은 때도 닦아준다. 마지막으로 부엌 선반을 간단히 정리하고 나니 어느새 해가 뉘엿한 시간이다.
냉장고 청소를 마치고 나니 꽉 차 있던 냉장고가 많이 헐렁해졌다.
그동안엔 들어있는 건 많았지만 먹을 수 있는 게 없었는데, 오래간만에 산뜻하게 청소도 했으니 먹을거리를 좀 채워 넣을 차례다.
이때다 하며 장바구니에 담겨 있던 각종 식료품을 주문하고 즐겁게 채워 넣는다. 그리고 한 며칠은 요리를 해 먹으며 즐겁게 보낸다.
그리고 늘 다짐한다. 쓸데없는 거 많이 사서 채워두지 말아야지.
그 다짐이 이번에는 얼마나 갈지 모를 일이다.
누군가는 옷장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 상태를 안다고 하던데, 나는 냉장고 역시 주인의 마음을 많이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바쁘거나 의욕이 없어서 끼니를 챙기기가 버거울 때 냉장고는 종종 제 기능을 못한 채 방치되고, 냉장고가 정리되고 신선한 재료들로 채워지면 한동안은 활력 있는 생활이 이어진다.
의욕이 생겨서 시작했다기보단 의욕을 얻고 싶어서 이번 냉장고 청소를 단행했다. 내가 가장 힘들어하고 피하고 싶은 냉장고 청소를 하고 나면 그 반작용으로 다른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몸은 힘들었지만 이렇게 청소를 하고 나니 마음은 꽤나 후련해졌다.
조금은 무기력한 요즘이지만 깨끗해진 냉장고와 함께 당분간 힘을 내 보자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