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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정근 Mar 31. 2020

어벤저스는 나쁘다

비례연합정당과 어벤저스

나는 마블의 어벤저스 시리즈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싫어하는 편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는데, 그 이유는 재미가 없어서라기보다는 마블의 세계관 때문이다.

간혹 일부 등장인물들이 가진 다면성이 드러나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타노스를 위시한 악의 무리들을 선한 어벤저스가 물리친다는 구조는 복잡한 세상을 너무 단순하게 바라보게 만든다. 이것은 해롭다.

몇 달 전에 조국 수호냐, 조국 사퇴냐를 두고 국민들이 양분된 적이 있다. 너는 조국을 찬성하는 거야? 반대하는 거야? 조국 장관의 용퇴를 놓고 예, 아니오로 아군과 적군을 구별했다. 그렇다면 타노스(진보/보수)는 정말 우주에서 꼭 제거해야 되는 악이고, 어벤저스(보수/진보)는 우리를 지켜줄 소중한 영웅들인가?

가령 2020년 현재 내가 더불어민주당에서 20대 여성 퀴어 비건 페미니스트로 정치 활동을 시작한다고 가정해보자. 내가 싸우고 물리쳐야 하는 것은 미래통합당 만이 아니다. 미래통합당을 총선에서 깨부수는 것만이 정치활동의 목적이고 최종적으로 도달해야 할 선 일리는 없다. 아마도 아주 높은 확률로, 여성이기 때문에 당내 반여성적 인사들과 성차별적 제도와도 싸워야 될 테고, 20대 젊은 정치인에 대한 터부와 배제와도 부딪혀야 될 것이고, 퀴어로써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멸시의 시선과도 맞서 이겨내야 한다. 식사와 회식 때마다 스스로 왜 채식을 하는지에 대해서도 주변인들을 설득하고 동의를 구해야 한다.

세상과 맞붙는 전선(戰線)은 외부에 위치한 하나의 절대적 직선이 아니다. 전선은 안팎에 모두 존재하는 모두가 각기 다른 다면(多面)이다.

상대를 제거하면 내가 바라던 세계가 올 거라는 생각은 너무 안일한 데다 피아를 단순화시키는 생각을 심어서, 실제 삶의 문제들을 정확하게 포착하지 못하게 만든다. 어벤저스(타노스)화 된 정치의 대표적인 예 중에 하나가 진보 정치에서는 나꼼수다. 보수세력을 비토하는 나꼼수는 때로 상대를 단기간에 무력화시키는데 효과적이지만, 나꼼수 자체가 정치의 목적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상대의 비리와 거짓말과 허점만을 파고드는 정치적 공격 행위는 미래를 위한 생산적인 담론의 장을 만드는 데는 해가 된다. 이는 상대가 아니다까지는 말할 수 있지만, 왜 꼭 우리여야 하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문재인 정권 3년 차에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정치혐오는 여기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어벤저스들이 수행하는 타노스를 향한 복수와 승리에서 오는 짜릿함과, 김어준이 황교안과 박근혜를 신랄하게 공격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통쾌함의 메커니즘은 허구와 현실의 차이일 뿐이지, 감정의 회로는 거의 같다. 그와 같이 전선을 하나로 집중시키면 상대를 이기는데는 효과적이지만 정치의 당위성이 필요한 현실과는 동떨어진다. 반대로 옹호하는 가치를 어떻게 삶에 구현할 것인가에 집중하면 전선은 복잡다단해지며 현실에 보다 더 밀착하게 된다.

더구나 어벤저스는 너무나 인간 중심적인 서사다. 사실 이 부분은 정말 역겨울 정도인데, 여기서 온 우주의 중심은 인간이다. 어벤저스에는 토르와 같은 아스가르디안 들도 있지만, 사실상 그곳은 생김새는 그대로 백인 사회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가모라와 네뷸라, 맨티스 같은 인물도 있지만 원래의 종족에서 떨어져 나오거나 비중이 적은 예외적인 경우다. (그래서인지 나는 어벤저스 시리즈 중에 유일하게 가오갤만 좋다. 가오갤은 크리스 프랫만 빼면 최고다.) 반대로 타노스가 이끄는 악의 무리들이 어떤 피부색과 어떤 몬스터의 모습을 하고 지구에 쳐들어오는지, 또 어떤 빛깔의 땅과 하늘을 가진 행성에서 살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어벤저스의 묘사와 인물 배분이 얼마나 인간 우월적인 생각에서 나온 설정인지 한숨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역시나 로키 같은 예외가 있지만 말 그대로 예외다.) 따지고 보면 어렸을 적 바이오맨이나 후레쉬맨이 기술적으로 아주 많이 업그레이드된, 약간의 PC함을 양념으로 살짝 첨가한 21세기 버전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실소가 터져 나오는 압권은 엔드게임 마지막에 나오는데, 마블 팬들이 가장 울컥하기도 했다는 장면이기도 한 치즈버거에 대한 오마주다. 온 우주를 구하고 승리에 도취되어 울먹거리며 먹는 것이 치즈버거라니! 아니 치즈버거라고? 대체 어디 가서 누굴 구한 거야? (얼마 전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비건 선언을 했다. 이제 은퇴한 아이언맨은 지구를 구하기 위해 치즈버거를 먹지 않는다.) 물론 인간이 만든 모든 서사는 태생적으로 인간 중심적일 수밖에 없지만, 우주를 위기에서 구출한다는 전지적이고 절대적인 사명을 가진 구도 아래에서 이건 인간 뽕을 맞아도 너무 심하게 맞았다. 또한 마찬가지로 전선을 최소한으로 소거한 결과이기도 하다. 일단 타노스만 처리하면, 모든 작고 사소하고 보이지 않는 문제들은 지워지거나 문제화되지 않는다. 총체적 난국이다. 정말로 눈 앞의 악당만 제거하면 미래는 밝아질까. 인간은 우주 평화에 대해 당당하게 이야기할 만큼 탈인간적 관점을 지니고 있고?

당연하게도, 하나의 영화가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고, 모든 영화가 올바를 필요도 없다. 현실의 시름을 잊기 위해 보는 영화에서까지 그런 생각을 해야 하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영화가 매 분기별로 전 세계 극장가를 도배하고, OTT 서비스를 통해 거실 티비 화면을 차지하고, 수억 명 사람들의 생각을 시나브로 잠식해 들어가고 있다면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봐도 좋지 않을까? 마블의 어벤저스 시리즈는 분명히 어떤 면에서는 세상에 좋지 않다.

그래서 요새 미래한국당이니, 더불어시민당이니, 열린민주당이니 하는 비례연합정당들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른다. 자칭 타노스를 무찌르자는 어벤져스들이 난립하고 있다. 기존의 소선거구제도가 왜 위헌 판결이 나서 선거법을 개정하게 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특히 더불어시민당만 보면 혈압이 위험해지는 것 같은데(열린민주당은 나의 생존을 위해서 생각을 안 하려고 한다), 비례 정당을 만들어놓고 변명처럼 소수자의 정치를 하던 다양한 분들을 비례 순위 상위권에 배치하여 현실정치에 모시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성소수자가 들어오면 불필요한 소모적인 논쟁이 생기니 그런 정당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한 입으로 두 말을 뻔뻔하게 지껄인다. 전선을 다양화하기 위해 만든 제도를 묵사발을 내고 자꾸만 하나로 뭉개버린다. 국민 여러분들께 타노스만 물리치게끔 도와달라고 읍소한다. 그러면 세상이 좋아질 것처럼, 뭐든지 다 될 것처럼 말한다. 이겨봤자 보나 마나 승리의 치즈버거나 처묵할 거면서.

영화든 현실이든지 간에 어딜 봐도 다른 구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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