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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미 Oct 04. 2019

나는 시어머니와 주 5일 만난다

'외국 시어머니는 다를 줄 알았더니' 후편


세월이 약이다.


 외국인 며느리를 별로 탐탁지 않아 하셨지만 시간이 지나고 아이도 생기니 시어머니는 나를 온전히 가족으로 인정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마음에 안 들었던 것 같지도 않다. 갈 때마다 금목걸이를 하나씩 사주신 거 보면. 시어머니는 성격이 드센 사람이다. 그렇다고 한국 시어머니처럼 시집살이를 시키시진 않는다. 하지만 시댁에 놀러 올 때마다 시어머니의 방식을 따라야 했다.


시어머니는 안에서 현관문을 잠그고 열쇠는 본인이 가지고 계신다. 그래서 외출이라도 하려면 시어머니께 열어달라고 해야 한다. (창살 없는 감옥)

시어머니는 주방을 건들지 못하게 하신다. 그래서 내가 과자나 음료수를 사도 시어머니께 드려야 하고, 시어머니는 그것을 본인의 입맛대로 정리하신다. 그래서 과자를 먹을 땐 항상 시어머니께 어디 있냐고 물어봐야 했다.

시어머니는 본인이 드시고 싶은 음식을 드셔야 한다. 우리의 의견을 물어보시지만, 항상 '여기가 더 낫겠다.'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시어머니는 화가 나면 온 집안의 에어컨부터 꺼버린다. (내가 이렇게 열불이 나니 너네도 더워 봐라.)

시어머니는 독실한 불교 신자로 우리가 7일을 방문하면 5일은 절에 데리고 다니셨다.

우리가 없을 때 우리 물건을 뒤지신다. (남편이 길길이 날뛰고 나서는 안 하신다.)


하지만 난 괜찮았다. 고작해야 1년, 혹은 2년에 한 번 시댁에 갔기 때문이다. 그것도 길어봐야 일주일 머물렀으니 그 기간 동안은 원하는 대로 해드렸다.



말레이시아에 정착했다. 남편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다른 것도 아니고 차를 사는 것이었다. 차 없이는 시어머니의 손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도착한 지 3일 만에 차를 구하고 4일째 되는 날 시댁에서 이사 나왔다. 나는 시어머니의 방식에 적응이 되었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는데, 남편은 아니었나 보다. 결혼 생활 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발 빠른 처사였다. 남편은 24시간 중고차 사이트를 들여다봤고, 사이트에 올라온 지 10분 된 차를 그 자리에서 사버렸다. 남편은 시어머니 때문에 답답하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본인이 모든 것을 컨트롤해야 직성이 풀리시는 양반이라고 했다.


그런 시어머니와 주 5일을 만나야 한다.




나는 면허증이 없다. 아직 면허증을 따지 못했다, 아니 시도도 안 했다. 해야지 해야지 하지만 계속 미루고 있다. 시어머니 때문이다.


시어머니는 아들의 등하교를 도맡아 하시고 계신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우리 아파트 밑에서 대기하신다. 나와 아들은 시어머니 차를 타고 학교로 향한다. (아들이 시어머니께 한 대 맞은 후로 절대 시어머니와 단둘이 있으려고 하지 않는다)


아들을 보낸 후, 우리는 아침밥을 먹으러 간다. 가끔은 야채를 사러 시장에 들르기도 한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시어머니와 아침 3시간 정도를 같이 지내게 되었다. 처음엔 그 시간이 지옥 같았다. 할 말도 없는데 조잘조잘 떠들어야 하는 내가 우스웠다. 집에 돌아오면 머리가 지끈거렸다.

시어머니와 자주 가는 재래시장


하지만, 우리 시어머니가 한국 시어머니와 다르다고 생각될만한 몇 가지를 나열해 보겠다.


전화나 문자는 무슨 일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명절을 따로 지내지 않는다. 설날 혹은 추석은 외식하는 날이다. 이 나라는 크리스마스가 평일이다.

제사가 없다. 가끔 절에 따라가는 정도.

생일파티는 셀프다. (내가 정착한 이후로 한 번 해드렸더니 너무 좋아하셔서 매년 할 생각이다)

집에 안 오신다. 나를 부르지도 않으신다.



매일 만나다 보니 시어머니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말이 매우 많으시다. 계속 떠드신다. 내가 듣는 말든 상관 안 하신다. 처음엔 경청하다가 지금은 핸드폰도 보고 가끔은 조수석에서 꾸벅꾸벅 졸기도 한다. 그래도 어머니는 열심히 말씀하신다. 그저 말벗이 필요하셨던 게 아닐까 생각된다.


시아버지는 말수가 심하게 없으시다. 애정표현도 안 하신다. 시어머니는 항상 시아버지 욕을 하셨다. 50년 결혼생활에 한 맺힌 사람처럼 잘근잘근 씹어 대셨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것이 욕으로 들리지 않았다. 사랑받고 싶어 하는 여자의 투정으로 들렸다. 시어머니는 외로웠다. 자식들은 출가하고 이리저리 흩어져 살게 되었는데 남편이라는 작자는 도통 관심을 주지 않는다. 시어머니는 10살 때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돌보지 않아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모든 일을 스스로 했다고 했다. 밥도 알아서 먹고 학교도 알아서 갔다고 했다. 부모의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거친 삶을 살았다고 했다.




남편은 시어머니가 과일을 사거나 음식을 해서 보내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열대과일은 그날 먹지 못하면 버려야 하는 경우가 많고, 우리도 나름의 식단계획이 있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음식 배달은 그것을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한두 번 음식을 버리게 되자, 남편은 진지하게 시어머니께 아무것도 사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과일은 버리게 되고 음식도 그날 먹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니 갑자기 음식을 내 손에 쥐여 보내는 일은 하지 말라고 했다.


"음식 좀 받으면 어때? 못 먹으면 말지."

"음식 낭비하는 거 정말 싫은데 연락도 없이 불쑥 이것저것 주고 가면 그거 누가 다 먹으라고."

"못 먹으면 말지 뭐, 그게 시어머니 소소한 낙인데."


그 후로 난 시어머니가 주시는 음식이며 과일을 다 바리바리 싸들고 왔다. 시어머니는 굉장히 좋아하셨고 뿌듯해하셨다. 비록 다 못 먹고 냉동실에 있다 쓰레기통으로 간 것도 있지만 나는 항상 장을 빠듯하게 봄으로서 시어머니가 주신 음식을 해결할 수 있었다. (시어머니도 패턴이 있으셔서 시간이 지나니 언제 내가 장을 봐야 할지도 요령이 생겼다.)


남편이 고맙다고 했다. 본인이 바빠서 못 하는 일 내가 대신해줘서 고맙단다.

시어머니랑 같이 먹는 아침. 가격이 착하다.


시어머니는 매일 신이 나신다고 했다. 아직도 본인이 쓸모 있는 사람인 것 같다고 했다. 손주 학교 등하교시키고 과일과 야채 사는 일에 신이 나신다고 하니 그게 뭐 어려운 일인가 싶다. 아무래도 내 면허증은 조금 있다 따고 시어머니를 당분간 의지하고 살아야겠다.


남편은 걱정했던 시어머니와의 생활이 생각보다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라고 했다. 사실 몇 달 같이 있어 보니 별 문제는 없었다. (예전에 사주를 봤는데 시어머니와 나의 궁합이 남편과 나의 궁합보다 더 낫다고 했는데 그게 진짜인가 싶다) 가끔 필터 없이 속을 뒤집는 말씀을 하시지만 나는 별로 예민한 스타일이 아니라서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편이다. 시어머니는 오늘도 손주 학원을 알아보시며 연신 사진을 보내신다.


요즘은 남편이 유독 고맙다는 말과 보고 싶다는 말을 많이 한다. 원래 문자를 자주 하는 사람이지만 틈날 때마다 문자하고  퇴근하기 전 보고한다. 아들과 내가 없는 인생은 상상할 수가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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