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베키스탄 전쟁기념관 건립 자문 출장기
지평선을 달렸다. 끝없이 펼쳐진 목초지와 목화밭 사이로 우리는 티무르 제국의 심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익숙한 이름 그러나 낯선 나라,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Tashkent에서 남쪽을 향해 자동차로 8시간을 달려 국경 근처의 작은 도시 카르시Qarshi에 도착했다. 그 곳에서는 우즈베키스탄 전쟁기념관의 건립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전화, 그리고 출장
2018년 2월 20일 오전,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서울시 국제협력관실 주무관이었다. 우리나라 전쟁기념관을 방문했던 우즈베키스탄 외교관이 본국 대통령에게 전쟁기념관의 건립을 건의했는데 현지에는 전문가가 없으니 한국으로부터 자문을 구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전쟁기념관 건립에 대한 현장자문을 맡기로 한 필자는 당시 학예부장이던 김대중 박사와 함께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초청장을 가지고 3월 13일 오전, 타슈켄트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국대사관의 권용우 대사는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대한민국을 국가개발의 롤모델로 삼아 다양한 분야에서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고 있다며 양국 관계의 건설적 발전을 위해 적극적인 협조를 부탁했다. 그러나 현장으로 가는 여정은 쉽지 않았다. 자동차는 포장이 드러난 길 위에서 쉴 새 없이 덜컹거렸고 통역관인 엘도르는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끊임없이 말을 걸어왔다. 서울을 떠난 지 25시간이 지나서야 우리는 기나긴 하루를 마무리 할 수 있었다.
무엇을 위한 전쟁기념관인가?
다음 날 아침 카슈카다리아Qashqadaryo 주청사에서 부지사와의 면담을 마치고 공사현장을 방문하여 건축가를 비롯한 십여 명의 관계자와 첫 회의를 가졌다. 연초에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으로부터 제2차 세계대전 전승기념관 건립에 대한 지시가 내려진 후, 2월에 이미 공사를 착수한 상태였다. 약 4개월의 공사기간동안 약 7만㎡ 규모의 애국공원을 조성하고 그 안에 전쟁기념관과 야외전시, 어린이 체험시설 등을 신축하는 사업이었다. 예정된 준공식은 제2차 세계대전 대독전승일인 5월 9일이었다. 그러나 준비된 도면은 배치도와 시설별 조감도 정도가 전부였고 현장에서는 건축가인 총감독의 구두 지시에 의해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무리한 일정이었고 납득하기 힘든 여건이었지만 우리나라도 1971년에는 공주에서 무령왕릉의 발굴을 17시간 만에 끝낸 사례가 있으니 개발도상국이 겪는 과도기적 현상으로 이해하자고 생각하였다. 부족한 경험과 준비상태, 짧은 공사기간 등 여러 악조건 속에서 그들에게는 당장 무언가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자문내용은 명확한 건립방향의 설정과 그에 따른 설계·연출의 두 분야에서 이루어졌다. 우선 전쟁기념관을 건립하려는 목적을 설정하고 그에 따라 관람객들에게 전달할 메시지를 정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신설되는 전쟁기념관의 주목적이 전쟁에 대한 기억인지 또는 참전자에 대한 추모나 명예 고양高揚인지를 먼저 결정하고, 이에 따라 설계와 연출의 방향을 정해야 한다. 가장 큰 문제는 기념관 안에 전시될 콘텐츠에 대한 검토를 거치지 않은 채 건물 설계를 마치고 공사에 착수했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전시하고자 하는 유물과 조형물의 종류와 크기에 대해 빨리 검토하고 이를 설계에 반영하도록 조언하였다. 이를 위하여 유물과 관람자의 동선 등 공간계획을 검토하여 전시실과 편의시설의 위치를 재조정하고 통로의 폭과 층고層高를 조정하였다. 적정 수용인원의 기준도 총면적을 단일 계수로 나누어 산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각 시설과 공간별 수용인원을 별도로 산정하고 이를 합산하도록 권고하였다.
제국의 추억, 아미르 티무르
몇 차례에 걸친 토의에서 우즈베키스탄 관계자들은 입을 모아 ‘티무르Timur’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14세기에 사마르칸트Samarkand를 수도로 삼고 제국을 건설했던 티무르는 몽골계 부족출신의 천재적인 군사 지도자로서 인도 북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중국 신강新疆지역 등을 점령하고 이란, 이라크, 러시아 흑해연안, 시리아를 넘어 현재 터키의 영토 대부분을 정복하였다. 심지어 1402년 앙카라전투에서는 오스만제국의 4대 술탄인 바예지드 1세를 포로로 잡기도 하였다. 그는 평생 단 한 번도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칭기스 칸Genghis Khan의 후손이 아니었던 티무르는 몽골의 전통에 따라 칸Khan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못하고 대신 페르시아어로 사령관 또는 왕이라는 뜻의 ‘아미르Amir’ 또는 ‘에미르Emir’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은 지금도 티무르를 “아미르 티무르Amir Timur”로 부르며 국가적 영웅으로 받들고 있었다. 카르시 현장에서 관계자들은 무패의 군주 티무르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전쟁기념관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조국의 모습을 그려내고 싶어했다.
우리는 티무르에 대한 자료를 추가로 수집하기 위해 그의 고향인 샤흐르샤브즈Shahrisabz와 제국의 수도였던 사마르칸트Samarkand를 방문했다. 사마르칸트는 동서양의 중간 지점으로 실크로드의 중요한 교역지였으며 삼국시대 한국인 사절의 모습이 벽화에서 발견될 정도로 정치·경제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제일 먼저 우리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티무르의 동상이었다.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쉬켄트 중심가에서 보았던 거대한 티무르의 동상은 그 형태를 달리한 채 고도 사마르칸트에도, 샤흐르사브즈에도 있었다. 티무르는 국가적 영웅으로서 우즈베키스탄의 국가 정체성의 상징물로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우즈베키스탄의 티무르 숭배에는 정치적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되자 사마르칸트 출신의 정치인 이슬람 카리모프Islom Karimov는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고 이후 개헌과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직을 종신직으로 변경하여 2016년 사망할 때까지 대통령직을 유지했다. 카리모프 전 대통령은 자신의 고향이 티무르 제국의 수도였다는 점에 착안하여 티무르를 통하여 지도자로서 자신의 이미지를 강화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500여 년 전에 티무르 제국을 멸망시킨 장본인이 바로 우즈베크Uzbeks인들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현재 우즈베키스탄에서 추앙받는 티무르의 위상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역설은 우리 역사를 보더라도 낯선 일은 아니었다. 고려의 신하로 충절을 지킨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는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서 역적으로 단죄되었다가 훗날 그를 죽인 태종에 의해 다시 신원되고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새 왕조의 안정을 위해서는 왕권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고 이는 신료들의 절대적인 충절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고려왕조에 대한 의리를 지킨 정몽주는 조선에서도 충의의 표상으로 재평가 되었던 것이다.
현재의 여러 논란을 떠나 티무르는 아시아 역사에서 손꼽히는 강력한 군주였으며 현재 우즈베키스탄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역사적 인물로 남아있다.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티무르 대왕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승리의 역사를 기억하고 국민을 하나로 단결시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었다. 다만 전제군주 티무르의 이미지와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라는 이질적인 주제를 하나의 전쟁기념관에서 녹여내기 위한 고민은 이후에도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에필로그
6박 8일의 일정.
14시간의 비행시간.
지상 이동거리 약 1,330km.
다섯 번의 현장조사와 여섯 번의 회의.
끊임없이 질문을 해오는 그들의 열정에 우리는 모든 지식과 경험을 쏟아 돕고자 하였다.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때로는 필담으로, 때로는 가능한 모든 언어를 사용해 소통하였다. 나중에 뉴스를 통해 알게 된 바로는 전쟁기념관, 양궁장, 암벽등반장, 수공간 등을 갖춘 반탄파르바를라르Vatanparvarlar공원이 최초의 계획보다 7개월이 늦어진 2018년 12월 14일에 개관하였고 샤브카트 미르지요예프Shavkat Mirziyoyev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이 방문하여 시설을 둘러보았다고 한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미르지요예프 대통령은 전쟁기념관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많은 어린이들 대상으로 교육을 해야 할 것이며 젊은 세대에게 제2차 세계대전 승리에 기여한 우즈베키스탄의 역할과 평화를 위해 싸운 동포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전쟁기념관의 건립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우즈베키스탄은 변하고 있다. 실크로드와 티무르의 나라, 그리고 구 소련의 일부로 알려졌던 우즈베키스탄은 과거를 딛고, 미래를 향해 변화하고 있었다. 짧은 출장기간동안 나누었던 우리의 경험이 그러한 변화에 도움이 되었기를 바란다. 어느 저녁, 노을에 빨갛게 물든 지평선을 뒤로한 채 수줍게 미소 짓던 통역관 엘도르의 까만 눈동자가 떠오른다.
* 이 글은 2018년 〈전쟁기념관〉 5월호(vol. 148)에 실린 「티무르 제국의 후예 ‘우즈베키스탄’ - 우즈베키스탄 전쟁기념관 건립자문을 떠나다」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일부 수정하고 이후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2021. 1.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