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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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건물의 2층 전시관. ‘꿈을 기억하는 꿈’이란 전시명이 적힌 하늘빛 포스터가 입구에서부터 눈에 띄었다. 열여덟 고등학생이 된 정민이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푸른색으로 칠해진 벽면이 좌우로 길게 펼쳐졌다. 왼쪽 푸른 벽을 배경으로 놓인 긴 유리관들을 따라 정민은 천천히 걸었다. 문득 멈춰서 유리관 한 곳을 오래 들여다본다. 익숙한 노트 한 권이 펼쳐져 있었다. 손때가 묻어 가장자리가 닳아버린 노트. 펼쳐진 첫 페이지엔 ‘그 겨울밤, 나는 정민과 하율의 방에 함께 누워 아날로그 라디오 주파수 튜닝 다이얼을 돌리고 있었다.’로 시작하는 문장이 쓰여 있었다. 정민이 몇 번이고 읽었던, 이제는 거의 외워버렸다시피 한 다연의 소설 첫 문장이었다.
지난해 정민은 다연의 아버지에게 그 노트를 건네면서 소설 전체를 필사해 두었다. 그리곤 다 쓰이지 못한 그 미완성의 소설 결말을 밤마다 상상하곤 했다. 도대체 몇 번이나 다연이 걸어간 그 문자의 길들을 따라 걸었을까. 정민은 다연이 노트를 맡기며 감상평을 부탁하고 돌아섰을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전철역 개찰구에서 손을 흔들고 돌아서던 다연의 밝은 얼굴. 그날 정민은 길고 긴 4호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내내 다연의 쓰다 만 원고를 읽었다. 처음 노트를 펼쳤을 때의 두근거림을 정민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읽자마자 등장했던 자신의 이름. 이건 우리의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설레는 첫 문장.
노트가 멈춘 지 오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 문장의 처음을 이제 정민이 다시 쓰려한다. 다연의 시각이 아닌 정민의 시각으로 한 번 더. 두 사람이 쓴 하나의 이야기로 바꿔 보려 한다. 그렇게 각자의 걸음으로 서로를 향해 걷다 보면 이미 오 년 전에 끊어진, 다연이 멈춘 골목길 한 모퉁이를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 풍경에서 그 둘은 어쩌면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나의 이야기를 둘이 기억하는 이야기로 바꾸기 위하여. 쓴다. 다시 쓴다. 각자 모두 조금씩 쓰다 보면 이야기는 셋이 되고 넷이 되겠지. 하율이도 쓰고, 할머니도 쓰고, 다연의 아버지도 쓰고, 친구들도 쓰고. 그들을 오래 바라보고픈 누군가도 쓰다 보면 이야기는 무수히 이어지리라. 매듭지어지며 이어지는 긴 끈처럼. 바람에 펄럭이는 끝나지 않는 노래처럼.
정민은 그렇게 생각하며 펜을 들었다. 이번만큼은 낡은 태블릿PC에 늘 그리곤 하던 슬픈 그림이 아니었다. 흰 종이노트 위에 직접 펜을 쥐고서 새롭게 쓰는 익숙한 이야기. 다연의 이야기면서 정민의 서사이기도 한, 겨울밤으로 시작하는, 필사면서 필사가 아닌 글쓰기. 너를 읽으면서 너를 쓰는 마음으로. 네가 못다 한, 마지막 당신의 문장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고 굳게 믿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