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 숨어버린 반려묘... 집사라면 위급 상황에 잘 대처하는 법도 배워야
"위잉위잉."
조용한 새벽, 화재경보기가 울렸다. 집에 화재경보기가 어디 있는지도 몰랐다. 소리에 깨어보니 침대 바로 위, 네모 모양의 화재경보기가 뿜어대는 빨간 빛이 새하얀 벽을 채우고 있었고, 경고 소리가 퍼졌다.
"화재가 일어났습니다. 지금 당장 건물 밖으로 나가주시길 바랍니다."
침대에서 번쩍 일어나 휴대전화와 지갑을 들고 나섰다. 현관문을 열고 복도에 나오니 나처럼 허겁지겁 나서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계단으로 내려갔다. 우선 움직여야겠다는 마음에 10층에서부터 1층까지 내려갔다.
건물 밖으로 나가니 많은 사람이 서성이고 있었다. 119에 신고하는 사람과 넋이 나간 사람들, 그리고 화재경보기 소리가 컸던 탓인지 주변 빌라에서 나온 사람도 있었다. 119가 올 때까지 다함께 밖에 서 있는 동안 나는 사람들의 표정보다 그들이 안고 있는 강아지들에 눈길이 갔다. 내가 사는 건물에 이렇게 많은 반려동물이 살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강아지들은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벌벌 떨고 있었다. 나도 놀랐는데 이 강아지들은 얼마나 무서웠을지 마음이 아팠다.
잠시 후, 119 구급차가 왔고 소방대원들은 건물의 시설 내부를 살펴보더니 오작동이라고 말해주었다. 안도하는 마음이 드는 한편 불안한 마음을 안고 집에 들어갔다. 화재경보기의 소리와 빨간 불빛, 사람들의 표정, 강아지의 벌벌 떠는 모습들. 그 모든 것들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화재경보기는 몇 번이나 오작동을 했다. 그게 계속되다 보니 주민들은 화재경보기가 울려도 나서지 않게 되고, 그러다 주민들이 엘리베이터에 포스트잇을 부착하는 등 강하게 문제제기를 한 후, 다행스럽게도 개선되었다. 건물 관리자가 입장문을 게시했고 오작동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8개월이 흘렀다.
그동안 1인가구로 살던 내게 고양이 '참깨'라는 가족이 생겼다. 참깨의 시선에 우리 집은 어떨까. 무서운 곳은 없을까. 인터넷 검색의 힘으로 참깨를 데려오기 전, 캣폴과 방묘문을 설치하고 인덕션 커버를 준비하는 등 집을 안전한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참깨와 많은 시간을 보내며 참깨에 대해 알아가고, 참깨의 눈높이로 우리 집을 재구성해보기 시작했다.
참깨는 길고양이 출신답게 내 상상 이상이었다. 참깨는 설치해둔 방묘창을 영차영차 쉽게 올라갔다. '이정도로는 부족해!'라고 내게 알려주듯이 말이다. 더 높게 방묘창을 설치하며 창문을 맘편히 활짝 열 수 있게 되었다. 참깨가 작은 우리집에서 그럼에도 더 많은 햇볕과 바람을 느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화재경보기가 또다시 울렸다. 지난 조치 이후, 한동안 울린 적이 없었기에 지금의 상황이 '오작동'이 아닐 거란 확신이 들었다. 빨간 불빛과 경고음을 듣고 황급히 일어났다.
참깨 역시 지금의 상황이 무서웠는지 이곳저곳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화장실로 휘리릭 도망가다가 다시 나왔고, 그러다 침대 밑에 있는 짐들 사이로 몸을 숨겼다. 어서 이 집을 나가야겠다는 마음에 참깨를 잡으려 하는 찰나, 화재경보기의 소리가 멈췄다. 오작동일까.
오 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 화재경보음이 다시 윙윙 울렸다. 숨어있을 곳을 찾아 마구 뛰어다니던 참깨는 침대 아래 있는 짐들 사이로 들어가 어떠한 기척도 보이지 않았다. 침대 아래 짐들은 너무 많았고, 빼려고 해도 다급한 내 마음 때문인지 침대 아래 보이지 않는 턱에 짐들이 껴서 나오지 못했다. 깊숙한 저 틈새에 참깨가 있는데 전혀 보이지 않았다.
화재경보음은 멈추지 않았고 마음은 더 급해졌다. 집을 나서려면 참깨를 데려가야 하는데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지난번, 급히 집을 공사하게 되었을 때도 참깨는 이렇게 침대 밑으로 몸을 숨겼다. 너무나도 똑같은 상황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러나 또 다시 반복된 상황에 나는 내게 너무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 일을 겪고도 침대 아래를 그대로 두면 어쩌자는 거냐, 조혜민.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뒀어야지!!!' 참깨를 계속 불렀지만 나오지 않았다. 후다닥 도망가는 참깨의 모습에서 나는 참깨의 두려움, 무서움을 느낄 수 있었다.
빨간 불빛과 쨍한 기계음이 집안을 채웠고, 나는 침대 옆에서 참깨를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복도로는 사람들이 오가는 소리들이 들렸고, 나는 그저 오작동이기만을 간절히 바라면서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참깨를 두고 나간다는 건 정말 말이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화재가 발생한 게 맞다면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이란 무엇일까. 고민했지만 끝내 답을 찾지 못했다. 그렇게 십여 분이 흐르고 다행스럽게도 화재경보기 소리는 멈췄다. 복도에는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오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괜찮은 건지 복도를 두리번거릴 수 있었다.
화재경보기는 멈추고 사람들은 제 집을 찾아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참깨는 몇 시간이 흐르도록 나오지 않았다. 츄르(고양이 간식)를 꺼내주어도 참깨는 나오지 않았다. 내가 화장실을 가면 참깨는 항상 날 따라오곤 했는데 어떤 소리가 나도 참깨는 결코 나오지 않았다. 그런 상황을 마주하며 '오늘은 참깨 곁에 있어야겠다'고 생각했고, 예정되어있던 그 날의 일정을 모두 취소했다. 물론 백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날 오전 11시쯤이 돼서야 참깨는 슬그머니 침대 밑에서 나와 화재경보기를 보더니 더 이상 빨간 빛이 나오지 않는 걸 보고 안심했는지 집의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밥을 챙겨 먹고 화장실도 갔다.
큰 화재가 발생하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참깨에게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았을 것 같아 걱정스러웠고 한편 위기 상황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던 '집사'인 나에 대해 반성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일을 SNS에 게시하자 집사인 지인들이 비슷한 경험을 댓글로 공유해주었고, 덕분에 많은 힘을 받았다.
집사 지인들은 화재가 일어났을 때, 속수무책으로 집 밖을 나가지 못한 일화, 이동장에 넣고 이동하는 것을 평소에 연습하고 가구를 재배치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 등을 나눠주었고, '내게만 일어난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일 이후, 반려동물들과 함께 사용하는 가구들의 광고를 다시 보니 단순히 고양이의 숨숨집(구멍이 나 있는, 고양이의 개인 공간을 확보해주는 용도의 작은 가구) 기능만을 할 수 있는 것을 넘어 화재가 일어났을 때, '보이지 않는 곳'에 숨기보단 집사가 손을 뻗어 구해낼 수 있는 정도의 안전 공간도 고려된 가구임을 알 수 있었다.
이 일은 집사라면 앞으로 우리 집에 발생할 수 있는 위기상황에 적극적으로 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안겨주었다. 팸 존슨 베넷의 <고양이처럼 생각하기>라는 책을 참고해보면 집사의 역할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고 있었는데, 우선 발생한 상황의 곤란함을 고양이에게 전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쉽진 않겠지만 고양이가 불안해할수록 보호자는 태평스럽고 무심한 목소리, 태도를 취하는 게 핵심이라는 것이다.
또한 위급 상황에 대비해 신호를 보내면 이동장 안에 들어가도록 연습시키는 것이 필요하며 실제로 대피 중 고양이가 가족과 헤어지는 경우가 많으니 사전에 고양이에게 인식표 목걸이를 하고, 평소 고양이 모습을 자주 사진 찍어두는 게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나아가 집사가 아무리 조심한다고 하더라도 예기치 못한 상황, 특히 집에 불이 나는 등 응급 상황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반려동물이 집 안에 있음'을 알리는 표지판 등을 집 밖에 마련해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책을 읽으며 다양한 대비 상황을 상상해보았고 대비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고민해보았다. 집에 장치를 마련하고 표지판을 두는 것 등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인 반면 가장 '답이 없다'고 느껴지는 것은 내가 참깨를 돌보지 못하는 순간을 가정할 때였다. 나를 대신해 돌볼 수 있는 사람이 부재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참깨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질문을 사실 깊게 고민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참깨를 집에 데려오기 전, 입양신청서를 쓸 때, '유학/이사/이직 등 다양한 이동상황이 발생할 때, 참깨를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에 답변으로 '함께 할 것이다'라고 작성했었다. 그때의 질문은 나의 이동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상황 정도의 가정이었다.
내가 장기간 병원에 입원하거나 혹은 갑작스럽게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경우, 참깨는 어떻게 되는 걸까. 찾아보니 이런 경우가 흔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고양이처럼 생각하기>의 저자 역시 집사들이 사망했을 때, 고양이가 보호소로 보내지거나 고양이를 싫어하는 가족에게 떠넘겨지는 상황이 많다고 했다.
SBS 동물농장 등을 통해서도 많은 사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방송에서 나온 한 사례가 기억에 남는데, 강아지 복실이는 3년 동안 단 하루도 거르지 않도 동네 골목길을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복실이는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에서 홀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제작진이 동네 주민들을 통해 사정을 들어보니 복실이를 돌보던 할머니가 갑자기 사라진 뒤 혼자 지내게 되었다는 거였다.
동네 주민들이 복실이를 챙기고 있긴 했지만, 계속 이렇게 살 순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제작진이 할머니의 행방을 수소문해보니 치매 증세가 급격히 악화돼 요양 병원에 입원하신 상태였다. 다행스럽게도 제작진의 도움으로 복실이는 다른 가족을 만나게 됐고, 새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복실이에게 3년은 어떤 시간이었을까. 한편으론, '가족을 잃은 모든 동물들이 복실이와 같은 상황에 놓이지 못할텐데...'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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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을 접하고 나니 참깨는 나의 일상을 함께 나누는 것을 넘어선 존재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말 그대로 나의 건강은 더이상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혼자 사는 나는 내가 몸이 아플 경우, 어떤 경로로 외출을 할지에 대한 일종의 규칙이 있었다.
집에서 나와 죽집에 가서 포장 주문을 해두고,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은 후, 약과 큰 오렌지 주스를 편의점에서 구입한 후, 포장된 죽을 찾아 집에 돌아오는 것. 이것이 나의 규칙이었고 아픈 내가 나를 위해 수행하는 일종의 책임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것만으론 충분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내가 돌보고, 지켜야 할 참깨가 생겼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참깨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1인가구라는 폭을 보다 넓혀 지금보다 주변 사람들과 더 관계적으로 지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내게 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참깨를 잠시라도 돌봐주길 부탁하는 등 집사로서 수행하는 돌봄의 역할을 부탁하고 나눠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까지 고민하는 게 집사의 책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우리 참깨만의 성격과 고집도 있을테니 충분히 시간을 보내며 차곡차곡 참깨에 대해 기록하고 사람들과 나눠야겠다. 참깨, 그리고 집사인 나의 안전하고, 행복한 일상을 위해서 말이다.
(본 글은 10월 22일, 오마이뉴스 '사는이야기'를 통해 발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