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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 빗소리 Sep 24. 2024

제야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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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사다난했던 2013년을 마무리하는 한 해의 마지막 날, 12월 31일 저녁부터 조금씩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밤 아홉 시가 지났을까.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나가 보니 커다란 가방을 멘 다연 누나가 서 있었다. 나와 하율이는 물론이고 할머니마저 깜짝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아니, 다연이 네가 이 밤 중에 우리 집엔 웬일이고? 그 가방은 또 뭐고?”

 다연 누나는 할머니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다연 누나는 아버지랑 둘이서만 사는데 최근 둘 사이가 좀 나빠졌다고 한다. 오늘도 말다툼을 하다가 끝내 고성이 오갔고, 심지어 화가 난 아버지가 자기 방문을 세게 차버려서 문이 부서지기까지 했다고. 다연 누나도 너무 화가 나서 결국 가방을 싸들고 집을 나오게 됐다고 했다. 하지만 마땅히 갈 데가 없으니 딱 하루만 신세를 지면 안 되겠느냐고 할머니에게 부탁하는 것이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 큰 여자애가 겁도 없이 가출을 하면 쓰나. 아버지 전화번호가 어떻게 되나? 내가 전화 좀 드려야겠다.”       

 “할머니, 안 돼요. 그냥 딱 하루만 자고 갈게요. 부탁이에요.”

 결국 할머니는 우리 집에서 하룻밤 묵는 건 허락하겠지만, 아버지가 큰 걱정을 하시지 않도록 전화 대신 메시지로라도 지금 상황을 알리라고 다연 누나에게 말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다연 누나는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다. 다연 누나는 안 좋은 일로 집을 나온 거라지만, 어쨌든 갑작스럽게 특별한 밤을 보낼 수 있게 된 하율이는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라했다. 나 역시 겉으로 티는 안 냈지만 들뜬 마음을 부정할 순 없었다. 근데 하나뿐인 가족인 아빠와 무슨 일로 다투었길래 가출까지 한 걸까.

 “방이 두 개밖에 없으니까 하율이는 다연이랑 자고, 정민이는 오늘만 이 할미랑 자자.”

 나는 할머니와 자는 게 싫었다기보다 하율이와 다연 누나랑 한 방에서 머물고 싶었다. 모처럼 함께 하는 밤, 오래도록 떠들면서 같이 놀고 싶었다. 그때 하율이가 말했다.

 “오빠랑 언니랑 나랑 같이 셋이서 자요. 놀다가 자요.”

 “그러기엔 방도 좁고, 다연이가 불편하지.”

 할머니의 말에 다연 누나가 말했다.

 “아니에요. 저 하나도 안 불편해요. 제가 갑자기 찾아온 건데요, 뭐. 다 친동생들 같으니까 그냥 같이 셋이서 애들 방에서 잘게요. 할머니 평소처럼 편히 주무세요. 애들이랑 같이 오래 얘기도 하고 싶고요.”

 “그럴까? 하긴 정민이가 내 코 고는 소리를 아주 질색을 하니까.”

 할머니의 그 말에 모두가 웃었다. 할머니는 장롱에서 오래된 겨울이불을 하나 더 꺼내와 우리 방에 펼쳐주셨다. 전보다 더 푹신해진 이불속으로 하율이가 다이빙하듯 몸을 던졌다. 우리 집은 난방을 세게 하지 않는 대신 아주 두꺼운 이불을 덮으면서 겨울을 났다. 할머니는 그게 가스비도 아끼고 건강에 더 좋다고 말하곤 하셨다.

 “누나, 안 추워?”

 “춥기는. 재밌고 신나기만 하다. 이게 가출의 맛이구나.”

 “언니, 가출이 뭐야?”

 할머니는 내일 식당에 일찍 나가야 한다면서 평소보다 서둘러 잠자리에 드셨다. 하율이는 늘 열 시 전에 잠이 들곤 했지만, 오늘만큼은 열 시가 훌쩍 넘어가는 시간임에도 다연 누나 옆에 누워 재잘재잘 떠드느라 잠잘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 해가 끝나가는 겨울밤. 머지않아 서울 한복판에선 제야의 종소리가 울리겠지. 매해 마지막 밤엔 할머니한테 허락을 구한 뒤, 할머니 방에서 늦게까지 텔레비전으로 ‘제야의 종’ 타종 행사를 보곤 했는데. 나는 왜 재미도 없고 특별할 것도 없는 그 장면을 매번 잊지 않고 지켜봤을까. 정확히 말하면 연말 연기대상 시상식을 보면서 11시 59분 50초부터 세곤 하는 카운트다운과, 이어지는 스튜디오와 보신각에서의 이원생중계 장면을 지켜봤다고나 할까.

 오늘은 제야의 밤 행사를 텔레비전으로 시청할 순 없겠지만, 오히려 더 특별한 한 해의 마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연 누나, 하율, 나 이렇게 나란히 누워 불 꺼진 천장을 바라보며 긴 얘기를 나눌 수 있는 밤이니까. 어쩌면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의 밤이 될 수도 있으니까.

 우리 셋은 특별한 의미 없이 일상의 사소한 말들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한 해를 끝내는 아쉬움을 달래고 있었다. 이제 한두 시간 후면 하율이는 일곱 살, 나는 열세 살, 다연 누나는 열여덟 살이 되리라. 누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되는데, 나는 아직도 중학교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나이라니. 문득 다연 누나와의 나이 차이가 무척이나 커 보였다.

 나는 누나가 무슨 일 때문에 아빠와 다투고 집을 나오게 됐는지 궁금했다.

 “누나.”

 “응.”

 “아직 안 졸리지?”

 “응, 안 졸려.”

 “하암, 나도 아직 안 자.”

 우리 얘기를 듣던 하율이가 약간은 졸음이 섞인 말투로 이어 답했다.

 “오늘 왜 아빠랑 다툰 거야? 가출까지 할 정도로?”

 “…….”

 “말하기 힘든가?”

 “그게 말이야. 처음부터 집을 나오려고 했던 건 아닌데…….”

 다연 누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뭔가를 더 생각하는 듯했다.

 “너네랑 나랑 알게 된 지 일 년이 넘었지?”

 “작년 몰래 산타 때부터니까 그런 셈이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네.”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

 “정민아.”

 “응.”

 “나 사실 말이지.”

 “응”

 “…….”

 “왜 그래? 말하다 말고.”

 “나 사실 말이야, 이번 겨울방학 때…….”

 “답답하게 왜 그래? 빨리 말해봐.”

 “전학……”

 응? 전학? 전학이라고?

 “전학 갈 거 같애. 그거 때문에 아빠랑 싸운 거고.”

 그럼 이사를 간다는 말인가. 멀리 떠난다는 말? 갑자기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두근거리면서 금세 두려운 긴장이 밀려왔다. 나는 숨죽인 채 다연 누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율이는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옆에서 쌔근쌔근 숨소리만 들려올 뿐 특별한 반응이 없었다.

 “그렇다고 아주 멀리 가는 건 아니야. 아빠 직장 문제로 경기도로 이사간대. 아직 집이 확실히 정해진 건 아닌데, 시흥이나 안산 쪽으로. 어쨌든 여기서 학교를 계속 다니는 건 무리니까, 전학을 가야 돼.”

 “…….”

 “난 가기 싫다고 막 우겼지. 어차피 안 될 걸 알면서도 속상해서 아빠한테 화내고 투정 부린 거야.”

 “…….”

 “처음엔 아빠도 달래주다가 내가 계속 신경질을 내니까 결국 폭발하신 거고.”

 “…….”

 “놀랐어?”

 “어? 아, 조금.”

 “숨긴 게 아니라 나도 알게 된 지 며칠 안 됐어. 워낙 갑작스럽게 정해지고, 아빠도 이제 막 알려준 거니까.”

 “…….”

 “이사 가더라도 자주 놀러 올 거야. 지금처럼 매일같이는 힘들겠지만.”

 “시흥이나 안산은 어디 있는 거야?”

 “경기도 아래 부근?”

 “얼마나 먼 건데?”

 올해의 특별했던 마지막 밤이 갑자기 슬픔으로 얼룩지고 있었다. 나는 다연 누나와 멀리 떨어지는 게 두렵고 아팠다. 아, 이 익숙한 고통. 마치 나를 두고 떠난 엄마아빠와 다시 헤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 아픔과 홀로 남는 외로움은 이제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사라진 게 아니라 내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 잠시 숨어있었던 것이다. 그 쓸쓸한 고독과 쓰라림이 다시 수면 위로 얼굴을 내민 채 눈물방울을 떨어뜨리려 하고 있었다.  

 “그리 안 멀어. 예전에 나랑 인천 가봤잖아. 그 정도야.”

 “여기서 가는 데 얼마나 걸려?”

 “지하철 타면 금방이야. 두 시간 정도.”

 “멀구나……”

 “멀기는. 그때 인천 갈 때도 두 시간 정도는 금방이었는데, 뭐.”

 “…….”

 불 꺼진 방. 내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을까. 내 떨림을 다연 누나가 눈치채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도 어둠이 내 슬픈 얼굴을 가려주어 다행이었다. 눈물이 고이는 내 눈동자를 다연 누나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었기에.    

 “하율이는 자나 봐. 말이 없네.”

 “쟤는 원래 금세 잠들어.”

 “정민이 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야말로 무척 아쉬워.”

 “…….”

 “지금도 물론 친하고 가족 같지만, 계속 너네 곁에서 친누나처럼, 친언니처럼 함께 하고 싶었거든.”

 “아주 떠나는 사람처럼 말하네……”

 “아니지. 자주 놀러 올 거야.”      

 그러다 갑자기 다연 누나가 가볍게 손뼉을 쳤다. ‘아, 맞다’고 하면서. 나는 갑자기 왜 그러냐고 물었다. 아까 집에서부터 한 정거장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 열차 안에서 산 물건이 있다고 했다. 갑작스레 집을 나와서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지만, 그걸 나와 하율이에게 선물로 주고 싶다면서.

 “뭘 샀길래?”

 “별 건 아니야. 너네 방엔 텔레비전도 없으니까 혹시 필요할까 싶어서. 불 켜면 하율이 깨겠지?”

 나는 이불속에서 나와 책상 위에 있던 작은 탁상용 전등 스위치를 눌렀다. 아빠가 남기곤 간 책 더미 속에서 찾은 낡은 전등이었다. 전등을 켜자 형광등만큼은 아니지만 더 은은한 느낌의 빛이 얇은 옷자락처럼 하율과 나, 그리고 다연 누나의 얼굴을 감쌌다.    

 “응? 나도… 아직 안 자.”  

 “아이고, 하율이 깼구나. 미안하네, 언니가.”

 “아니야, 하율이 아직 안 자.”

 다연 누나는 이부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뒤 가방에서 소형 라디오 하나를 꺼냈다. 아날로그식으로 작동되는 구식 라디오였다.

 “라디오 아니야?”

 “맞아, 어차피 하율이도 깼으니까 지금 작동시켜 볼까. 건전지도 넣어놨어.”

 “라디오가 뭐야?”

 “이걸로 뉴스도 듣고, 음악도 듣고 하는 거야. 오늘 2013년 마지막 날이니까 자정에 종 치는 행사도 아마 나올 걸.”

 “와아.”

 하율이가 외치는 감탄사가 늦은 밤 고요를 깨뜨렸다. 반지하 유리창 밖으론 여전히 진눈깨비가 날리고 있을까. 겨울의 차가운 바람소리가 들려왔고, 그 바람에 밀려 유리창이 잠시 덜커덩거렸다. 바닥에 난방을 조금 넣었지만 외풍이 심한 방이라 방안 공기가 시렸다. 내 마음도 시려왔다.

 “이별 선물이구나.”

 “이별?”

 하율이가 물었다.

 “이별은 무슨. 계속 놀러 올 거라니까. 그러지 말고 우리 한 번 들어보자. 내가 라디오 켜볼게. 지금이 열 시 반이니까 내가 좋아하는 음악프로그램 나올 시간이야. 내가 공부할 때마다 듣는 채널이거든. 「시와 음악」이라고 좋은 시랑 신청곡 들려주는 데야.”

 그렇게 그 밤 우리는 라디오를 켜고 다이얼을 돌리며 채널을 찾았다. 지금으로부터 육 년 전인 2013년의 그 겨울밤. 작은 방에 함께 누워 아날로그 라디오 주파수 튜닝 다이얼을 돌리던 그날의 추억을 나는 잊지 못한다. 볼륨을 작게 줄인, 지지직거리는 전파 소리가 하염없이 가슴을 때리던 그날의 쓸쓸함과 시린 방 안의 공기들을. 그때 우연히 함께 듣게 된 노래의 슬픈 멜로디와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아름답게 글썽이던 그 노랫말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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