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계 회사 어디까지 가봤니?
2. 첫 번째 외국계회사
나는 91년도 국내 대기업에 특채로 입사했다.
정확하게는 90년 대학교 4학년 시작할 때 학과 사무실에 H그룹에서 장학생을 선발한다는 공지가 붙었다.
1년간 전액 등록금 지원에 매달 15만 원의 용돈을 지원할 테니 졸업 후 입사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가 올림픽 이후 경제가 엄청 성장하던 때였고 기계공학과에 흔히 말하는 인서울 괜찮은 학교 중 하나라 그랬지만 지금 기준으로는 파격적인 조건이다.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취업은 이미 했으니 4학년때는 정말 열심히 놀았고 간신히 기준 학점을 채우고 졸업하고 직장생활은 시작되었다. 나하고 같은 조건으로 입사한 친구도 있었는데 그 친구는 그 최저 기준 학점도 채우지 못해 입사 후에 다시 학교에서 몇 과목 수업을 듣고 조건을 만족시킨 경우도 있었다. 그 친구는 나중에 임원까지 달고 퇴직했다.
그 회사에서 8년을 근무했다.
25살 입사하여 29살에 대리를 달았다. 직장인은 승진을 바라보고 근무한다. 33살 때 과장 진급을 앞에 두고 도저히 과장을 달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것은 부서장과의 갈등이 원인이었고 부서장은 내가 있는 한 너는 과장이 될 수 없다고 공공연히 말했고 나의 스트레스와 불면의 밤은 길어만 갔다.
이 지옥을 벗어나는 길은 이직밖에 없었다. 부서장이 나를 싫어하는 이유는 3가지가 있었던 거 같다.
1. 부서장 하고 친밀한 협력업체에 일감을 주라고 했는데 내 판단에는 이 회사에 오더를 주면 분명히 문제가 발생할 거 같아 정식 절차대로 견적을 받아 타업체에 주문을 하였다. 부서장한테 엄청 혼났고 눈밖에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문제가 생기면 실무자인 내가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부서장은 몇 년 후 그 협력업체와의 결탁과 부정스캔들로 인하여 회사를 떠났다.
2. 부서장은 키가 160cm 정도에 뚱뚱하고 지방대 출신이었는데 나는 186cm에 나름 좋은 학교 출신이고 그때 잠깐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비슷했다. 지금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지만 .. 그는 장교 출신이고 나는 시력으로 인한 군면제였고.. 그는 나의 이러한 모든 점이 맘에 안 들었고 니가 그래 봤자 내 밑이야 라는 심보가 있었던 거 같다. 한마디로 그릇이 작은 사람이었다.
3. 이게 결정적인데 우리 부서에 예쁘고 날씬하고 성격도 좋은 20대의 여직원이 있었는데 부서장이 그녀를 좋아했다. 40대 초 유부남이라 공식적으로 접근은 못했지만 여러 경로와 비겁한 방법으로 여직원의 마음을 얻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내가 어떻게 이 사실을 알았냐고? 나하고 사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만날 때마다 그녀는 부서장의 치근덕거림에 피로감을 호소했다. 그러다 어느 날 둘이 데이트하는 것을 회사 사람한테 들키게 되고 우리 둘의 사이는 회사 전체에 소문이 났고 이때부터 부서장은 대놓고 나를 싫어하기 시작했다. 마치 내가 잘못되는 것이 자기 인생의 목표인 것처럼 ..
90년대 초반 국내 기업은 마치 군대 문화 비슷했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좀 덜한 편이었는데도 근무 중에 부서장이나 임원이 들어오면 하던 일을 멈추고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하는 게 불문율이었고 사무실에 큼직한 재떨이도 있던 시절이었다.
부서장은 ROTC 기갑장교 출신이었다. (일 잘하고 리더쉽 좋은 분들도 많다 대부분 ROTC출신이 그러하다. 하지만 이분은 달랐다) 이 당시 독일회사 BASF가 국내에 공격적으로 공장을 증설하였고 우리 회사에서도 많은 사람이 BASF로 이직을 했다. 이직한 선배 한 명이 나의 상황을 매우 안타까워했고 그러한 부서장의 행태에 분개하며 군대식 기업 문화를 매우 싫어했던 분이었는데 나한테 “너는 국내기업보다 외국계 회사가 어울린다”며 마침 미국회사 A사에서 기계전공 엔지니어를 모집한다고 하니 응시해 보라는 정보를 주었고 알려준 컨택포인트로 이력서를 제출하였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A사에서는 1년째 기계전공 엔지니어가 공석이었고 이번에는 영어가 부족해도 무조건 인력을 채용하기로 방침을 세웠던 것 같다. 이력서는 경력직으로 100여 명이 접수되었다. 그중 서류 통과한 16명이 1차 면접을 보았고 최종적으로 4명의 후보에 내가 선택되었다. 나에 대한 평가는 무난했다고 한다.
시키는 대로 일 잘할 거 같고 영어는 좀 부족하지만 기본 학벌이 있으니 다니면서 배우면 될 거 같다고 판단했다고 나중에 들었다. 다른 한 명은 국내 대기업 S사 출신이었는데 이 자리에 똑같은 면접을 세 번째 하는 사람이었다. 뽑으려다 취소하고 뽑으려다 취소하고 이번에는 진짜로 뽑으려고 면접을 실시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분에 대한 평가는 좋다는 사람과 이런 사람은 절대 뽑으면 안 된다는 싫다는 사람이 공존했다고 한다. 결국 내가 최종 합격이 되었다.
직급은 과장이었고 연봉은 전 직장의 거의 부서장급이었다. 인생역전이었다. 시원하게 사표를 부서장에게 제출하고 면담을 하였다. “다른 회사가나?” “네 A사에 과장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그래? 월급은?” “네 OO 받기로 했습니다...” 잠시 침묵 후.. ”많이 주는군 .. 가봐.” “네 안녕히 계십시오.” 끝까지 예의를 지키고 뒤돌아 나왔지만 몸에 전율이 흘렀다.
때때로 인생은 내가 계획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고 내가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이 나한테 도움을 줄 때가 있다. 나한테 A사 입사를 귄유한 선배가 나하고 친하게 지냈던 선배는 아니었다. 그냥 옆에서 나를 좋게 봐준 사람이었을 뿐이다. 나도 나중에 어느 누구의 인생에 큰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직한 첫 번째 외국계 회사에서 정말 열심히 일했다.
나를 뽑아준 것에 감사했다. 일이 많아 10시 11시에 퇴근하는 날이 많았고 주말에도 출근하였다. 시키는 대로 일 잘할 거 같아 나를 뽑았다는데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회사에 적응을 하면서 또 다른 갈등과 조직의 문제점이 드러났다. 좋은 일이 있으면 안 좋은 일이 생기고 안 좋은 일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좋은 결과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있다.
에피소드 - 이직 후 아직 과장일 때 전 직장의 그 부서장한테 전화가 왔다. “민과장 잘 지내나? 얼굴 좀 보자 내가 찾아갈게...” 협력업체와의 불미스러운 일로 회사를 그만둔 건 들었는데 그 협력업체의 상무 타이틀로 나한테 영업을 오겠다는 전화였다. 어이가 없었다. 이 사람은 자기가 나한테 한 짓을 기억을 못 하는가?
점심 먹는데 옆으로 와서 큰 소리로 “너 아직도 안짤리고 회사 다니고 있네. 그럼 다음번에는 경비실 옆자리로 발령 내줄게. 크하하하” 이렇게 얘기한 사람이 무슨 낯짝으로.. 어이가 없지만 오라고 했다. 한참을 제품 소개 의미 없는 얘기를 하고 도와달라고 하였고 알았으니 카다로그 놔두고 가시라고 했다. 사람은 자기가 편한 것만 생각하는구나.. 자기가 상처 준 것을 기억 못 하는구나. 다 너 잘되라고 얘기한 것이다라고 자기 합리화를 하는구나.. 씁쓸했다. 나중에 그분은 그 회사도 그만두었고 와이프와 같이 카페를 운영하다 60살 전에 직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들었다.
한때 나를 잠 못 들게 괴롭히던 사람이었으나 결론적으로 이분으로 인하여 나는 외국계 회사의 커리어를 쌓는 계기를 만들게 되었다. 이분이 아니었음 나는 대부분 입사 동기들처럼 국내 기업에 근무하다 은퇴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