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은 언제나
타인의 삶의 무게를 측정하기란 불가능하지만 사람들은 그 행위를 너무나 쉽게 했고, 종종 재단에 이르렀다. 타인의 절실함을 허명에 대한 갈망으로 단정 짓기도 쉬웠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이 허명이라면 나는 기꺼이 그것을 좇을 것이었다.
각별한 사정 없는 이 없고 하나둘 그러기 시작하면 너도나도 예외에 속할 권리를 얻고 마니까요.
어둠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 같았고 가장 깊은 암부에는 소실점이 있을 것만 같았다. 사라지는 지점이라니, 지금의 자신이 가장 원하는 자리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미온은 구멍에 손을 넣었다.
당신들도 모를 리 없다, 사소한 선의를 실천하기 위해 한 사람이 받는 정신적 고통과 물질적 손해가 결코 작지 않음을.
거리에서 데이트폭력을 당하는 여자를 구해줬더니 그전까지 연인 사이에 오갔던 폭력마저 혼자 뒤집어쓰고 고소당하는가 하면, 처참한 교통사고의 증인을 서주려 했다가 경찰서에 끌려가 장시간에 걸쳐 갖은 취조를 당하는 동안 내가 가해자인지 목격자인지 헛갈리게 되어버리는 사례를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가능성을 고려해가면서까지 나로선 최선을 다했고, 필요하다면 조금 더 할 의향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가 당신들에게 이렇게까지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누군가가 한 존재를 책임진다는 것은 그러한 일이다. 옆자리를 나눈다는 행위는 그 자리가 비어 있다고만 해서 가능한 일이 아니다.
비로소 두 사람은 뭔가 일이 잘못되었음을, 단지 침묵을 유지하고 손해를 일으키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존재를 서로가 서로에게 떠넘기며 어디의 무엇인지조차 알아보지 않으려 했던 털 뭉치의 정체가 실은 지극히 조용한 침입자 임을 알아차린다. 그러나 아무래도 상관은 없을 것인데, 이렇게 목전에 구체화되는 경우가 흔치 않다뿐 내 밖에 있는 나 아닌 모든 것은 나에 대한 침입자이기 때문이며 그것의 내면에 무엇이 들었거나 말았거나 어떤 사연이 얽혀 있는지는 물론 어떤 경로를 통해 여기 도달했는지도 관심 가질 까닭은 없었고, 문제라면 그것이 그 자리에 조용히 머물러주면서 가능한 한 내게 고통과 불편을 덜 줄 것인지의 여부일 뿐이다.
우리는 인간인데 어째서 오랜 지배와 구속에 길들여진 짐승처럼 어느새 나를 때리는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반응하고 꼬리를 흔들거나 내리게 되었을까. 그러니 너희들은 더더욱 짐승 취급을 당해도 된다며 누군가들은 의기양양하게 돌을 던질 텐데.
그런데 어디까지 가야 그 길이 내가 가려던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사람은 알게 되는 거죠? 어디까지 갔을 때 사람은 자신의 심연에서 가장 단순하며 온전한 것 하나를 발견하고 비로소 되돌아올 여지를 찾을 수 있거나, 아니면 되돌아올 길이 없어 그대로 다리 아래로 몸을 던져버리게 되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