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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 빗소리 Oct 17. 2024

편지를 옮겨 써본 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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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연 누나의 소설을 막상 필사하려고 보니 일주일은 짧은 시간이었다. 제법 긴 분량의 소설을 그토록 빨리, 그것도 뭔가 다급한 숙제를 해치우듯 끝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복사집에서 전문을 복사한 후, 원본 노트를 일주일 후 다연 누나 아빠에게 건네주었다. 다연 누나의 아빠는 소중한 노트를 오래도록 잘 보관해 주었다며 고맙다는 인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언제나 펼쳐보곤 하던 다연 누나의 하늘빛 노트가 갑자기 사라지니 무척 아쉽고 섭섭했다. 샤프로 쓴 소설을 복사하다 보니 복사본은 흐릿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곧장 문구점에 가서 원본과 비슷한 색깔의 하늘빛 노트를 구입했다. 그리곤 복사본의 흐린 글씨를 천천히 따라가며 밤마다 두세 문단씩 필사를 하기 시작했다. 매번 다연 누나의 소설을 읽기만 했지, 직접 손으로 옮겨보는 건 처음이었다. 생각해 보니 다연 누나는 영화 보는 것 외에도 필사가 취미라고 했던 거 같은데. 나는 이제야 비로소 다연 누나의 취미를 경험해 보는 셈이다.

 처음엔 잘 몰랐다. 그런데 매일 조금씩 다연 누나의 글을 따라 쓰다 보니, 마치 가끔씩은 이게 누나의 글인지, 내 글인지 헷갈리기도 했다. 아니 이건 정확한 설명이 아니다. 다연 누나가 어떤 마음으로 이 문장을 썼는지 그 느낌을 내 손이 천천히 모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글을 썼을 때의 마음을 천천히 이해하면서 함께 걸어가는 듯한 기분. 그러고 보니 다연 누나도 이런 비슷한 생각을 언젠가 내게 말해주었었다.

 다연 누나의 소설은 중편소설 분량이었다. 매일 조금씩만 옮기다 보니 이월 중순에 시작한 필사는 어느덧 사월로 접어들어서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소설에서는 현실과는 다르게 각색된 부분이 있었는데, 특히 인천가족공원 만월당에서의 대화가 그랬다. 다연 누나의 소설은 주인공인 누나의 시점이었다.     

  

 감정이 복받친 나는 정민에게 평소에 말하지 않던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엄마도 사정이 있었던 건데, 초등학생 땐 어려서 그런 걸 잘 생각하지 못했어.”

 봉안함 옆 우리 엄마의 사진을 내려다보던 정민이 다시 내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지금은 엄마를 이해해?”

 “엄마는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편지이자 유서를 내게 남겼어.”

 “그래?”

 나는 엄마에게 받은 마지막 편지의 내용을 떠올렸다.

 “대부분은 내게 미안하다며 사과하는 내용이었어. 그리고 나는 그 편지를 품에 보관하며 자주 읽었지. 하지만 그때까지도 엄마의 마음을 잘 이해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그럼 언제부터 이해한 건데?”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아마도… 엄마의 편지를 옮겨 써본 후부터.”

 “옮겨 썼다고?”

 “응. 내 취미는 필사거든. 누군가의 문장을 직접 옮겨 쓰다 보면 문장 공부도 되고, 그 마음을 천천히 더 깊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아.”

 “엄마 편지도 그래서 해 본거야?”

 “일부러 그랬던 건 아닌데. 하나밖에 없는 편지라서 혹시나 잃어버릴까 봐.”

 “필사하다 보니 마음이 느껴졌다?”

 “다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어. 하지만 천천히 엄마의 편지를 다시 써 내려가면서, 그렇게 노력하는 내 모습을 내가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 다 이해할 순 없었다고 해도, 그럼에도 나는 엄마를 이해하고 싶었던 거야. 그런 마음이 내게 다시 엄마를 그립게 만들었어.”     


 다연 누나의 소설 속 그 부분을 내가 필사할 때는 어느덧 누나의 사 주기가 다가오는 2018년의 사월 중순이었다. 왜 전에 읽을 땐 이 부분을 인상 깊다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누나의 소설은 마치 지금의 나에게 어떤 부탁을 하는 것처럼 읽혔다. 나 역시 소설 속 누나가 그랬듯이 졸업식 때 받은 엄마의 편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두 번도 펴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끝까지 편지를 천천히 읽어 내려가지 못했다. 여전히 마음의 문이 쉽게 열리지 않았다. 그때 받은 용돈 역시 단 한 푼도 쓰지 않았다. 이런 내 모습이 옳은 걸까. 이건 나의 고집일까, 아니면 상처받은 영혼의 당연한 감정일까.

 탁상용 전등 아래 켜둔 라디오에서 밤 여덟 시를 알려왔다. 필사하면서 늘 듣곤 하던 다연 누나의 애청 프로 「시와 음악」이 나올 시간이었다.

 “오늘은 4월 11일, 청취자 여러분의 자작시와 신청곡을 들려드리는 수요일입니다. 기다리고 계셨나요? 이번 주에도 역시나 많은 분들이 좋은 시와 신청곡 사연을 보내주셨습니다.”

 나는 라디오를 들으면서 계속 필사를 이어갔다. 하율이는 보통 이 시간이면 할머니 방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어서, 밤이 되면 다연 누나가 준 라디오는 늘 내 차지였다.

 “오늘은 좀 특별한 사연을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저희 프로를 매일 들어주시는 분들은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는데요. 사 년 전 이맘때 모두가 아파한 슬픈 수학여행 사고가 있었습니다. 학생들뿐 아니라 일반인 탑승객들도 많이 돌아가셨는데요. 지금은 희생자로 밝혀진, 당시 단원고 2학년 정다연 학생 사연을 저희가 사 년 전 그날 소개할 차례였습니다.”

 라디오를 듣다가 나는 필사하던 손을 멈췄다. 볼펜이 책상 위에서 굴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펜을 줍지 않고 계속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생존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화기애애하게 학생의 사연을 소개할 분위기가 아닌 듯하여 그땐 신청곡만 띄워드렸는데요. 곧 다가올 희생자들의 사 주기를 맞이해 그때 소개해 드리지 못한 故정다연 학생의 사연을 읽어볼까 합니다. 다연 학생도 뒤늦게나마 하늘에서 이 라디오를 듣고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갑자기 심장이 크게 뛰었다. 그리고 또 아파왔다. 다연 누나는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늘 이렇게 맴돌고 있구나.

 “안녕하세요. 저는 단원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정다연이라고 합니다. 매일 듣기만 했는데, 오늘은 용기 내어 「시와 음악」에 자작시와 신청곡 사연을 올려봅니다. 저는 작년 겨울에 가출을 해본 적이 있어요. 이 시는 제가 외로울 때 저를 위로해 준 친한 동생들과의 추억을 소재로 써본 시입니다. 신청곡은 그날 밤 동생들과 들었던 곡이고요.”

 디제이가 사연을 중간쯤 읽어갈 때 잔잔한 배경음악이 함께 나오기 시작했다.

 “저는 외동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늘 동생들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우연히 친해진 정민이와 하율이는 언제나 씩씩하고 밝아서 제가 닮고 싶은 동생들이에요. 이 시와 노래가 정민이와 하율이에게 힘이 됐으면 좋겠고, 빨리 동생들이 보고 싶어 하는 엄마아빠를 만났음 하는 바람입니다. 이번 주 수요일에 저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요. 아마도 거기서 이 라디오를 듣고 있을 것 같네요. 「시와 음악」 제작진 여러분, 제 사연 꼭 좀 소개해주세요. 네…… 사 년 전 정다연 학생이 이렇게 사연을 올려주었습니다. 잘 보관한 사연을 이제야 뒤늦게 읽어드렸습니다. 신청곡을 띄워드리기 전에, 먼저 다연 학생이 보내준 사 년 전 자작시를 낭송해 보겠습니다.”


<함께 라디오를 듣던 겨울밤>     


 전파가 잡히지 않는 라디오

 크게는 말고

 새끼손톱 만한 작은 소리로

 어둠 속 듣다 보면     


 모닥불 타는 소리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밤의 전파가 길을 잃는 소리

 귓가에서 서로의 미래를 몰래

 헤매어 보는 소리     


 왜 소리라고 생각하지?     


 네가 말했다

 가두지 마

 가둘 때마다 금세     


 사라지고 사라지고

 사라지고 사라져

 두 손에 쥔

 희디흰 겨울눈처럼


 디제이의 시 낭송에 이어서 다연 누나의 신청곡인 ‘슬픈 인연’이 사월 그날처럼, 아니 2013년의 겨울밤처럼 라디오에서 작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배경음악과 함께 시 낭송이 시작될 때부터 내 눈가엔 눈물이 맺혔다. 이제는 완전히 울보가 된 열일곱. 뒤늦은 사춘기의 고독은 다시 모든 게 그립다는 생각을 했다. 몰래 산타의 밤, 라디오를 함께 듣던 겨울밤, 인천가족공원에서의 슬픈 대화와 월미도에서의 즐거운 추억, 그리고 안산 산책로의 벚꽃까지.

 다연 누나. 그리고…… 그리고…… 엄마. 왜 다연 누나를 생각하다가 나는 엄마가 떠오를까. 꿈에서도 자주 그랬다. 다연 누나가 우리 엄마를 닮아서? 엄마와 비슷하게 생겨서 나는 다연 누나를 좋아했을까. 다연 누나가 좋아서 우리 엄마와 비슷하다고 생각한 걸까. 내 착각일까. 진짜일까.

 서랍 상자 속에서 몰래 감춰둔 엄마의 편지를 꺼냈다. 천천히 엄마의 편지를 다시 읽었다. 라디오에서는 아이유의 리메이크 곡 ‘슬픈 인연’의 후렴부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흠뻑 젖은 두 마음을

 우리 어떻게 잊을까     


 나는 고개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펜을 주웠다. 그리고 다연 누나의 소설을 필사하던, 새로 산 하늘빛 노트의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맨 뒷장을 펼쳤다.      


 아― 다시 올 거야 너는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

 아― 나의 곁으로 다시 돌아올 거야     


 나는 엄마의 편지를 펼쳐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잠시 엄마의 글씨체를 야윈 엄마의 얼굴이라도 되는 양 바라보았다. ‘사랑하는 정민이에게’로 시작하는, 병원에서 썼다는 엄마의 편지를. 엄마의 마음과 미안을.

 그리곤 천천히 펜을 움직여 ‘어떤 말로 용서를 구해도 너는 엄마를 용서하기 힘들겠지. 그동안 얼마나 이 못난 엄마를 미워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파.’라는 문장들을 한 자 한 자 노트의 맨 뒷장에 옮겨 써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시절에 너를 또 만나서

 사랑할 수 있을까

 흐르는 그 세월에 나는 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려나     


 슬픈 멜로디와 가사였다. 노트에 물방울 하나가 떨어져 옮겨 쓴 나의 문장을, 아니 엄마의 문장을 둥글게 번지게 했다. 나는 계속해서 편지를 옮겨 써나갔다. ‘엄마가 잠시 아팠다는 얘긴 삼촌에게 들었겠지. 엄마가 처음 병에 걸린 걸 알았을 땐 세상 모든 게 다 무너지는 줄 알았단다. 너랑 하율이를 만나기 위해, 우리가 다시 함께 살기 위해, 엄마가 열심히 준비하고 있던 때였어. 지금 상황만 해결이 되면 금방 너희들과 살 줄 알았는데…… 그만 엄마가 큰 병에 걸려버린 거야. 그때 너희가 너무 보고 싶어서 몰래 너희 집에 다녀가 본 적도 있었어.’라는 문장을 쓴 후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떠오르는 버드나무 평상에서의 풍경이 있었다. 색칠놀이를 하던 하율이와 다연 누나의 모습이 스쳐갔다. 라디오의 노래는 어느덧 똑같은 가사가 다시 한 번 반복되고 있었다.


 달콤했었지

 그 수많았던 추억 속에서

 흠뻑 젖은

 두 마음을 우리 어떻게 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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