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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 빗소리 Oct 18. 2024

느리게 읽는 마음 (에필로그)

22 - 최종화

 22

 

 “근데 정민이 취미는 뭐야? 역시 만화그리기인가? 아니면 축구?”

 “내 취미? 뭐, 만화그리기 빼고는 생각나는 게 없으니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취미이자 특기인 셈이네.”

 “그럼 언니는 우리 집 놀러 오는 게 취미야?”

 하율이가 다연 누나에게 물었다.

 “원래 내 취미는 영화 보는 건데, 생각해 보니까 요즘 내가 빠져 있는 또 다른 취미가 하나 생긴 거 같애.”

 “그게 뭔데?”

 “필사하기.”

 잔잔하고 포근한 버드나무 평상의 그늘이 다연 누나의 긴 머리칼을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저녁 바람이 다시 우리를 향해 시원하게 불어올 때였다. 나는 필사가 뭐냐고 물었다.

 “그건 책에 쓰인 문장들을 그대로 자기 글씨로 옮겨와 쓰는 거야.”

 “그게 취미라고?”

 같은 내용의 글을 왜 굳이 힘들게 노트에 옮겨 쓰냐고, 나는 재차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너도 웹툰 작가 되려고 연습할 때 아빠가 두고 간 만화책들을 따라 그린다고 했잖아. 그거랑 비슷하지 않으려나.”

 그러곤 잠시 말을 멈춘 다연 누나는 무언가를 더 생각하는 듯했다.

 “흠…… 아니다. 좀 다른 느낌일 수 있겠네.”

 유월의 저녁 골목길, 우리 셋은 버드나무 그늘 아래 평상에 앉아 흔들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붉은 하늘을 바라봤다. 그때의 누나 표정, 그 미소를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다연 누나는 나와 하율이를 지긋이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느리게 읽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 이미 한 번 읽은 문장들, 어쩌면 너무나 빠르게 지나가 버린 것들을 그렇게, 다시 천천히 써나가다 보면 말이야.”

 다연 누나는 다시 붉은 서쪽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 문장이 아니라 그걸 쓴 마음을, 그 사람의 생각과 심정을, 느리지만 아주 깊게 읽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그래서 나는 필사를 좋아해.”

 당시엔 그 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다연 누나가 왜 그런 말들을 내게 남겼는지 조금은 알게 되었을까. 누나는 육 년 전 그 저녁의 평상에서 이런 말도 덧붙였다. 내게 하는 말인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왠지 마음속으로 또박또박 그 목소리를 따라 발음해 보게 되거든. 그러다 보면 그 사람 얘기가 내 말 같고, 마치 그 문장을 우리가 함께 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같은 말들을. ♣       


   

(끝)       




* 소설 속 소개된 영화는 『매직 오브 벨 아일』(롭 라이너 감독, 2012)과 『초속 5센티미터』(신카이 마코토 감독, 2007)의 줄거리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 소설에 나오는 탐사보도 뉴스채널의 영상은 「뉴스타파-세월호 휴대전화 복구의 또 다른 의미」(2017.6.13.)에서 故김민지 학생의 아버지 김창호 님, 故이은화 학생의 어머니 이금희 님, 故허다윤 학생의 어머니 박은미 님의 인터뷰를 재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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