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다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마을버스를 타고 우리가 다시 안산역에 도착했을 때, 역사 안 시계는 어느덧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굳이 괜찮다고 하는데도 다연 누나는 돌아가는 내 승차권을 끊어주고 음료수까지 사주었다.
“멀리까지 왔는데, 특별히 해 준 것도 없어서.”
“맛있는 거도 사주고, 미술관 구경까지 시켜줬잖아.”
“그렇게 말해주면 고맙고. 조심해서 돌아가.”
“응, 안녕.”
왠지 개찰구로 들어서는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다연 누나가 등 뒤에서 나를 다시 불렀다.
“정민아, 잠깐만!”
“왜?”
“너한테 부탁할 게 있었는데 깜빡했어.”
그러면서 다연 누나는 들고 있던 에코백에서 하늘빛 표지의 노트 한 권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이게 뭐야?”
“쫌 쑥스럽긴 한데. 전에 네가 메일에서 내가 쓴 글 한 번 보여 달라고 했잖아. 네가 우리 얘기로 웹툰 그린 거에 자극받아서, 그때 이후로 나도 쭉 소설을 써봤거든.”
“그럼 이거 소설이야? 나 읽어보라고?”
“근데 아직 결말을 못 썼어. 매번 동화만 쓰고 소설은 한 번도 써보지 않아서 도저히 어떻게 마무리를 지어야 할지 모르겠네. 너한테 한 번 보여주고 나서 도움 좀 받으려고.”
“초등학교 6학년이 고등학생을 어떻게 도와?”
“어려도 넌 창작 재능이 있잖아. 우리들 추억이 소재니까 읽고 나서 감상도 들려주고.”
“어려운데…….”
나는 그러면서도 그런 진지한 부탁을 하는 다연 누나가 고마웠다. 나를 충분히 인정해주고 있는 거 같아서. 친한 동생으로서뿐 아니라, 비록 어리지만 이야기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웹툰 작가 지망생으로서도.
건네받은 노트 표지를 그 자리에서 잠깐 넘겨보았다. 샤프로 쓴 다연 누나의 작은 글씨가 틈 없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지우고 쓴 번진 흔적들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근데 왜 불편하게 직접 손으로 썼어? 누나는 보통 컴퓨터로 쓰지 않아?”
“아, 원래 처음엔 컴퓨터로 쓴 거야. 전에 내가 말했잖아. 취미가 필사라고. 작가들 책을 필사하듯이 컴퓨터로 쓴 내 글을 손으로 한 번 옮겨 써 봤거든. 근데 말야. 이게 효과가 좋아. 내가 내 글을 필사하다 보니 고쳐할 될 부분이 눈에 잘 보이더라고. 문장을 천천히 다시 읽게 돼서 그런 거 같기도 하고.”
“그럼 컴퓨터에 쓴 거랑 이 노트에 쓴 거랑 좀 다르겠네?”
“맞아. 결말은 빠져 있지만 이게 최종본이니까 너 이거 잃어버리면 안 돼. 내가 수학여행 끝나고 오월 초에 서울 놀러 갈 때 다시 돌려줘. 꼭 완성시켜야 하니까.”
“알았어. 잘 읽어볼게. 근데 내가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어.”
“부담은 갖지 말고.”
“응.”
“이거 근데 아무한테도 안 보여준 소설이야. 좀 부끄럽긴 하지만, 너라면 잘 읽어줄 거 같아서.”
“그 말이 젤 부담된다.”
그러나 다연 누나의 그 마지막 말은 나를 무척 들뜨고 기쁘게 했다. 나 외에는 아무한테도 안 보여준 소설. 다연 누나의 아빠한테도, 친구들한테도, 절친인 상민 형한테도. 문득 그 형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지금만큼은 다른 어떤 사람도 나에겐, 우리에겐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둘만의 진지하고 오롯한 이 분위기를 다른 요소로 흐트러뜨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부끄러운 듯 진지했던 다연 누나의 그 표정이, 내가 기억하는 누나의 마지막 모습이 될 줄은 그때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대체 어느 누가 상상할 수 있었을까. 노트를 건네받고 개찰구로 들어서다 또 한 번 뒤돌아본 내게, 다연 누나는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이후로 나는 다연 누나의 첫 소설이 담긴 그 하늘빛 노트를 얼마나 많이 매만졌던가. 마치 이제는 닿을 수 없는 실제 손길이라도 된다는 듯 ‘그 겨울밤, 나는 정민과 하율의 방에 함께 누워 아날로그 라디오 주파수 튜닝 다이얼을 돌리고 있었다.’로 시작하는 누나의 문장을. 그 문장이 쓰여 있는 첫 페이지이자 마지막 페이지 같았던 쓸쓸한 종이를. 이제는 거의 외워버렸다시피 한, 결말이 사라진, 한 소녀의 멈춰버린 기억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