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디 탈출구가 아닌 날갯짓이길
커피와 편두통이 친구가 될 때쯤에 삶을 바로 잡아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지만, 감성적인 생각으로 선택하기엔 이제 참 많은 책임이 생겨버렸다. 책임이란 건 조금씩 생기는 게 아니었다. 어느 순간 갑자기 불어난 책임에 무게감을 느꼈고 자유라는 것이 멀게만 느껴졌다.
" 바라는 게 무엇인가?" 누군가 물어본다면 대답 못한다.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다면 조금이라도 나아가기 위해 행동하는 성격이니깐 더 잘하려는 고민을 했을 것이다. 자신의 게으름을 느끼고 스스로 세우는 꿈이 참으로 비현실적인 것을 느끼면서 자유라는 게 무겁게 느껴지고 동시에 행복도 희미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꿈이 없이 살아온 건 아니었다. 꿈을 절실히 찾고 세우려 노력했고 그 꿈들이 오히려 무너트리기도 했다. 순차적으로 말하자면 초등학교 때는 과학자가 꿈이었다. 자세히 말하자면 지리학자 그 당시에는 지리라는 말이 어려워 땅 과학자라고 말했다. 세상의 근원 원천이 땅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땅 과학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하고 싶은 마음보다는 꿈이라면 모든 걸 설명할 수 있는 게 좋다고 생각했고 땅 과학자를 꿈이라고 말했었다.
중학교 때는 기자였다. 가장 큰 동기는 학교 신문 동아리를 했었고, 던전 앤 파이터라는 게임에서 모집하는 아라드 기자단을 활동했었기 때문에 꿈꿨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른들에게 말하기 좋은 직업적인 꿈이었다. 친척들이 물어볼 때 기자나 아나운서가 꿈이라고 하면 훈수나 핀잔이 줄어든다. 현실성이 높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는 그냥 좋은 대학교를 위해 엉덩이 무겁게 공부하였지만 고3 때 지쳐버려서 공부는 미뤄둔 채 카르페디엠을 실현하기 위해 힙합과 패션에 빠졌다. 남고에서 공부만 바라보다 보니 이성에 대한 갈망과 자유에 대한 욕구가 터져버렸다. 그래서 갑자기 패션 디자이너를 꿈꾸게 되었고 깊은 마음속에서는 빈지노 같은 래퍼를 꿈꿨고 귀에는 늘 이어팟이 걸려있었던 시절이었다.
학업에 도피였던 패션이 취미가 되고 결국 전문대 패션디자인과에 입학했다. 고3에 갑자기 패션이 하고 싶어 졌고 무엇보다 멋있는 장래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 멋있는 거라면 눈에 보이는 것 밖에 없었고 맘속에 미술 관련 대학이 아티스트적인 고뇌와 표현 아름다움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입학을 하고 욕망을 채워나갔다. CC를 하고 이성과 술을 마시고 옷을 입고 하지만 즐기는 것도 현실 앞에서는 초라한 멋쟁이가 되는 법이었다. 여자 친구에게 얻어먹는 게 자존심 상했지만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이 멋있는 거라 생각해 혼자 끙끙 앓고 주말에는 로망 같던 여러 알바도 부담스럽고 지겨운 시간이었다.
20살에 갑자기 많은 것들이 놓였고 그 당시 소년은 산만하고 막연했다. 자신에게 많은 것이 부딪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산만했고 자신이 벅차다는 걸 자 표현할 수도 없었다. 또한 가난했고 여러 종류의 가난을 경험하고 깨달았다. 술로 사고를 치고 망신을 당하고 욕심으로 빚을 지고 견딜 수 없는 것들에 치이고 핀트가 자꾸만 나가버렸다.
소년은 대학 생활을 온전히 끝내지 못하였다. 아니 애초에 끝낼 생각이 없었다. 소년의 마음 깊은 곳에 아니 누군가가 조금만 편하게 시간을 들여 뭍는다면 충분히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소년은 마음 속에 아티스트이자 뮤지션으로 성공하고 싶었다. 그리고 좀 더 자유롭고 싶었다. 대학으로 과시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고등학교를 다닌 판단으로는 내가 생각한 목표는 턱도 없다. 막연한 자들이 그렇듯이 새로운 막연한 것들을 만들어 냈고 음악 그리고 힙합으로 성공하겠다는 꿈이 생겨버렸다.
힙합의 꿈은 흔하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시대의 유행으로 특이한 것이라기 보다는 많은 이들의 맘 속에서 싹트고 있었다. 대학교의 로망도 있었기에 학비를 내지않는 전문대에서 한 학기를 보내었고 이제 좀 더 나만의 길을 걷겠다고 생각하고 1학기 휴학을 냈다. 사실 자퇴를 바로 하고 싶었지만 담당 선생님이 말렸다. 학교의 졸업률 때문에서인지 나를 정말 걱정하는 마음이였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우선 말리려했다. 무슨 이유인지 들어보려하였고 설득하려 애쓰셨지만 그 상태에서 소년은 그 어떤 말도 들리지 않았고 듣지 않았다. 허나 자퇴는 부모님의 동의서가 따로 더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여 어찌되었던 결과는 같을 터이니 수긍하고 휴학을 내고 학교를 나왔다.
이후 다니지도 않는 학교앞에 자취방을 구했다. 여자친구는 여전히 학교를 다니기 때문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학교 근처 1층 100/30 원룸을 구했다. 보증금이 저렴한 방이여서 현관 도어락도 없는 길로 바로 연결된 원룸이였다. 지금 서울살이를 하고 있는 상태에서 생각하면 참 넓고 좋은 집이지만 당시에는 현관 도어락없어서 많이 아쉬웠다. 아무튼 여자친구만 다니는 전 대학교앞 자취방에서 나의 풋어른 20살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당시 대학교에 갓 자퇴한 대학생에게는 보증금 100만원과 월세 30만원도 벌기 쉽지 않았다. 대학교를 자퇴하고 현실적으로 돈을 벌어야했다. 하지만 당시 내가 좋아하던 옷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대구에 지원가능한 옷가게는 모두 이력서를 넣고 지원했다. 하지만 군대도 전역하지 않았고 나이도 얼굴도 몸도 어렸던 나에게는 취직이 쉽지 않았다. 대부분 생각해본다 말하고 연락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새 시작이라 생각하고 자퇴를 하고 구직을 하였는데 무너지기만 하는 느낌이 3개월 정도 지속이 되었다. 열정 넘치는 젊은 이가 그렇듯 조바심에 점점 지쳐가고 자존감도 떨어지고 있었다.
지쳐서 구인에 대한 열의도 한참 떨어졌을 때 한 보세 옷가게에서 연락이 왔다. 면접 결과로서 합격이 되어 다음주에 출근이 가능한지 물어보는 문자였고 본 순간 기분이 너무 좋았다. 나라는 초라한 존재가 드디어 일을 하게 된다는 사실이 기뻤고 옷가게에서 일하는 멋있는 직원들이 생각에 스쳤고 자신또한 그렇게 된다는 생각이 즐거웠다.
당시 일하게 된 옷가게의 이름은 영스테이지 지금도 대구에 존재하는 옷가게이고 한때는 대구에서 가장 큰 남자 옷가게였지만 내가 입사할 당시에는 SPA 브랜드의 높은 상승세로 입점과 세일즈가 떨어지고 있는 시점이였지만 당시 나에겐 가릴 처지도 아니였으며 자세한건 알려고도 알지도 못했다. 그저 그 곳은 옷에 대한 즐거움이 시작된 곳이였고 오랜 시간 일을하여도 즐거울 거라고 생각했다.
영스테이지의 외관은 보세옷가게와 휴대폰 판매장과 비슷하게 도로쪽을 향하여 저음으로 울리는 우퍼 스피커가 문에 매달려있었고 마네킹이 과하다 싶을정도로 많았고 옷이 넘치는 느낌에 어지러운 느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정갈함과 미를 진정으로 아는 사람이라면 패션이라는 느낌보다는 도매상이라는 느낌이 강하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마네킹이 많은 것은 갓 20살의 시선으로는 촌스럽게 느껴졌다. 마네킹의 옷을 산다는 것은 자신이 옷을 고를 능력이 부족하다는 걸 말하는 것과 같고 마네킹의 스타일도 늘 인위적인 느낌이 강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조급했고 가난했다. 쓰고 싶은 곳이 많았고 그것이 정말 필수적으로 느껴졌다. 끼니 걱정은 없으면서 대출을 찾아보는 극단적인 젊은 이처럼 돈이 필요했다. 자취방과 멋진 옷이 필요한 불안한 어린 영혼이였기 때문에 좋은 추억과 좋은 시선으로 포장하면서 출근을 했다.
출근 시간은 10시부터 저녁 10시까지이다. 한마디로 참 심플한 출퇴근 시간이다. 매일 12시간 오픈하고 모든 직원들은 주 6일로 출근한다. 과업하는 회사가 그렇듯 퇴근시간에 자비가 없었다. 10시가 되면 마감 정산을 했고 매출에 따른 피드백을 줬다. 쉽게 말해 매출이 안좋으면 30분간 피드백을 받아야했는데 기억나는 피드백은 허리를 좀 펴고 다니라는 것이였다. 잔소리하던 실장의 눈치로는 듬직한 직원을 바라는 데 당시 난 너무나 마르고 자세도 구부정한 불편한 영혼이였고 구부정한 자세로 피드백도 들었다.
옷가게에 일하던 젊은 20대 힙합을 좋아하고 마음 속으로 락 스타의 꿈을 꾸던 소년은 옷가게를 오래 버티지 못했다. 구속이 심하던 여자친구는 오랜 시간 일로 인해 만나지 못해 집착이 심해졌고 일주일에 하루 있는 휴일은 너무나 기대가 크지만 하루라는 짦은 시간 속에서 자유와 욕망을 채우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였고 좋아하던 옷도 일이 되어버리자 점점 색깔이 무뎌졌다. 그런 수 많은 감정을 감당하기에는 어렸고 무엇이 정말 중요한건지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 돈도 쓸 줄 몰라서 늘 가난하고 욕심만 많았다.
화근이 된 것은 크리스마스였다. 공휴일이기에 더더욱 서비스 직에서는 휴일로 만드는 것이 어렵다. 당시에는 월차나 연차도 전혀 없었고 그저 2년제 부터 여름 휴가라는 것이 3일정도 주어졌다. 열악한 대우라는 건 알았지만 그당시 자세하게 생각할 시간도 경험도 없었기에 당장 크리스마스에 여자친구의 잔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 근무를 뺴려했다. 허나 크리스마스에 휴일은 생각처럼 되지 않았고 소심한 소년은 당당하게 휴일 신청도 못하고 쭈뻣쭈뻣 물어보는 식이였다. 여러가지 말못하는 어려움과 불평이 모여 맘속에 쌓였고 결국 사장에게 일을 더이상 못하겠다고 말했다.
사장은 나에게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좋으니 좀 더 일하라고 말했다. 소년은 당당하게 싫다고 말할 수 없었다. 첫 직장을 평생 일할 것 처럼 말하고 생각했는데 약속을 깨는 것에 대한 죄책감과 갑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의견을 당당하게 말하지 못했다. '사장님께 미안하지만 당신이 날 어떻게 생각하든 난 때려칠거야' 라고 마음 속으로만 앓고 있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나에게 위로나 공감해주는 사람보다는 실장은 되려 본인에게 사직의 의향을 먼저 전달하지 않은 걸로 화를 내었다. 당시 군대를 가본 적 없던 나였지만 군대를 간다면 이곳만큼 괴로운 곳일까 생각을 했다.
자의로 그만둘 수 없는 슬픈 현실에 외적갈등은 하지 못하고 늘 내적갈등했고 그 누구라도 공감이라는 감정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알았을 텐데 그곳은 공감세포 따윈 맥심 커피에 말아먹는 사람들만 있었는지 아무도 공감따윈 없었다. 그저 참고 구역구역 하루하루 고민하다가 어느 날 진심이 행동으로 튀어나온건지 지하철을 반대 방향으로 타서 지각을 크게 해버린 사건이 생겼다. 휴대폰으로 출근시간이 지난 시간을 보니 명확하게 떠올랐다. 출근을 하지 말자 나의 삶이 중요하지 묶여있는 월급따윈 나중에 별거 아닐 것이라고 다짐하고 그저 걸려오는 전화를 두려워하며 출근을 하지않았다.
그렇게 첫 직장을 마감했다. 무단으로 사직해버렸기 때문에 욕먹을지도 모른다. 내 편은 없었기 때문에 늘 가게 주위를 피해다녔다. 누가 잘했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서로에게 좋은 인연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린 영혼에게는 돈보다는 따뜻한 관심과 공감이 필요할 뿐이다.
첫 직장에서 핀트가 확 나가버리자 맘 속에 자라나던 힙합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가난했다. 내 맘속에 다짐이 강해진다고 해서 외부적인 환경이 변화하는 건 전혀 없다. 그저 내 맘 속에 꿈이 늘 급변하고 주위 사람들은 막연한 날 그닥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후 직장의 9 to 5 주 5일 40시간이 가장 중요한 구직 요소였다. 명확한 기술이나 경험없는 소년이 들어갈 수 있는 직장은 사실상 흔히 말하는 아르바이트 뿐이였고 결국 패밀리 레스토랑인 tgif의 주방으로 들어갔다. 주방에 경험은 없지만 사람 대하는 것이 무서웠던 당시에 차라리 몸이 힘든 게 나은 것 같아서 주방에 지원을 했다. 면접 당시 왜 주방으로 들어오려고 하냐는 질문에 집에서 요리에 도움될거라고 말하자 매니저가 웃으면서 특이하다고 했고 다행스럽게 취직이 되었다. 당시 일자리의 공백은 2개월 정도였지만 가난하고 조급한 소년에게 있어서는 큰 공백이였다. 충분한 마음과 경제적 둥지가 없으면 하는 게 없어도 사람은 늘 바쁘게 살게 된다.
레스토랑 일도 순탄하지는 않았다. 시간제로 일하는 당시 나에 생각으로서는 요리법을 집에서 외워오라는 것이 부당하다고 여겨졌다. 물론 나름대로 열심히 외우긴했지만 이틀차에 나에게는 샐러리 레서피를 온전히 외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매니저는 망고 샐러드에 올라가는 아몬드가 빠진 채 메뉴로 나간 나의 실수를 크게 혼냈다. 당시 억울하고 부당하였던 소년은 요리를 배우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표현을 했지만 표현이 부족했던 건지 거만해보였는지 무척 혼이 났다. 혼이 나면서도 "너 얼마 받는지 아느냐?"라는 질문이 전에 일했던 옷가게에서 똑같이 들었던 말로서 무척 화가 나고 억울하게 만들어 꽤나 큰 말싸움 소동을 일으켰다. 그렇다고해서 소리를 지른건 아니였고 돈 받는 건 별개의 문제라고 애기하였고 그것이 심기를 건들여 일방적으로 혼났다. 물론 속으론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많이 참았다.
당시 신입 이틀차의 사건으로 주변 직원들은 다들 금방 그만둘줄 알았다. 하지만 기분대로 그만둘 수 없었다. 식비나 방세 같은 현실적인 문제가 코앞에 있었고 부모님에게 빌릴 사정도 되지 못했기에 억울하지만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 타일르면서 버텨나아갔다.
그렇게 버텨나가다 보니 사람들은 차차 나라는 사람이 거만함이나 게으름에는 거리가 있는 사람이며 그저 어리기에 이해할 수 있는 과거의 행동이 되었다. 같이 일하는 사람과 친해져 간간히 야식에 맥주도 한잔씩하며 지냈었으며 당시 난 열망 가득한 소년이자 청년이였기에 음악에 대한 막연한 꿈들을 형들과 이야기하며 현실적인 이야기해주는 형들이 꼰대 같다고 느끼기도 하였다. 허나 그들의 존재가 있었기에 외로움에 젖어있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말릴 수 있었고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들어다 볼 수 있었다.
레스토랑의 끝은 군입대였다. 사실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군입대였지만 일을 그만두는 것 자체는 당시에는 기쁜 일이였다. 자유를 강하게 열망하는 소년에게는 일을 하지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유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10월10일에 입대 예정이였는데 8월부터 일을 정식으로 그만두었다. 군대를 2년의 시간은 당시에는 매우 큰 시간 뭉치였고 어떠한 변화가 있을지 실질적인 생각은 들지않았지만 막연한 상상으로 휩싸이던 시기였다. 거사를 앞둔 나에게 많은 변화들도 있었다. 캠퍼스 커플로 시작해 동거하듯 지내던 여자친구와 이별을 하고 처음으로 태국으로 해외여행을 갔다. 둘다 처음으로 겪는 일이였고 너무나 빠르게 일들이 지나가 디테일한 감상은 누락된 듯이 큼직큼직 하게 일들이 다가오던 시기였다. 어쩌면 삶에 직관력만 가득 쌓이던 시기였고 지금이 펑 날아간듯 하다.
아무튼 정상적으로 입대를 하고 하루하루 차가운 현실의 아침과 다가올 불안함의 까만밤을 지내며 2주차 첫 부모님과 통화에 눈물을 쏟으며 나라는 인간도 눈물이 자연스럽게 나기도 한다는 걸 배웠다. 2년의 군생활은 나라는 인간을 더욱더 말조심하게 만들었고 말없게 만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럭저럭 지냈으며 나름 친한 동기이자 친구들도 많들어 갔다. 마치 군생활이 전부인것 처럼 막연한 시간들도 결국에는 끝이 다가왔고 전역을 했다. 전역날은 그닥 기쁘지 않았다. 그저 막연한 할일들만 잔뜩 쌓여있고 살짝만 드러내도 현실성은 결여된 덩어리를 가득 채워 나왔다. 뭐 흔히 하는 얘기로는 병장병이라고도 부르기도 하는 조율 비슷한 유쾌하지 못한 에너지가 가득 채웠고 돈을 벌기 위해 말차때부터 급하게 일을 잡아 일을 시작했다.
시작한 일은 물론 미래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은 일이였고 일하는 형식만 직업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지 마음가짐은 여전히 파트 타이머와 다름 없었고 실제로 하고싶은 일은 음악을 하는 것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