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12
조금 서둘러 출발한 탓에 예상보다 일찍 목적지인 안산역에 도착했다. 승강장을 나와 약속장소인 1번 출입구 앞에 서 있었다. 빨간색 벽돌로 지어진 역사 건물은 지은 지 꽤 오래돼 보였다. 그 오래된 분위기가 마치 내가 사는 동네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다연 누나는 아직 도착 전이었다. 나는 1번 출입구 앞을 서성이며 중앙대로 건너편 건물의 낯선 간판들을 구경했다. 한글 간판들 사이 중간중간 영어나 낯선 외국어 글자가 눈에 띄었다.
“정민아, 벌써 도착했네. 아직 십 분 전인데.”
“어, 오랜만.”
어디서 나타났는지 다연 누나가 내 등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다연 누나는 베이지색 에코백을 들고 있었고, 연한 하늘색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그 위에 걸친 벚꽃 색을 닮은 흰 바람막이가 바람에 가볍게 흔들렸다. 다연 누나가 설 명절 즈음 마지막으로 우리 집을 놀러 온 후 거의 두 달 만이었다. 그새 누나 역시 자라고 변한 걸까. 왠지 얼굴이 낯설었다. 얼굴엔 가볍게 화장기가 있었고, 분위기도 더 밝아 보였다.
“누나 화장했어?”
“응? 아, 가볍게. 원래 중학교 때도 가끔씩 했어.”
“그래? 왜 난 몰랐지?”
“너야 나한테 관심이 없으니까 몰랐겠지.”
내가 누나한테 관심이 없다고? 나만큼 누나에게 관심이 있던 사람이 또 있을까. 낯설어 보이는 다연 누나의 모습에서 왠지 모를 미세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 뜻 모를 이질감이 내 마음을 살짝 불안케 했다.
“점심 안 먹고 왔지? 배고프겠다. 우리 뭐 먹을래?”
“아무거나. 누나가 잘 아는 대로 가.”
“여기 큰길 지나서 다문화 거리에 신기한 식당들 많은데, 한 번 가볼래?”
“그래.”
우리는 지하도로를 이용해 중앙대로를 지나 건너편 다양한 국적의 식당들이 밀집한 골목으로 들어섰다. 인도 식당, 네팔 음식점, 베트남 쌀국숫집 등 없는 나라가 없었다. 다연 누나는 한글로 ‘고향 식당’이라고 쓰여 있는 한 베트남 음식점으로 나를 이끌었다. 연녹색 전통의상을 입은 베트남 여인의 모형이 입간판으로 서 있는 곳이었다.
“베트남 쌀국수 먹어봤니?”
“아니.”
“그래? 한 번 먹어봐. 고수만 빼서 달라고 하면 너도 먹을 만할 거야.”
“누나는 쌀국수 좋아해?”
“응, 난 엄청. 엄마 살아계실 적에 어릴 때부터 먹었거든. 여기 유명한 데니까 맛있을 거야.”
주말 점심이라 그런지 벌써 많은 손님들이 테이블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다양한 베트남 요리 사진이 붙어 있었고, 주방 쪽 벽면 위에는 ‘베트남 전통 쌀국수 전문점’이라는 한글과 그 밑으로 베트남어로 보이는 글자가 병기돼 있었다. 다행히 출입구 앞 테이블 하나가 비어 있어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내가 메일에서 상민이라는 애 얘기했지? 이 식당도 걔가 알려준 데야. 걔는 여기 토박이거든. 그래서 나도 따라서 와봤어.”
애써 잊으려 했는데, 이렇게 빨리 그 상민이라는 이름이 언급될 줄은 몰랐다.
“근데 오랜만에 만났는데, 너 별로 반가워하지도 않는다?”
“아니야. 지하철 오래 타서 조금 피곤해서 그래.”
“멀긴 멀지? 혼자 말없이 오느라 지루했겠다.”
쌀국수는 금방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수 위에 큼지막한 고기와 숙주, 파 등이 어우러져 독특한 맛과 향을 자아냈다.
“먹을 만하니?”
“생각보다 맛있네.”
“다행이다.”
배가 고팠는지 음식은 생각보다 잘 들어갔다. 복잡한 마음 상태와는 다르게 쌀국수를 꿀떡꿀떡 삼키는 내 모습이 스스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일부러 식사를 거부하는 것도 우스운 꼴이다. 나는 영화 이야기를 꺼냈다.
“올 때 누나가 보내준 『초속 5센티미터』 봤어.”
“오, 그래. 보면서 왔구나. 재밌었니? 내가 엄청 좋아하는 애니인데.”
“「벚꽃 이야기」가 젤 좋았어. 잔잔한 그림체도 마음에 들더라.”
“역시 그림 그리는 사람은 그런 점을 눈여겨보는군. 난 세 편 다 좋아.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이전 작품인 「별의 목소리」 때부터 좋아했어. 너도 왠지 좋아할 것 같더라구.”
“난 내가 벚꽃 핀 날 전철 타고 누나 만나러 오니까… 그래서 보내준 건 줄 알았어.”
“응? 아, 그러고 보니 첫 번째 스토리가 그러네. 오, 신기해. 딱히 그걸 생각하고 보낸 건 아닌데.”
누나는 날 놀리듯이 웃으며 덧붙였다.
“그럼 난 시골로 전학 간 아카리고, 넌 그런 날 보러 멀리까지 찾아와 준 타카키? 그럴듯하다. 근데 내가 아카리만큼 예쁘지가 않아서 큰일이네. 벚꽃이 눈처럼 내려주기만 하면 딱인데.”
“…….”
“밥 다 먹고 그 흰 눈 같은 벚꽃을 보러 호수공원에 가보자구.”
서울에서 본 벚꽃길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긴 하천과 산책로를 따라 다양한 꽃과 나무들이 어우러진 곳이었다. 가족과 연인들이 눈부신 봄을 만끽하려는 듯 저마다 미소를 머금은 채 벚꽃 주변을 서성이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면서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는 사람들도 제법 보였다. 연분홍의 벚꽃들이 멈출 줄 모르고 이어지는 그 산책로를 다연 누나와 나는 천천히 걸었다.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이 엄청 많네.”
내가 말했다.
“원래도 사람들이 자주 산책하는 곳인데, 벚꽃 보러 더 많이 온 것 같아.”
눈처럼 쏟아지는 벚꽃 사이를 걸으며 우리는 오래 이야기를 나눴다. 이 풍경을 나는 마음 깊이 간직하리라. 가벼운 대화 속에서도 홀로 그런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이 순간이 내 인생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기를 바랐다. 열차에서 봤던 영화의 내레이션처럼 ‘우리 앞에는 아직 너무나 거대한 인생이, 아득하게 긴 시간이 속수무책으로 가로놓여 있었’기에. 바로 그런 사실 때문에, 나는 지금의 이 아련하고 아름다운 장면을 내 삶에서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정민아, 우리도 같이 사진 찍자.”
“어떻게?”
“뭘 어떻게야. 셀카로 찍는 거지.”
그러면서 다연 누나는 얼굴과 최대한 멀어지도록 핸드폰을 쥔 손과 팔을 길게 뻗었다.
“뭐 해, 일루 가까이 붙어봐. 뒤에 벚꽃 잘 나오게 해서 찍어야지.”
“어? 알았어.”
핸드폰을 쥔 반대편 손으로 다연 누나가 브이 자를 그렸다. 나는 쭈뼛쭈뼛 그 브이 자 손가락 옆에 붙어 섰다. 카메라 앵글 속으로 들어간 어색한 내 표정이 화면에 보였다.
“좀 웃어봐. 자, 찍는다.”
그때 살며시 봄바람이 불어왔을까. 우릴 시샘하는 듯한 하얀 꽃잎들이 앵글 속에 함께 들어와 흩날렸다. 눈송이 같은 꽃들을 가득 매달고 있는 나무, 뒤로 흐르는 하천의 맑은 물빛, 그리고 다연 누나와 나. 멋진 사진이었다. 누나는 사진이 아주 잘 나왔다며 내 카톡에도 바로 보내놨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집 가는 전철 안에서 꼭 확인해 보라고, 아주 멋진 기념이 될 것 같다며 좋아했다. 함께 찍은 사진이 잘 나왔다고 좋아하는 다연 누나의 모습을 보니, 왠지 나까지 가슴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이사 가기 전 예전처럼 누나가 가깝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하천 산책로를 따라 우리는 다연 누나가 다니는 고등학교 근처까지 제법 오래 걸었다. 바로 근처에 도립 미술관이 있다고 있다. 자신은 그림은 잘 모르지만 정민이 너를 꼭 미술관에 데려가 보고 싶다며 내 손을 이끌었다.
상설 전시된 그림뿐 아니라 「백남준과 함께 하루를」이란 기획 전시까지 천천히 시간을 들여 둘러보았다. 뭔가 어렵긴 했지만 비디오를 예술 속으로 끌어들였다는 작가의 개성적인 작품과 사진들이 인상 깊었다. 그래서인지 처음 방문해 본 미술관의 독특한 분위기와 매력을 어린 내게 알려주기엔 충분했다.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말했다.
“누나랑은 온통 처음 경험하는 것뿐이네.”
“좋다는 얘기지?”
“응. 놀이공원도 처음 가보고, 바다도 같이 봤고. 오늘 쌀국수도 처음 먹었는데, 미술관에도 와보네.”
“괜찮았어? 이 미술관은 가까운데도 나도 몇 번 못 와봤어.”
작고 소소한 모든 것들이 내겐 새롭고 설레는 경험이었다. 벚꽃이 핀 산책로를 누군가와 나란히 걷고, 다정하게 사진을 찍는 것까지도. 어떤 어른들과도, 친구와도 해보지 못한 추억이었다.
우리는 미술관 일층 카페에서 음료수를 마시며 지친 다리를 쉬었다. 카페 벽시계를 바라보니 어느덧 오후 네 시 반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을 의식한 다연 누나가 말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서울까지 돌아가려면 슬슬 버스 타고 역으로 가야겠다.”
흘러가는 시간이 내겐 야속하기만 했다.
“근데, 내가 준 라디오 잘 돼? 너나 하율이한테 제대로 된 선물을 못한 거 같아서 마음이 쓰였는데.”
“우리는 아예 준 게 없는데 뭘 그래. 잘 나와. 여전히 채널은 하나만 잡히지만. 하율이가 맨날 틀어놔.”
“근데 말야. 그때 가출한 날, 우리가 들은 그 채널이 내가 늘 듣던 채널이었어.”
“아이유 노래 나온 데?”
“응. 그때 들은 노래가 마음에 들어서 찾아봤거든. 제목이 ‘슬픈 인연’이었어.”
슬픈 인연. 왠지 슬픈 제목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멜로디와 노랫말이 그토록 아련하고 쓸쓸히 들렸을까.
“내가 전에 좋아하는 음악프로그램 얘기한 적 있잖아. 지금도 듣고 있는데, 그게 열 시에서 여덟 시로 방송시간이 옮겨졌더라. 밤늦게 공부하면서 듣기 딱 이었는데.”
“프로그램 이름이 뭐였지?”
“「시와 음악」이라고, 시랑 신청곡 사연 보내면 소개해주는 프로야.”
“뭔가 좀 어른들이 듣는 거 같다.”
“내가 좀 어른스럽긴 하지.”
“뭐라는 거야.”
“아무튼 근데 내가 이번에 시랑 사연을 보냈어.”
“진짜?”
“응. 매주 수요일엔 청취자의 자작시와 신청곡을 소개해주는 날인데, 내가 쓴 시랑 예전에 들었던 ‘슬픈 인연’을 신청곡으로 해서 사연게시판에 올렸어.”
“그럼 이번 주 수요일에 나오는 거야?”
“채택이 되면. 그니까 이번 주 수요일 여덟 시에 꼭 라디오 들어봐. 너네랑 보낸 그 겨울밤을 가지고 쓴 시도 소개될지도 모르니까.”
“가출한 날을 시로 쓴 거야? 이제 시도 쓰네.”
“이것도 그냥 연습 삼아서. 채택이 되면 너무 기분이 좋을 거 같애.”
다연 누나도 작가의 꿈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쓰고 싶다는 이번 꿈은 왠지 자신에게 오래 머무를 거라고 했었지. 나는 다연 누나의 꿈을 더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어졌다.
“근데 정작 난 내 사연을 못 들을 수도 있어.”
“왜?”
“그날 수학여행 가거든.”
“수학여행?”
나는 수학여행을 어디든 가본 적이 없다. 평범한 근처의 소풍이라면 몰라도.
“핸드폰에 라디오 앱 있으니까 그 시간에 특별한 스케줄 없다면 들을 수도 있어. 물론 내 사연이 소개가 돼야 말이지만. 혹시 못 들을 수도 있으니까 네가 잘 들어서 알려줘.”
“수학여행은 어디로 가는데?”
“요새는 다 제주도야.”
“좋겠다. 나도 가보고 싶었는데.”
“나중에 하율이 더 크면 한 번 같이 가자.”
그때가 과연 언제일까. 우리 모두가 어른이 된 머나먼 훗날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