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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 Dec 21. 2018

안도의 밤밥

rural recipe #03 (October 22nd, 2018)



농촌의 일손에 흥이 실리는 늦가을이다. 온 동네가 분주한 시기에 한 걸음 느린 초보 농부인 나는 뭐든 늦게 심은 탓에 혼자 여유로웠다. 산책하기에 좋은 날씨라 틈만 나면 산책을 다녔다. 동네 뒷산을 다니다 보니 길에 떨어진 것들이 자꾸 보였다. 밤이었다. 집 앞 도로변 노란 낙엽 사이에도 뭔가가 있었다. 은행이었다. 주워 담아야 할 것만 같았다. 먹을 수 있는 것들인데 가만히 두면 버려지는 것이 아까웠다. 산책 때마다 한 움큼 주워왔는데, 보름이 지나니 한 봉지가 됐다. 생각해 보니 봄에도 그랬다. 뒷산에선 달래, 밭둑에선 쑥이며 냉이를 캐다 먹었다. 굳이 따지자면 주인이 있을 수도 있지만 한 끼 먹을 정도 줍거나 캐다 가는 것을 뭐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주인이 직접 먹거리를 주는 경우도 있었다. “먹을거나 나오겄어 그 밭에? 배추 솎은 거여~ 국 끼려 먹어!” 하며 배추 한 다발을 마당에 두고 가시거나, “우리 밭 논두렁에 보면 쑥부쟁이가 올라오고 있을겨~ 그거 캐다 먹어.” 라며 먹거리를 챙겨주는 이웃이 생겼다. 날일(농촌식 일당일)을 나가도 시급과 상관없이 나오는 새참이나 점심식사는 입과 배를 풍족하게 했고, 마을 회관에서 자주 밥을 해 드시는 할머니들은 “점심때 건너와서 밥 먹구가~”라며 초대의 인사를 건네셨다.   

시골로 이사 오기 전, 나보다 먼저 농촌 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을 만나면 불편하고 답답한 일도 많지만 ‘시골에선 적어도 굶지 않는다.’는 말을 듣곤 했다. 제대로 정착하지 못해도, 직업이 없어도, 모아 놓은 돈이 많이 없어도... 굶지 않을 수 있는 곳이 있을까 의심만 들었다. 돈과의 교환 없이 무언가를 먹는 것은 불가능한 도시에서 늘 허기에 시달렸던 나는 '적어도 굶진 않는다'는 저 말을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요즘은 이 말이 어느 정도 일리 있는 표현이라고 인정하게 된다.  

농촌에서도 집세를 내야 하고, 오고 가는 교통비니 기본적인 공과금을 내야 하니 돈 없인 살 수 없다. 완벽한 채식으로 푸성귀만 먹고 살 수도 있겠지만, 고기도 먹고 라면도 먹으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농촌 민심이 예전에 어땠는지 몰라서 비교할 순 없지만, 농촌 민심이 모든 것을 해결 해 주지도 않는다. 하지만 돈이 좀 적게 있어도 허기지진 않을 수 있다. 먹거리 인심이 생기기조차 어려운 도시와 비교하자면 농촌의 먹거리 인심은 분명히 넘친다. 그리고 아직은 농촌이 도시보다 자연과 가까워서 먹거리를 스스로 획득(?) 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쌀농사를 크게 짓는 이웃 어른이 주신 쌀을 한 시간 불렸다. 산책길에 주워 온 햇밤을 까서, 불린 쌀 위에 총총 올렸다. 압력 밥솥 추가 칙칙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나는 평소와 다른 밥 내음이 나는 것 같아 코를 킁킁 거리며 불 앞을 지킨다. 뜸이 다 들었는지, 올라갔던 솔밸브가 제자리로 딸깍 내려왔다. 밥솥을 연다. 앞이 하얘진다. 밥을 고슬고슬 섞어 공기에 담고, 노랗게 익은 밤을 위에 올려본다. 밤-밥.     

올 해의 가을이 밥공기 하나에 담겼다. 쌀도 달고 밤은 더 달아, 가을이 다디달다. 산책길에 주워 온 밤으로 맛보는 다디단 가을 밥. 밑천 없이 농촌으로 온 나는 이 밤밥이 주는 안도감 한 공기를 뚝딱 비운다.          



#나의작은숲 #구례 #시골농사 #시골살이 #가을 #밤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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