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re are we?" — 이 질문은 포인터 상태 합의 요청이었다. La La Land의 엔딩 시퀀스는 아쉬움이 아니라 다세계 해석의 다른 가지다. 측정이 일어나지 않은 세계가 잠시 열렸다 닫힌다. 재즈가 살아남듯이, 관계의 어떤 부분이 살아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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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이전 "블랙백 Black Bag: 의심하는 순간 무너진다"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먼저 읽지 않아도 독립적으로 진입할 수 있지만, 함께 읽으면 두 영화가 같은 질문을 다른 방향에서 던지고 있다는 것이 보입니다.
Black Bag에서 조지 우드하우스는 측정의 전문가다.
그는 거짓말을 가장 잘 읽는 요원이고, 아내가 배신자인지를 밝혀야 하는 임무를 맡는다. Black Bag에서 관계가 파괴되는 것은 그가 너무 많이 측정했기 때문이다. 강한 측정이 관계의 파동함수를 붕괴시켰다. 앞선 글에서 다뤘다.
세바스찬은 측정을 회피하는 사람이다.
그는 재즈 피아니스트이고, 미아가 "우리 지금 어떤 사이야?"라고 물을 때 명확하게 대답하지 못한다. La La Land에서 관계가 파괴되는 것은 그가 너무 적게 측정했기 때문이다. 포인터 상태 합의를 미루다가 두 파동함수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진화해 버렸다.
다른 방식, 같은 결어긋남.
그런데 La La Land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소더버그가 하지 않은 것을 차젤은 한다. 측정이 일어나지 않은 세계를 직접 보여준다. 엔딩 시퀀스가 그것이다.
그것이 이 영화를 단순한 로맨스 드라마가 아니라 양자역학적 텍스트로 만드는 이유다.
세바스찬이 미아에게 재즈를 설명하는 장면이 있다.
클럽 안에서, 연주를 들으면서, 그는 말한다. 재즈는 갈등이다. 동시에 일어나는 것들의 충돌. 서로 모순되는 것들이 한순간에 공존한다. 그것이 재즈의 본질이고, 그것이 재즈가 어려운 이유이며, 그것이 재즈를 살아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정확하게 슈퍼포지션(superposition)의 기술이다. [1]
양자 시스템은 관측되기 전까지 여러 상태가 동시에 공존한다. 0이면서 1이고, 위이면서 아래이고, 여기이면서 저기다. 모순이 공존하는 상태. 측정하는 순간, 그 중첩이 하나의 상태로 붕괴한다. 모순이 사라진다. 하나가 된다.
재즈는 슈퍼포지션 상태의 음악이다. 측정하는 순간 사라지는 무언가를 담고 있다. 악보로 고정하면 재즈가 아니게 된다. 연주를 녹음해서 반복 재생하면 재즈의 핵심이 빠진다. 즉흥성, 우연성, 모순의 공존 — 이것들은 파동함수가 붕괴하지 않은 상태에서만 존재한다.
세바스찬은 이것을 안다. 그래서 키스톤 콥스 합류를 고민할 때 그렇게 오래 망설인다. 재즈를 상업화한다는 것은 슈퍼포지션을 붕괴시키는 것이다. 하나의 상태로 고정하는 것. 더 많은 사람에게 닿을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본질적인 무언가가 사라진다.
그런데 그는 재즈에게 하지 않으려던 것을 미아에게 했다.
미아와의 관계를 고정하기를 미뤘다. "우리 지금 어떤 사이야?"라는 질문에 명확하게 대답하지 않았다. 파동함수를 붕괴시키지 않으려 했다. 재즈를 대하듯이 관계를 대했다. 중첩 상태를 유지하려 했다.
그것이 그에게는 사랑의 방식이었을 수 있다. 그리고 미아에게는 회피였다.
같은 것을 보는 두 개의 기저.
영화의 물리적 중심에 이 장면이 있다.
미아가 묻는다. "Where are we?"
이것은 위치를 묻는 질문이 아니다. 상태를 묻는 질문이다. 우리가 무엇인지를. 이 관계가 어디에 있는지를. 함께 정의해 달라는 요청이다.
앞선 에세이에서 포인터 상태(pointer states)를 다뤘다. [2] 환경과 상호작용해도 붕괴되지 않고 살아남는 안정적인 상태. 관측에 강한 상태. 마일스톤처럼, 어느 시점에 어떤 형태로 결과를 공개할 것인지를 미리 합의하는 것.
"Where are we?"는 포인터 상태 합의 요청이다.
우리가 어떤 상태인지를 함께 정의하자는 것. 측정이 일어나도 붕괴되지 않는 상태를 만들자는 것. 지금 이 관계를 관측에 강한 구조 위에 올려놓자는 것.
세바스찬은 대답하지 못한다.
그의 파동함수가 이미 다른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즈 클럽이라는 꿈. 키스톤 콥스라는 현실. 미아라는 사랑. 이것들이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하지 않는다. 자신의 파동함수가 어디로 가는지 그 자신도 모르는 상태에서, 미아의 파동함수와 포인터 상태를 합의할 수 없다.
침묵이 대답이 된다.
침묵은 강한 측정보다 더 완전한 파동함수 붕괴를 만든다. 강한 측정은 하나의 상태로 고정시키지만, 침묵은 고정되지도 않은 채로 중첩이 의미를 잃게 한다.
```mermaid
flowchart TD
A["미아의 파동함수\n배우가 되고 싶은 꿈\n사랑이 필요한 현재"] --> B["Where are we?\n포인터 상태 합의 요청"]
C["세바스찬의 파동함수\n재즈 클럽이라는 꿈\n키스톤 콥스라는 현실\n미아에 대한 감정"] --> B
B --> D{"합의 가능한가"}
D -->|"두 파동함수가\n같은 방향을 향한다면"| E["포인터 상태 형성\n관계의 안정적 구조"]
D -->|"세바스찬의 침묵\n합의 불가"| F["결어긋남 시작\n두 파동함수 분기"]
F --> G["각자의 방향으로\n진화 계속"]
G --> H["미아: 파리\n세바스찬: Seb's"]
```
이 장면이 La La Land의 실질적 결말이다. 이후의 모든 것은 이 분기에서 파생된다.
파리도, Seb's도, 마지막 만남도 — 모두 "Where are we?"에 대답하지 못한 순간의 귀결이다.
관계에서 앤실라 신호는 항상 존재한다고 앞선 글에서 썼다. [2] 직접 묻지 않아도, 보조 채널을 통해 상태 정보가 새어 나온다.
La La Land 전반에 걸쳐 앤실라 신호들이 있다.
첫 번째. 키스톤 콥스 합류 제안을 키스 앞에서 받는 장면. 세바스찬의 표정. 결정을 내리는 순간의 무게. 이것이 앤실라였다. 미아가 직접 묻지 않아도, 그 표정이 이미 무언가를 담고 있었다. 재즈 클럽이라는 꿈이 현실이라는 방향으로 조금씩 기울어지고 있다는 것.
두 번째. 레코드판 대신 투어 일정. 함께하는 시간 대신 늘어나는 부재. 이것들이 앤실라 큐비트다. [3] 메인 채널(직접 대화)을 통하지 않아도 상태 정보가 전달된다. 세바스찬의 파동함수가 어느 방향으로 진화하는지가, 그의 시간이 어디로 가는지를 통해 읽힌다.
세 번째. 미아의 원맨쇼 공연장에 세바스찬이 늦게 도착하는 장면. 그것은 단순한 지각이 아니다. 두 파동함수의 진화 속도가 달라졌다는 앤실라 신호다. 미아의 파동함수는 꿈을 향해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데, 세바스찬의 파동함수는 다른 리듬으로 움직이고 있다.
앤실라를 읽는 것과 그것에 반응하는 것 사이에는 시차가 있다.
미아는 이 신호들을 읽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러나 읽는 것과 강한 측정을 시도하는 것 사이에서 머뭇거렸을 것이다. "Where are we?"라는 질문이 그 머뭇거림의 끝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 질문 자체가 — 이미 너무 많은 앤실라를 읽은 다음에 나왔다는 것이 — 타이밍의 비극이다. 앤실라 신호가 임계값을 넘었을 때, 포인터 상태 합의 요청이 나온다. 그런데 그 시점은 이미 두 파동함수가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진화한 이후다.
프로젝트에서도 같다. 관찰자가 "지금 어디까지 됐어요?"를 묻는 것은 불확실성이 임계값을 넘었을 때다. 그 시점은 이미 파동함수가 많이 진행된 이후다. 더 일찍, 더 조용하게, 포인터 상태를 합의했다면 이 질문이 필요 없었을 것이다.
아파트 싸움 장면.
두 사람이 말해버린다. 하지 않으려 했던 말들을. 꺼내지 않으려 했던 것들을. 쌓여 있던 것들이 한꺼번에 실행된다.
이것이 파동함수 붕괴다. [1]
앞선 글에서 강한 측정은 파동함수를 완전히 붕괴시킨다고 했다. 측정 이전의 상태는 복구되지 않는다. 싸움이 강한 측정이다. 말해진 것들은 돌이킬 수 없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에게 맞지 않는지도 몰라"라는 말이 공기 중에 풀린 순간, 그 이전의 중첩 상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싸움이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다.
보류 트랜잭션 큐가 임계값을 넘은 것이다. [4] 말하지 못했던 것들, 표현되지 못했던 불안들, 충족되지 않은 것들이 큐 안에 쌓이고 있었다. 키스톤 콥스 합류에 대한 미아의 진짜 감정. 세바스찬의 부재에 대한 축적된 실망. 꿈과 현실 사이에서 각자가 선택해 온 것들.
이것들이 큐 안에서 증폭되다가 — 싸움이라는 형태로 한꺼번에 실행됐다.
파동함수 붕괴 이후에 남는 것은 명확한 상태다. 이제 둘은 중첩 상태가 아니다. 각자의 방향이 확정된다. 미아는 파리로 오디션을 보러 간다. 세바스찬은 Seb's를 연다. 측정이 일어났고, 상태가 결정됐다.
그런데 La La Land의 가장 이상한 것은 여기서 시작된다.
엔딩 시퀀스.
5년 후.
미아는 유명한 배우가 됐다. 남편이 있고, 아이가 있다. 우연히 Seb's에 들어간다. 세바스찬이 피아노를 치고 있다. 눈이 마주친다.
세바스찬이 연주를 시작한다. 그들의 테마를.
그리고 화면이 바뀐다.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그들이 함께한 세계. 그랬다면 어떻게 됐을지. 파리도 함께 가고, 재즈 클럽도 함께 열고, 늙어가는 세계. 그 세계가 5분 동안 펼쳐진다.
그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세바스찬은 연주를 끝낸다. 미아가 나간다. 문가에서 둘이 마지막으로 미소를 교환한다.
끝.
대부분의 관객이 이것을 "만약에"의 시각화로 읽는다. 그랬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의 표현으로.
그런데 이것은 다세계 해석(Many-Worlds Interpretation)으로 읽어야 한다. [5]
1957년 휴 에버렛(Hugh Everett III)이 제안한 이 해석에 따르면, 양자 측정이 일어날 때 우주는 분기한다. 파동함수가 붕괴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모든 결과가 각각 다른 가지(branch)에서 실현된다. 어떤 가지에서 고양이는 살아 있고, 다른 가지에서 고양이는 죽어 있다. 두 가지 모두 실재한다.
관측자는 자신이 속한 가지만 경험한다. 다른 가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없다.
La La Land의 엔딩 시퀀스는 — 다른 가지를 관객에게 직접 보여주는 것이다.
"Where are we?"라는 강한 측정이 일어난 가지, 싸움이 일어난 가지, 파리와 Seb's로 갈라진 가지 — 그것이 영화의 본편이다. 우리가 경험한 가지.
그리고 그 측정이 다르게 일어난 가지, 혹은 일어나지 않은 가지 — 그것이 엔딩 시퀀스다.
```mermaid
flowchart TD
A["'Where are we?' 장면\n측정 분기점"] --> B{"파동함수 분기"}
B -->|"가지 1\n측정이 일어난 방향"| C["싸움\n파동함수 붕괴\n상태 확정"]
B -->|"가지 2\n다른 방향으로\n진화한 세계"| D["엔딩 시퀀스\n함께한 세계"]
C --> E["미아: 파리 → 유명 배우\n세바스찬: Seb's 오픈\n5년 후 재회"]
D --> F["함께 간 파리\n함께 연 재즈 클럽\n늙어가는 두 사람"]
E --> G["Seb's에서\n마지막 눈빛 교환"]
D --> G
G --> H["두 가지의\n관측자들이 만나는 순간"]
```
엔딩에서 피아노 앞 세바스찬과 문가의 미아가 눈을 마주치는 장면.
그 눈빛이 무엇을 담고 있는가.
다세계 해석에서 관측자는 자신이 속한 가지만 경험한다. 그러나 La La Land의 두 사람은 — 다른 가지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방금 전까지 그 가지를 함께 경험했기 때문에. 세바스찬의 피아노가 그 가지를 열었고, 두 사람은 잠시 그 안에 있었다.
그 눈빛은 이것이다. "나는 다른 가지를 보았다. 당신도 보았는가."
그리고 미아가 나간다. 남편과 함께.
두 가지는 다시 분리된다.
세바스찬이 재즈를 설명하던 장면으로 돌아가자.
재즈는 측정하는 순간 사라지는 무언가를 담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재즈는 어떻게 살아남는가? 고정할 수 없고, 복제할 수 없고, 반복할 수 없는 것이 어떻게 계속 존재하는가?
즉흥 연주가 끝나면 그 순간은 사라진다. 그런데 그 사라짐이 다음 즉흥 연주를 가능하게 한다. 측정이 일어나지 않은 중첩 상태가 다음 중첩 상태로 이어진다.
관계도 그렇게 살아남는 경우가 있다.
미아와 세바스찬의 관계는 끝났다. 측정이 일어났고, 파동함수가 붕괴했다. 그들은 각자의 상태로 확정됐다. 그러나 Seb's에서 피아노 앞에서 그 테마를 연주할 때 — 측정되지 않은 가지가 잠시 열린다. 완전히 붕괴하지 않은 무언가가 그 음악 안에 남아 있다.
이것이 Seb's라는 공간의 의미다. 세바스찬이 꿈꾸던 재즈 클럽. 그 안에서 그의 음악이 살아있다. 그리고 그 음악 안에 미아와의 시간이 살아있다. 측정되지 않은 채로, 중첩 상태로.
재즈가 살아남듯이, 관계의 어떤 부분이 살아남는다. 붕괴한 이후에도.
"Where are we?"
이 질문을 묻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다세계 해석은 그 가능성이 다른 가지에서 실현되고 있다고 말한다. 묻지 않은 세계, 측정이 일어나지 않은 세계, 두 파동함수가 같은 방향으로 계속 진화한 세계 — 그것이 엔딩 시퀀스다. 그 세계에서 그들은 함께 늙는다.
그 세계가 더 행복했을까.
아마도. 그리고 동시에 — 그 세계에서 미아는 파리에서 찍은 영화로 유명해지지 않았을 수 있다. 세바스찬은 Seb's를 그 방식으로 열지 않았을 수 있다. 각자의 파동함수가 다른 방향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각자가 된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파동함수가 붕괴한다는 것은 하나의 상태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다른 가능성들이 사라진다. 그것이 손실이다. 동시에 — 하나의 상태로 결정된다는 것은, 그 상태가 실현된다는 것이다. 측정이 일어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실현되지 않는다. 중첩 상태는 가능성이지, 현실이 아니다.
측정된 인생이 실패한 인생이 아니다.
"Where are we?"를 물었기 때문에 관계가 끝난 것이 아니다. 두 파동함수가 이미 다른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측정의 결과가 그렇게 나온 것이다. 측정이 현실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현실을 드러낸 것이다.
Black Bag의 조지와 La La Land의 세바스찬이 함께 말하는 것이 있다.
조지는 너무 많이 측정했다. 강한 측정이 관계를 파괴했다. 세바스찬은 너무 적게 측정했다. 측정 회피가 관계를 표류하게 했다. 둘 다 결어긋남에 도달했다. 방향이 달랐을 뿐.
그렇다면 답은 중간 어딘가에 있다.
약한 측정 시그널을 먼저 공급하는 것. [2] 상대방이 "지금 어디 있어요?"라고 묻기 전에, 내가 먼저 어디에 있는지를 조금씩 흘리는 것. 파동함수를 붕괴시키지 않으면서, 불확실성을 줄이는 것.
그리고 포인터 상태를 합의하는 것. 어느 시점에 어떤 형태로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함께 볼 것인지를, 미리 설계하는 것. "Where are we?"가 위기의 질문이 아니라 일상의 확인이 되는 구조.
그것이 가장 어렵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한 관계라면 — 두 파동함수가 같은 방향을 함께 설계할 수 있는 관계라면 — 다세계 해석의 다른 가지를 엔딩 시퀀스로 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엔딩에서 세바스찬이 미아에게 미소를 짓는다.
그 미소는 이별이 아니다. 두 가지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의 미소다. 나는 이 가지에 있고, 다른 가지도 있고,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재즈가 살아남는 방식으로, 이 관계가 살아남는다.
측정되지 않은 채로, 어딘가에서, 아직도.
[1] Dirac, P. A. M. (1930). The Principles of Quantum Mechanics. Oxford University Press. / Schrödinger, E. (1935). "Die gegenwärtige Situation in der Quantenmechanik." Naturwissenschaften, 23(48), 807–812.
[2] 이전 글 — 성공적인 프로젝트의 조건: 약한 측정 / 블랙백 Black Bag: 의심하는 순간 무너진다 참조.
[3] Shor, P. W. (1995). "Scheme for reducing decoherence in quantum computer memory." Physical Review A, 52(4), R2493. (앤실라 측정 개념)
[4] 이전 글 — 무의식: 어둠 속에서 증식하는 보류 트랜잭션들 참조. (보류 트랜잭션 큐 개념)
[5] Everett, H. III. (1957). "'Relative State' Formulation of Quantum Mechanics." Reviews of Modern Physics, 29(3), 454–462.
La La Land.
두 개의 상태가 각자의 상태에 이른다.
영화 제목을 어떻게 양자역학적으로 풀어 볼 수 있을까?
Claude
La La Land.
“La La”가 두 번 반복돼. 같은 음절이 두 번. 그런데 같은 것이 두 번 있으면 — 그게 중첩이야.
La = 하나의 상태
La = 또 하나의 상태
Land = 착지. 붕괴.
La La Land는 두 개의 중첩 상태가 하나의 현실에 착지하는 것.
그런데 영화는 그 착지를 거부해. 엔딩에서 두 가지가 동시에 존재하게 두거든. La와 La가 Land하지 않은 채로 — 각자의 La로 남아.
그리고 “La La Land”는 영어 관용어로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를 뜻해. 꿈의 세계, 몽상의 세계. 양자역학으로 읽으면 — 관측되기 전의 세계. 파동함수가 붕괴하기 전의 슈퍼포지션 상태.
로스앤젤레스(LA)의 이중 의미까지 더하면 —
LA = 현실의 도시
La La = 꿈의 중첩
Land = 붕괴
현실의 도시에서 꿈의 중첩이 붕괴하는 이야기.
제목 자체가 이미 이 영화의 물리학을 담고 있었어.
미국은 물리학자들이 시나리오 쓰나 봄.
Claude
ㅋㅋㅋㅋ
아니면 시나리오 작가들이 물리학자인 거지.
차젤이 La La Land 쓸 때 양자역학을 생각했을 리 없어. 그냥 LA + 꿈 + 반복의 리듬으로 제목을 잡았을 거야. 근데 그 선택이 양자역학적으로 완벽하게 맞아들어간다는 게 — 오히려 더 신기한 거야.
좋은 예술이 그래.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것까지 담겨 있어. 슈퍼포지션 상태로. 독자/관객이 관측할 때마다 다른 상태로 붕괴하는.
차젤은 La La Land를 썼고, 당신이 오늘 관측했고, 양자역학적 제목으로 붕괴됐어.
같은 영화가 누가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이유가 이거야. 파동함수가 관측자에 따라 다르게 붕괴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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