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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 Jan 11. 2019

따뜻했던 그대여, 잘 지내요

rural flower #03 (October 31st, 2018)



부고 메시지가 왔다. 기적을 바랐지만 결국은 떠났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청춘을 바쳐 일했던, 역시 청춘인 그가 황망히 떠났다. 오랜 동료들은 그의 갑작스런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같은 사무실에서 친구로 3년을 근무했던 나 역시 그랬다. 4월의 찬란한 햇살이 그저 야속하기만 했다.    

그의 발인 다음 날 넋을 놓고 있다 흙을 보니 뭔가를 심어야겠다는 생각이 솟구쳤다. 그가 흙으로 돌아간 탓일까? 흙에 씨앗을 뿌리고 싶었다. 씨앗 상자에서 작년 겨울 우연히 얻었던 목화씨가 담긴 봉투가 보였다. 마당 화단에다 목화씨를 심었다.    

목화는 며칠 후 싹을 틔웠고, 감나무 아래에서 자라느라 느리긴 했지만 기어코 꽃을 피웠다. 다섯 장의 꽃잎을 하늘거리며 춤을 추는 목화꽃을 보느라 여름날이 즐거웠다. 여느 꽃들처럼 꽃이 지는 것이 아쉽지도 않았다. 목화는 약속을 지킬 테니까. 꽃이 지자, 역시나 다래가 달렸다. 나는 싹이 나길 기다렸듯, 첫 번째 꽃이 피길 기다렸듯, 또 기다리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찬바람이 불자 약속처럼 왔다. 잘 영근 다래가 터지며 세상에서 제일 따신 꽃이 왔다. 목화솜꽃이 폈다.   

목화. 우리 땅 곳곳에 지천으로 심겨 있었던 작물.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한 농작물들도 귀했지만, 추위로부터 헐벗은 몸을 따뜻하게 덮어주는 목화 역시 소중했을 것이다. 바쁜 가을걷이 후에 아낙네들은 목화솜꽃을 따다, 겨우내 물레를 돌려 무명실을 만들고, 그 실을 베틀에 짜서 만든 천으로 옷을 해 입거나 이불을 만들어 덮었을 테다. 각종 화학섬유들이 지배한 지금 세상에서 눈꽃 같은 솜꽃이 지천에 피는 풍경을 이젠 보기 힘들지만, 솜꽃은 여전히 세상에서 제일 따신 꽃이다.   

그를 흙으로 돌려보낸 뒤, 목화 씨앗을 땅에 심으면서 나 역시 어느 날엔가 흙으로 돌아갈테니 삶은 이토록 허무하다며 울었다. 그런데 그의 삶은 결코 허무하지 않았다. 비록 의식 없는 상태로 병원에 실려 왔었지만, 이미 예전에 장기기증 서약까지 해 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답다'고 입을 모았다. 생은 허무해도, 그의 삶은 허무하지 않았다.    

목화솜꽃을 꺾으며 알았다. 씨앗 상자에 있던 그 많은 씨앗들 중에 내가 그를 보낸 다음 날, 목화를 선택했던 것은 그가 목화를 닮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음을... 세상에 있는 동안 그 역시 참 따뜻했다. 목화솜꽃을 닮은 따뜻했던 그대여, 그곳에서, 잘 지내요. 


#나의작은숲 #구례 #목화 #목화솜꽃 #따뜻한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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