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11 / 2023. 12월호. 시로 쓴 이야기_2
1
지석은 장을 보러 집 근처 대형마트에 들렀다가, 겨울시즌에 맞춰 마트 코너에 새롭게 자리한 크리스마스 장식들을 바라보았다. 별, 구슬, 작은 비둘기와 흰 눈송이 모형 등으로 꾸며진 크리스마스트리 위로 색색의 꼬마전구 불빛들이 빛나고, 그 옆으로는 지석이 이맘 때면 연서에게 늘 쓰곤 했던 크리스마스 카드들이 종류별로 배치돼 있었다. 지석은 안으로 들어가 좀 더 둘러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매년 이맘 때면 종이로 만든 벽트리를 구입해 꼬마전구들과 함께 방 한편을 꾸몄던 지석이었다. 사실 연서를 만나기 전까지는 크리스마스를 특별히 생각하거나 트리를 만든 적도 없었다. "일 년에 한 번 다가오는 성탄절인데 그래도 기분은 내야 하지 않겠어?"라며 대단한 규모는 아니더라도 연서는 늘 소박하게나마 트리 꾸미기를 원했다. 건조하기만 했던 지석의 12월은 그렇게 연서를 만나고부터 바뀌었다. 종교를 갖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세계의 성인으로 불리는 예수의 탄생을 축복하고, 예쁜 트리를 해마다 만들어야 하는 조금은 동화 같은 느낌의 시기로. 서로의 생일처럼 연서에게 카드나 편지를 써야 하는 한 해의 특별한 마지막 달로.
그런 연서와 헤어지고 나서 처음 맞이하는 크리스마스. 햇수로는 6-7년 만일까. 지석은 이제 더 이상 특별히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거나 트리를 꾸밀 생각이 없었다. 연서와 크리스마스이브에 함께 마실 와인을 고르느라 마트의 주류 코너를 서성일 필요가 없어졌고, 어떤 선물을 준비해야 하나 한 달 전부터 고심했던 아득한 시간들이 사라졌다. 모든 것은 연서를 만나기 전 홀로 지낸 처음으로 돌아갔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 것뿐인데, 지석은 이제 더는 연서를 만나기 전 크리스마스로는 완전히 똑같이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똑같은데, 똑같지가 않았다. 어쩌면 그런 것이 우리의 삶일까.
2
"니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다면서 궁상이냐, 인마. 그만 잊어." 그날 밤 포차에서 만난 서진은 그렇게 지석을 몰아붙였다. "그랬지. 내가 그랬었지." 눈이 펑펑 내리던 작년 연말 어느 날, 너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지석은 연서에게 조심히 말했다. 네가 좋은 사람인건 맞는데, 그런데 내 심장이 더는 두근거리지 않는다고, 미안하다고. 연서는 크게 놀라지 않으면서도, 그러나 흐르는 눈물을 멈추지는 않았다. 소리 내지도 않고 조심히 눈물방울을 떨구는 그녀의 모습이 지석을 더 미안하게 했던 지난겨울. 그래도 그때의 지석은 반드시 서로를 위해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투다가 연서가 눈물을 흘리면, 그런 그녀가 안쓰럽고 예뻐서, 미안해 잘못했어, 꼭 안아주던 지석이었는데. 그러나 이번만큼은 힘들지만 그 모든 것들을 견뎌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고 홀로 맞는 크리스마스. 오래도록 연서를 보지 못해서인지, 연인들의 시즌인 성탄절 특유의 분위기 때문인지, 지석은 서진과 술을 마시다가 옛 연인 연서가 몹시도 그립다는 생각이 들었다.
7년 전. 스물한 살 동갑내기인 둘이 연인이 되어 처음 맞이했던 크리스마스. 두 달 후면 군대에 가는 지석은 당시에도 연서와의 빠른 결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감정으로 둘의 사랑이 시작됐지만, 곧 군대에 가는 마당에 연서를 이 년 가까이 기다리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연인으로서 처음 맞이하는 크리스마스임에도 별다른 약속이나 이벤트를 계획하지 않고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던 지석이었다. 그 당시 서진은 "야, 여자친구도 있는 놈이 왜 크리스마스이브에 남자 놈들을 불러내서 지지리 궁상이냐. 연서한테 빨리 가." "곧 군바리 될 놈이 무슨 여친이냐. 나 연서랑 헤어질 거야." "미친 거 아냐?" 지석의 얘기를 듣던 서진을 비롯한 친구들은 곧장 지석을 택시에 태워 연서의 집으로 보내버렸다. 아니 친구들은 연서의 집까지 따라와 기어코 초인종까지 눌러주고, 그 둘이 만나는 걸 본 후에야 자기들만의 크리스마스를 즐기러 떠났다.
스물한 살의 크리스마스는 추웠을까. 추위는 지석의 기억 속에 없었다. 심장이 아니라 온몸, 자신의 스물한 살 전체가 설렘으로 두근거리고 있었으니까. 이런 연서를 두고 어떻게 헤어짐을 고할 수 있으며, 군대는 또 어찌 간단 말인가. 연서의 집 앞에서 친구들이 떠난 후, 밖으로 나온 연서는 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아니, 서진이 그 자식이 크리스마스인데 여자친구 얼굴도 안 보냐고 그래서... 미안해, 갑자기 불러내서." 그 말에 연서는 소리 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좀 걸을까?" 지석은 술기운도 좀 달랠 겸 집 근처 한강공원을 걷자고 했다. 둘은 어떤 대화를 나눴을까. 기억나는 건 오직 그 밤의 갑작스러운 연서네 집 방문과 둘의 길을 출렁이며 곁을 따르던 밤강물, 반짝이던 도시의 불빛들과 옅은 미소뿐. 그 어떤 말들이 중요했을까. 그런 시절이 있었고, 그들 곁 강물처럼 시절이 그토록 빨리, 그들의 사랑을 스쳐갔다는 것뿐.
3
올해의 마지막을 며칠 앞둔 아침. 지석은 공부할 책을 가방에 넣고 도서관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달력을 보며 오늘 날짜를 헤아리다가, 오늘이 바로 작년 연서와 헤어진 날이라는 게 기억났다. 작년 연말 스물여덟의 겨울이었다. 그때도 지석은 지금처럼 여전히 취업을 하지 못해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지석보다 졸업을 두 해나 먼저 한 연서는 서울의 광고회사에 취직하여 이미 사회인으로서 자리를 잡은 지 오래였다. 도서관에 다니던 지석이 주말에 연서를 만나곤 할 때면, 연서가 둘의 밥값을 계산하는 게 보통이었고, 나중에 취업해서 갚으라며 간혹 큰 금액의 돈을 지석의 손에 쥐어주곤 했다. 처음엔 당황하고 화를 내던 지석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지석이 그 돈으로 둘의 데이트 비용을 함께 내게 됐을 때, 지석은 그런 상황까지 앞서 헤아린 연서의 속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생활이 계속 지속될 수는 없었다. 지석이 보기에 자신의 미래는 출구가 없어 보였다. 이력서를 내는 곳마다 소식이 없었고, 간혹 면접을 보고 온 회사에서도 쉽사리 합격 통보를 받지 못했다. 그런 생활이 길어질수록 연서는 지석을 다독이고 격려했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지석은 더 비참해졌다. 어느 날은 술에 취해 연서에게, 이미 안정되게 생활하고 있는 네가 내 맘을 알기나 하냐고, 그런 형식적인 위로 따위 집어치우라는, 거침없이 상처 주는 말을 내뱉던 지석이었다. 그러나 술이 깨고 나면, 연서에 대한 미안함과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에 지석은 더욱더 괴로워지곤 했다. 그런 생활이 두 해째 반복되고, 그 두 번째의 겨울 어느 날, 그렇게 둘은 헤어졌다.
4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 한 해의 마지막 날이었다. 지석은 냉기가 감도는 자취방 벽에 기대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하얀 입김이 방안 가득 피어올랐다. 볼륨을 작게 켜놓은 티브이에서는 연말 연기대상 시상식이 한창이었다. 시상을 이어가던 중 해가 바뀌는 23시 59분 무렵이 되자 사회자는 시상식을 중단하고 한해의 마지막 카운트다운을 세기 시작했다. 십, 구, 팔, 칠, 육, 오, 사, 삼, 이, 일...
바로 이 가난하지만 행복했던 방에서 몇 해 전만 해도 같이 숫자를 세며 새해를 맞이했던 지석과 연서였다. 이제 해가 바뀌고 지석은 서른이 되었다. 서른. 지석은 자기 나이가 실감 나지 않았다. 지석은 생각했다. 나는 어쩌다 이런 인생을 살게 되었을까. 핸드폰을 들고 유튜브에서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검색했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는 담배 연기처럼." 이미 고인이 된 영원한 청춘의 가수의, 멀어져 가는 청춘을 아쉬워하는 쓸쓸한 목소리가 방안 가득 울려 퍼졌다. 지석은 빈 잔에 술을 따랐다.
곡이 끝나자 유튜브의 알고리즘은 자동으로 지석의 취향에 맞춰 다음 곡을 틀어주었다. 어쿠스틱한 기타 소리의 고요하면서도 무겁지 않은 연주곡이 이어졌다. 침울해지던 지석의 마음을 위로하는 듯한, 조용하면서도 따뜻한 손길 같은 음악이었다. 겨울이 끝나고 불어오는, 잔잔한 봄의 바람 같은 연주곡. 지석은 핸드폰의 화면을 봤다. 영상 제목이 '미뤄둔 책을 읽으며'라는 Ode채널의 플리였다. Ode(오드). 한동안 찾지 않던 '오드'는 연서가 그 플리를 즐겨 들어서 함께 구독한 채널이었다. 이어폰을 서로 나눠 꽂고 버스를 타거나, 집에서 함께 술을 마실 때 틀어놓곤 하던. "Ode(오드)는 그리스어로 누군가에게 부치는 서정시라는 뜻이래. 너무 멋지지 않아?" 연서의 오래전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지석이 음악 영상의 댓글을 무심코 내려보던 그때. '좋아요'를 4천 개 이상 받은, 맨 위에 고정된, 1년 전 누군가 남긴 댓글이 눈에 띄었다. "최근 6년 동안 사귄 남자친구에게서 이제 저를 더는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는 말을 들었어요.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세상이 무너져 내렸고, 사랑과 인생에 무력감을 느꼈어요. 한동안 이별 노래만 듣다가 제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에 즐겨 듣던 Ode가 생각나서 퇴근길 우산을 폄과 동시에 재생 버튼을 눌렀는데, 노래를 들으며 빗속을 걷다 보니, 문득 내 인생도 슬픔찌꺼기만 있는 게 아니라 낭만적인 동화 같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어요. 먼 훗날에 오늘 남긴 댓글을 보며 미소 짓고 싶어서 댓글을 남겨요."
지석의 호흡이 한동안 멈췄다. 댓글을 두세 번 더 읽었다. 그때에도 플리의 잔잔한 음악은 차가운 방 안을 따뜻하게 흐르고 있었다. Y로 시작되는 아이디의 그 댓글은 아무리 봐도 일 년 전 자신과 헤어진 연서가 쓴 것처럼 보였다. 댓글의 모든 내용이 자신과 연서를 향하고 있었다. 연서의 얼굴과 슬픈 미소가 눈가에 어른거렸다. 연서의 일 년 전 슬픔과 아픔이 고스란히 지금 지석의 가슴속을 파고드는 듯했다.
슬프지만 희망적이고 아름다운 그녀의 댓글에 응원 답글이 줄을 잇고 있었다. "낭만적인 동화 같은 하루, 오늘, 내일, 삶이 되기를 응원하고 있을게요!" "잘 모르는 당신이지만 당신은 건강한 사람이에요. 그 건강함으로 얼른 마음 추스르고 그간 그 사람에게 쏟았던 에너지의 방향을 당신에게 돌리세요. 당신은 더 좋은 사람이 되어 있을 거예요!" " 계속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거예요." 같은 답글들이.
5
그토록 힘들었던 일 년 전 겨울에도 연서는 슬픔을 이겨내며 여전히 낭만적인 동화 같은 희망을 꿈꾸며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지석과 함께 듣던 '누군가에게 부치는 서정시'의 플리를 켜고, 때론 눈물짓고 때론 웃으며 새로운 봄날의 벚꽃과 여름의 태양, 가을의 잎사귀와 지금의 눈송이를 맞고 있으리.
그녀의 댓글을 읽고 나니 정말로 그녀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 년 전에 남긴 그 따뜻하고 슬프고 아름다운 댓글처럼. 헤어짐을 선택했고, 다시 얼마간은 그 헤어짐을 후회했던 지석이었다. 그러나 새해를 맞이하면서 그녀가 남긴 글을 보며 음악을 듣고 있는 지금, 지석은 그녀의 더 복된 앞날을 바랐다. 소망했다.
지석은 연서의 댓글이, 여전히 실패하고 좌절하고 있을 일 년 후의 지석, 바로 현재의 자신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있음을 느꼈다. 음악은, 그 댓글은, 누군가에게 부치는 서정시 한 편은, 일 년 전 연서와 일 년 후의 지석을 그렇게 만나게 해 주었다.
일 년 전 지석은 헤어지는 그녀를 꼭 안아줄 수 없었지만, 일 년 전의 연서는 그때의 마음 그대로 일 년 후의 지석을, 지석의 캄캄한 외로움과 텅 빈 공간을 꼭 끌어안아 주었다. 음악은 오래도록 멈추지 않은 채 지석의 밤을 채웠으리. 스무한 살 그들 곁을 흐르던 오래전 밤강물처럼, 그렇게.
(지석은 잠들기 전, 연서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을 담아 자신이 좋아하는 시 한 편을, 그녀에게 보내는 마지막 답글로 남겼다.)
너에게*
똑같이 생긴 조화와 생화
꽃병에 나란히…
시간이 지나면서
그중 하나는 천천히
깊은 잠 속으로
고개를 숙였지
오로지 진짜만이
죽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당신이 내게 남긴…
사라질 때 비로소 알게 되는
진짜 심장의 말
* 허민 시, 계간 <상징학 연구소> 2022년 겨울호에서
- 이 짧은 소설은 유튜브 채널 Ode의 음악 플레이리스트 영상의 한 댓글에서 영감을 받아 쓰였으며,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실제 인물이 아님을 밝힙니다. 위 사진으로 인용된 첫 번째 댓글, 아이디 'Y'분의 낭만적인 동화 같은 미래를 응원합니다.
허민- 시 쓰는 사람. 시집 <누군가를 위한 문장>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