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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 Jan 11. 2019

된서리 내린 아침

rural scenery #03 (November 23rd, 2018)


마을 어귀에서 만난 옆집 할머니에게 “밭에 다녀오셔요?” 하고 인사를 했다. 할머니의 손수레에는 뭔가 잔뜩 담겼다. “으이~ 곧 서리 내릴 거 아녀. 서리 맞으믄 이거 다 못 묵어. 고추 좀 주까?” 병원에서 퇴원하신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밭에 남아 있는 고추며 호박이며 각종 푸성귀가 서리를 맞을까 걱정이 되셔서 결국은 또 구부정한 허리로 밭일을 하신 것이다.

입동(立冬) 직전의 절기로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다는 상강(霜降)이 올 해는 10월 23일이다. 상강을 앞두고 마을 어른들은 배추와 무를 제외한 끄트머리 농작물을 수확하느라 바빴다. 나도 덩달아 상강을 파수꾼처럼 기다렸다. 그런데 상강이 지나도 구례에는 서리가 내리지 않았다. 예로부터 절기라는 것이 정해져 있긴 하지만, 절기가 매해 그리고 모든 지역에 적용되는 것은 아님을 다시 확인했다. 상강으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11월 1일, 올해 첫서리가 구례에도 찾아왔다.   

대부분의 풀들은 서리를 맞고 나면 죽는다. 식물들은 흙으로 돌아갈 때 사람에 비해 긴 시간이 들지 않나 보다. 여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남은 농작물과 잡초들로 어수선하게만 느껴졌던 밭들이 어느새 정리된 풍경이 됐다. 그래서 어르신들이 서리를 두고 최고의 제초제라고 하나보다.   

서리로 인해서 흙으로 돌아갈 상태가 되는 한해살이 풀들. 하지만 서리를 맞아야 그 본연의 맛과 에너지가 충만해지는 것도 있나 보다. 서리로 정리된 밭마다, 여전히 푸른 푸성귀가 있다. 배추다. 예전 같으면 알지 못했을 테다. 1년의 사이클을 고스란히 보고 있으니 다른 채소들과 달리 서리를 맞고도 당당하게 밭을 지키고 있는 그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늦가을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11월 23일, 소설(小雪) 아침. 즐겨 듣는 아침 뉴스 프로그램에 출연한 유명한 맛 칼럼니스트가 김장 배추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영하로 떨어지는 그즈음에 늘 김장을 했었거든요. 우리 어머니들은 배추가 겉잎이 얼었을 때 김장을 했어요. 요즘 김장이 이른 감이 있죠. 영하로 온도가 3~4일 정도 지속이 되면 배추가 스스로 살려고 겉잎이 수분을 날리고 당을 축적하거든요. 그래서 배추가 달아지고 맛이 있어요.” 뉴스를 듣고서 밖으로 나갔더니 여느 아침과 다르다. 눈처럼 세상을 온통 희게 덮은 것은 아니다. 사물들이 어렴풋이 드러나 있지만 어제보다는 더 짙은 흼이다. 이제야 된서리가 뭔지 알게 됐다. 반죽이나 밥 따위가 물기가 적어 빡빡하다는 의미의 ‘되다’란 뜻이 붙은 서리, 온도가 확실히 영하로 내려간 탓에 내린 서리였다.    

삼일을 기다려 배추를 뽑아야겠다. 감당할 수 없는 추위 앞에서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본연의 에너지와 맛을 응축해낸다 하니 저 희끗희끗한 배추를 먹어 봐야겠다. 다른 푸성귀들이 다 기세가 꺾여 흙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중에도, 겨울 추위를 견딜 수 있을 만큼 견뎌내며 제 맛을 찾는다는 이 배추를 먹으면, 혹시 알까? 나도 보이지 않는 앞날을 견딜 수 있을 만큼은 견뎌내며, 저 깊은 곳에 있는 에너지를 응축해 본연의 내 모습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 된서리 내린 아침 풍경이 그렇게 나를 자극한다.
#나의작은숲 #구례 #시골농사 #시골살이 #늦가을 #초겨울 #서리 #배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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