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5 / 2023. 6월호. 함께 걷는 길_2
_작가의 말 (김연수)
2021년 10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제주도 대정읍의 작은 서점인 어나더페이지에서 낭독회가 있었다. 제주문화재단의 초청으로 가파도의 레지던시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낭독회는 체류 기간 동안 작가들이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들 중 하나였다. 낯선 곳에서의, 뜻밖의 낭독회였기에 어떤 분들이 오실까 궁금했다.
해가 저물고 예정된 시각이 되자, 어두운 골목으로 사람들이 하나둘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씩 어떤 얼굴들이 서점 불빛 아래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살펴보니 중년 여성들이 많았다. 어떤 분들이냐고 물었더니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인문학서를 읽는 독서모임의 회원들이라고 했다. 그중에는 도시를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한 이도 있었다.
그들은 나를 낯설어했다. 물론 나도 그들이 낯설었다. 소설을 읽는 동안, 눈을 감는 분도 있었다. 그럴 때면 어쩔 수 없이 긴장하게 된다. 내 소설이 지루한가 싶은 걱정도 든다. 혹시 주무시는 건 아닐까?
그러나 그날만은 조금 달랐다. 주무셔도 괜찮겠다는, 아니, 오히려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일에 지친 그들에게 내 소설이 그런 식으로나마 도움이 됐으면 싶었다. 그 뚱딴지같은 생각은 모두 당근이나 배추, 혹은 감귤 같은 것들 때문이었다.
그 얼굴들을 바라보며 나는 그들의 낮을 상상했다. 뜨거운 햇살과 달려드는 벌레와 마른 흙 같은 것들을. 때로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날도 있으리라. 낮 동안 그들에게는, 그리고 우리에게는 수많은 일이 일어나리라. 그런 게 우리 인생이니까. 그렇게 정신없이 할 일들을 처리하다 보면 지칠 테고, 이윽고 밤이 찾아온다. 밤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그 밤에 우리는 지친 몸을 쉬게 하리니. 밥을 먹고 나면 다시 힘이 생길 테고, 낮 동안의 일은 잠시 잊은 채 누군가는 영화를 보고, 누군가는 음악을 듣고, 누군가는 TV를 시청하고, 누군가는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그들처럼 동네 서점에 모여 책을 읽는 사람들도 있으리라.
그렇게 우리는 하루를 살아낸다. 그리고 그 하루하루가 모여 일생이 된다. 나는 그들이 매일 돌보는 것들을 생각했다. 당근이나 배추, 혹은 감귤 같은 것들이 보살핌 속에 잘 자라 사람들의 저녁식탁까지 오르게 되는 과정을 생각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당근이나 배추 혹은 감귤 같은 것의 구체적인 모양과 질감과 향 같은 것들이 손에 잡힐 듯 또렷해졌다. 그들이 낮 동안 열심히 일해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밤의 사람들에게 다시 살아갈 힘을 내게 하는 것. 나는 그들이 모여서 듣는 내 이야기도 그런 것이 됐으면 싶었다.
그날의 낭독회 이후, 소설에 대한 나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산문보다는 소설을 더 많이 쓰게 됐다. 강연회보다는 막 지은 짧은 소설을 읽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낭독회를 더 자주 하게 됐다.
그런 낭독회에서 사람들에게 읽어주기 위해 쓴 소설들이 모여 이렇게 한 권의 책이 됐다. 짧으면 십 분, 길면 한 시간이 넘도록 읽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보통은 오십 분 동안 두 편을 낭독했다. 낭독 사이사이에는 어울릴 만한 음악을 곁들여 사람들과 함께 들었다.
낭독이 끝난 뒤에는 오신 분들께 이야기를 청했다. 어떤 일을 하시는지, 요즘 관심사는 무엇인지, 이 낭독회에는 어떻게 오게 됐는지. 그러면 누군가 손을 들고, 다들 그 사람을 쳐다본다. 나도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아무런 느낌도 없었던 어떤 얼굴이 조명을 받은 것처럼 또렷해지는 건 바로 그 순간이다. 그 얼굴은 나와 마찬가지로, 진짜 사람의 얼굴이었다. 아, 그렇구나. 저기 저런 얼굴을 가진 분이 앉아 있었구나. 그때마다 나는 놀랍다. 얼굴을 보며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나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한 사람의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다는 것, 바로 그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때로 낭독회는 예정된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두세 시간씩 이어지곤 했다. 덕분에 좋은 추억이 많이 생겼다.
전국 여러 곳의 도서관과 서점에서 열린 낭독회에 찾아와 이야기를 들어준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그분들이 있어 나는 이 세상 속에서 소설을 쓰는 일의 의미를 알게 됐다.
모슬포의 저녁이 종종 생각난다. 골목의 어둠 속에서 하나둘 나타나던 얼굴들이 떠오른다. 지친 얼굴들, 하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삶을 기대하는 얼굴들. 그 얼굴들을 마주하고 나는 생각했다. 이 이야기들이 그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지금까지 그런 소설을 쓰지 못했다면 지금부터 새로 쓰겠다고.
그 얼굴들이 있어 새로 쓴 소설들이다.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2023년 여름의 첫 나날에,
김연수
- <너무나 많은 여름이(2023, 레제)> 김연수, '작가의 말' 전문 인용 -
제가 가장 좋아하는 문학인. 작가. 시로도 등단하신 소설가 김연수. 작가님의 짧은 소설 모음집이 이번 여름 새로 나왔습니다. 언제나 작가님의 소설은 예약 구매. (친필 사인본은 필수이므로) 첫 번째 단편소설을 읽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떠오르게 하는 아픈 소설. 반복되는 전쟁의 역사 속 소박한 얼굴들의 아픔, 그러나 포기하지 않는 인류의 지혜를 보여주는 이야기였습니다. 역시, 김연수라는 느낌. 문학적 취향은 음악과도 같아서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제게는 절대적인 취향 저격입니다.
두 번째 읽은 글은 소설집 마지막에 실린 작가의 말. 저는 그분의 ‘작가의 말’을 그분의 소설만큼이나 애정합니다. 제주도에서의 낭독회 이야기, 그 속에서 만난 사람들, 그로부터 쓰게 된 소설의 여정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어쩌면 요즈음 제가 지향하고자 하는 문학, 삶의 방향과 딱 맞는지. (하여 작가의 말 전문을 필사하였습니다, 양해를 부탁드리며)
이상한 말이지만 더 어릴 적엔 시를 쓰고 싶으면서도 시를 아꼈습니다. 쉽게 쓰는 시는 시가 아니라고 오만하게 생각했습니다. 어렵게 써낸, 힘이 잔뜩 들어간 시에는 저의 이야기만 담겨 있었습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공감을 주기 어려웠겠지요. 이제는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을 조금은 내려놓고, 제 시가, 읽는 누군가에게 잘 이해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다소나마 공감됐으면 좋겠다고 바랍니다. 그런 마음으로 요즘은 쓰려합니다.
나아가 제 이야기와 당신의 이야기, 우리와 세상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 김연수 작가님이 낭독회를 계기로 이런 소설집을 묶으신 것처럼, 짧아도 좋은, 쉬워도 좋은, 저녁 낭독회에서 편하게 같이 들으며 써온 시와 문장들을 나누며 살고 싶네요. (숨 빗소리 멤버들과도 그런 기회를 갖기를)
그것은 서로의 삶을 듣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는 서로를 향해 몸을 기울이게 되겠지요. 그렇게 우리들의 숨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지겠지요.
숨 빗소리 - 발행인 겸 편집장. 스쳐가는 장소에서 건져 올린 시들을 나누고자 합니다. 세상과 사랑에 대한 생각과 느낌들을 시와 산문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