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해지 혹은 일방적 파기 그 사이

by 큐레이터박


“A 어디까지 진행됐지? 실제 하드웨어에 올려서 보여줘요.”

대표님, 디자인 실장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있는 회사 메신저 대화방에 대표님의 메세지가 올라왔다.


A는 디스플레이 패널(월패드)를 통해 집 안의 환경을 제어하고 필요 정보를 제공하는 제품이다. 과거 가전제품, 전자기기 등에 인터넷이 연결되어 on-off를 휴대폰으로 하는 등 가전 기기를 제어할 수 있는 서비스들이 인기를 끌기 시작할 때였다. 당시 우리 팀은 집 안의 월패드 안에 들어가는 서비스를 만들고 있었고 나는 그 제품의 PO(Product owner)였다.


대표님의 호출이 있자마자 디자인 실장님과 둘만의 대화방이 열렸다.

"갑자기 대표님이 왜 보자고 하는지 아세요?"

"모르겠는데.. 이 제품엔 별로 관심이 없었잖아요."

갑작스런 관심의 이유야 모르겠지만, 까라면 까는 회사원인 나는 대표의 부르심에 맞추어 A 제품의 개발 진행 상황과 출시 이후 계획을 담은 문서를 업데이트하기로 했고, 디자인 쪽에서는 지금까지 완료된 버전을 협력사 제품(하드웨어)에 올려 시연을 준비하기로 했다.


우리는 2년 전 한 하드웨어 제조사와 협력 관계를 맺었다. 이 회사는 아파트 안에 들어가는 월패드 기기를 공급하는 회사였고, 우리는 월패드 안에 구동되는 서비스를 만들기로 했다. 이 월패드는 신축 아파트 단지 3천 세대에 설치되기로 했다. 그리고 그 타 건설사와도 접촉 중이었다. 1만 세대에 서비스가 들어간다한들 이전의 모바일 서비스에 비하면 미미한 숫자이지만, 서비스 환경이 휴대폰을 넘어서 아파트의 거실로 이동하는 중요한 도전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 다음날 대표님 회의실에 앉았다. 내가 노트북 잭을 연결하며 대표님에게 보고할 장표를 띄우려는데

“제품부터 봅시다.” 대표님이 말했다.

디자인 실장이 하드웨어 기기에 전원을 급하게 연결했다. 화면을 로딩하는 데 필요한 얼마간의 시간 동안 나는 제품 개발 진행 상황을 설명하기 재빠르게 브리핑하며 썰을 풀기 시작했다. “개발 일정에 차질 없고, 협력사의 하드웨어 생산에도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초기 확보된 3천 세대 물량 외에 타 브랜드 아파트에 들어가는 것도 논의 중인데, 긍정적인 곳들이 많습니다.” 그 사이 디스플레이 장비 세팅이 완료되었다.


“컬러가 선명하지가 않아..”

“베젤(디스플레이 제품의 테두리 부분)도 너무 두껍고”

“터치감도 그대로네”

대표님의 삐딱한 평이 있었으나 디자인 실장은 지지 않았다. 휴대폰만큼 해상도가 좋지 않아도 아파트에 들어가는 홈 디스플레이 중엔 최고 선명도를 나타내는 장비라고 설명하는데, 대표님은 별 대꾸를 하지 않고 음성 인식 기능을 테스트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끼어들 수 없는 시간이었다.

ooo아.(디바이스를 부르는 프로젝트명) 잽싸게 인식해라. 제발제발...

나즈막히 주문을 외웠다. 회의실에는 대표의 음성인식 호출어가 떠돌았다. 다행히 기기는 기존 테스트 결과만큼 그저 그렇게 인식했고, 설계된 답변을 내놓았다.


그때 갑자기 대표가 나를 바라봤다.

“이 업체랑 계약 해지하면 어떻게 되지?”

“….? 네에….? 해지요?”

"우리 이미지랑 너무 안 맞아. 하드웨어 사양이 안 좋아서 이렇게 나가면 안 될 것 같아. 홈 디스플레이에 들어가는 게 맞는지 다시 생각해봤으면 하는데… 음성인식율도 떨어지고.."

대표님의 입에서 이해할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여러 단어들이 스쳐지나갔지만 ‘해지’라는 단어가 깊숙히 자리를 잡았다. 다른 말은 들리지 않았다.

아니, 해지요? 컬러가 선명하지 않고 베젤이 두꺼워서 해지를 한다고요? 해지 사유가 된다고 생각하세요? 이건 해지가 아니고 파기에요. 일방적 파기... 다 떠나서 출시가 내일모레인데 이제와서요….?

대표님에게 이렇게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겨우 몇 마디를 내뱉었다.

“해지가 가능할지 모르겠어요. 저희의 일방적 계약 파기라 손해배상 요청을 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제 출시 직전인데…”

“계약 해지했을 때 발생할 수 있을 리스크를 정리해 봐요, 이렇게는 못 내보내겠어”


그렇게 회의는 끝이 났다. 자리에 돌아와 협력사와 맺은 계약서 파일을 열었다. 계약서엔 양사의 의무 부분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계약서의 내용을 채우기 위해 보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우리는 협력사에 하드웨어 사양을 최고로 맞춰달라고 요청하면서 우리의 의무는 상대적으로 줄이고, 또 우리의 권리는 많이 챙기기 위한 지난한 협상의 시간을 보냈다. 그 줄다리기 과정이 쉽지 않았으나 공동의 성공을 꿈꾸는 관계였다. 이게 성공하면 여기도 영업하고 저기도 영업하겠다고 하는 협력사 대표님의 목소리도 귓가에 아직 남아 있었다.


계약서의 마지막 즈음에 해지와 관련한 조항이 있었다. 통상적인 조항이라고 생각해서 법무팀이 만들어준 내용 그대로 들어가 있었는데, 유심히 다시 읽어보았다. 일방의 계약 파기에 대한 내용은 없었고, 손해를 끼친 당사자가 그 손해를 보상해야 한다는 말만 있었다. 당연하다. 계약 파기의 상황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더군다나 계약 파기의 주체가 우리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바로 법무팀에 전화를 했다. 법무 검토 의견서를 요청하기 전에 구두로 의견을 먼저 듣고 싶었다. 법무팀 변호사는 일방의 해지에 대한 손해배상액은 상대가 부르는 만큼에서 시작할 것이라 했다.


우리에겐 시간이 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늘 수록 손해배상액과 갈등은 커질테니까. 곧장 대표님 자리로 찾아가 회의 테이블에 앉았다. 손해 배상 금액이 꽤 클 수 있음을 얘기했다. 이래도 계약을 파기하시겠냐는 의미를 담았지만, 대표는 협력사에서 손해 배상 금액을 얼마나 부르는지 알아보라고 했다. 손해 배상 금액을 알아본다는 것은 계약을 해지할 가능성을 상대에게 알린다는 것이었다. 회사대 회사의 업무상 계약서에 미사여구처럼 들어가 있는 '신의성실'은 순간 와장창 깨지게 된다. 즉, 돌이킬 수 없음을 의미했다. 이 프로젝트는 지금부터 중단을 선언, 종료의 길로 들어선 것이었다.


이제와서 돌아보면 대표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프로덕트 중 오점이 될만한 것을 지워버린 의사결정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있었음 조차도 잊혀졌을 것이다. 하지만 사업 책임자이자 PO였던 나는 상당히 힘든 시간을 보냈다. 이해가 안되는 상위 의사 결정을 내 언어로 해석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외웠다. 난 회사원이니까. 그러나 어제까지 잘해보자며 으쌰으쌰하는 관계에서 돌연 서로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시시비비를 가르는 관계로 돌변했다는 것에서 불쑥불쑥 마음이 욱신거렸다.


그 이후 절차와 결과는 생략하기로 한다. 참고로 이 글은 상당수 허구이다. (제품도, 회사의 체계도, 의사 결정 시점이나 과정도 모두 다르다. 사실을 가리기 위해 양념이 과하게 가미되었음을 밝힌다.) 그럼에도 회사 내부 상황을 유추할 수 있으니 더 자세한 뒷얘기는 줄여야겠다.




지금의 나는 다른 곳에서 사업개발과 제휴 업무를 하고 있다. 오랜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쌓이면서 진기하고 더러운 일들을 많이 겪었지만, 이때의 경험은 여러모로 충격적이었기에 깊이 박혔고, 덕분에 배운 것이 있다.


1) 우선 외부와의 계약 날인을 앞두고 예전보다 더 많은 검토의 시간을 보낸다. 특히 상사와의 의견 일치에 지겹도록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이 계약의 의미와 영향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고, 상사가 우려하는 부분이 있다면 사전에 끌어내려고 노력한다. 물론 모든 상사는 자신의 위치와 처지가 바뀌면 다른 소리를 할 수 있지만..


2) 계약 파기의 가능성은 언제든 생길 수 있음을 알고 준비하게 되었다. 그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사전에 다양한 가정을 해보고 계약 해지/파기/손해배상과 관련한 조항을 꼼꼼히 살펴본다. 물론 우리가 파기하느냐 상대가 파기하느냐에 따라 입장이 달라지겠지만 그 조항을 쉬이 넘기지 않게 되었다.


3) 그리고 또 얻은 것이 있다면 계약 과정에서의 여러 당사자들과의 갈등에 있어 굳은살이 생겼다는 것.


회사 생활을 통해 우린 월급도 받지만, 뭐라도 배우기 마련이다.

(물론 이렇게까지 힘들게 배울 필요가 있는 일인가 싶긴 하지만)

다 Lessons learned로 포장해야 견뎌지는 것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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