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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독 7일 차] 자기 행동의 선택권, 고요한 단독자

빅터 프랭클 <죽음의수용소에서>, 은유 <해방의 밤>

by 윤서린

새벽독서 7일차, 두시간 자다가 새벽 12시 반에 깨서 날을 샜다.

책을 읽었냐고? 아니다.

거실에 위치한 내 놀이터 (8인용 식탁) 자리를 옮겼다.

4남매가 크니 여섯식구가 한자리에 모여 밥을 먹는 시간이 거의 없어서 식탁을 내 책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혼자만의 놀이터가 너무 커서, 혼자 은밀히 놀고 싶어서, 다른 식구들 눈에 덜띄게 거실벽 구석으로 밀어놓았던 책상이었다. 하지만 새벽에 책상을 거실 바라보는 방향으로 떡하니 옮겼다.


구석에 숨어서(사실 내가 숨는건 아니지만 애들이 내가 거실에 있는걸 잘 모른다) 책을 읽지 않아도 된다.

새벽독서를 시작하면서 오전 5-8시까지 책을 읽고 브런치 글을 쓴다.

거실이 내 전용 도서관이자 카페이자 작업실이다.


내 방이 없으면 어떤가.

거실 전체가 내 방이다.

내 방이 곧 내 창작 놀이터다.


오늘도 독서처방은 읽어야할 책,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읽고 싶은 책 은유 <해방의 밤>이다.

당분간은 이 두 책으로 새벽독서가 이어진다.


날을 샜더니 허기가 진다.

미역국 한사발 들이키고 <죽음의 수용소에서-무감각의 원인>부분을 읽어본다.



작가는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보냈던 체험을 이야기하며 "내가 보낸 시간 중에서 가장 목가적이었던 시간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헛소리를 하거나 잠을 자고 있는 한밤중이었다"(주1)라고 말한다.


고된 노동과 배고픔, 수면부족으로 무감각해진 감각을 일깨우려는 작가는 발진 티푸스 환자들 위해 막사 안에 불을 피우며 이런 자기만의 시간을 확보한다.


나에게 허락된 목가적 시간은 언제인가?

바로 지금, 초 하나 켜고 떠오르는 태양을 기다리며 새벽독서하는 시간.

곧 날이 따뜻해지면 동네 하천을 다시 산책할 수 있겠지. 백로랑 천둥오리가 물가에 노니는 모습을 바라볼 시간이 기다려진다.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가 갈 수 없다는 것이다."(주2)


"척박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주3)

맞다. 환경을 탓할 시간에 그 환경 속에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태도로, 어떤 사고로,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갈지 고민해보자. 이 모든 것이 나의 선택에 달렸다는 사실을 잊지말자.


꾸벅꾸벅 졸음이 온다.

새벽 5시부터 줌으로 독서모임하는 작가님들의 에너지를 받아 6시 반까지 졸다 읽다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역시 나이드니 날새는건 힘들구나.


은유 <해방의 밤- 자취선언>을 읽는다.

가족을 이뤄야 살아지는 줄 알아서 스물두살에 결혼했다는 작가는 "나는 왜 열차에서 열차로 환승하듯 가족을 떠나 바로 가족으로 옮겨 탔을까" (주4) 질문한다.


그 질문은 나에게도 통하는 질문이다.

그러게... 난 왜 그 열차가 행복으로 가는 KTX라고 착각하고 털컥 올라탔을까? 그 안에 고된 시아버지 시집살이가 내 옆자리에 버티고 앉아있는 줄도 모르고.


물론 지금은 20년만에 내가 그 자리를 박차고 다른 칸으로 옮겨 이제야 겨우 창밖 풍경을 볼 수 있게 됐다.

아르바이트도 시작하고 화실에도 나가고 사람들도 만나고. 이렇게 책도 읽고 글도 쓰게 됐다.


세월 참.. 빠르게 흘렀다. 24살에 시집 와서 나는 어느덧 48살.

한참 애들과 시부모님한테 독립하고 싶은 나이.

(남편은 딱히 나를 구속하지 않아서 나중에 같이 살 수도 있다. 나는 시골에서 살고 싶다고하고 남편은 도시가 좋다고하니 어쩔수없이 10년후에는 나 혼자 독립할 수도 있을지 모륻다. 야호?!)



은유 작가도 "자취 선언"을 하고 선배의 작업실에서 일주일에 사나흘씩 머무는 '간헐적 자취'를 하며 숨통을 틔이고 있다고 한다. 인간에게 마땅히 필요한 '고요한 단독자'의 시간을 늦게나마 살아보고 싶어서.

그런데 그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자유 비용'이 든다고 말한다.

재수하는 수험생 자녀옆에서 밥을 제대 못챙겨준다는 죄책감이라는 비용.


"아버지가 세계에 나아가 해야만 하는 일들을 할 때, 우리는 그게 아버지가 응당 해야 할 몫이라며 용인한다. 어머니가 세계에 나아가 해야만 하는 일을 할 때는 어머니가 우리를 버렸다고 느낀다" (주5)


데버라 리비의 이 문장을 읽으니 갑자기 '맞네 맞아. 왜 여성에게만 그런 잣대를 들이대는거야' 나도 모르는 울분이 터진다. '여성이 경제활동을 하면서 살림도 잘하고 육아도 잘하는게 왜 당연하고 그렇지 못하면 왜 지탄받아야하지? 왜 온전히 "나"로서 존재하는걸 부정 당하는거지?' 이런 현실이 슬프다.


온유 작가는 말한다. " 쓰는 삶"이 우리를 "자유 방향"으로 데려다 줄 것이라고.

"쓰는 삶"

나를 자유롭게 해줄 그것을 위해 거실의 한 복판에 내 글쓰기 놀이터의 깃발을 당당하게 꼽는다.


주1>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청아출판사 p105

주2> , 주3>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청아출판사 p109

주4> 은유 <해방의 밤> 창비 p40

주5> 데버라 리비 <살림 비용> 플레이타임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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