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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 Feb 01. 2019

기본에 충실한 가래떡

rural recipe #04 (January 5th, 2019) 



추수가 끝났을 무렵부터 햅쌀을 사 먹기 시작하니 자연히 묵은쌀이 생겼다. 쌀 한 톨 한 톨은 모두 귀한데, 굳이 햅쌀을 찾기보다 남은 쌀부터 먹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다. 하지만 채소나 과일을 제철에 먹을 때 제 맛을 누릴 수 있는 것처럼, 햅쌀의 맛을 즐겨야 할 때를 놓치지 말자며 묵은쌀을 만들고 말았다.     

식재료를 너무 오래 묵히거나 자칫 버리게 되는 일이 생기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싫은 나는 슬슬 묵은쌀 걱정이 시작됐다. 마음의 짐 같은 묵은쌀 이야기를 했더니, 친하게 지내는 언니가 “방앗간에 가져가서 가래떡을 뽑아 먹으면 되지!”했다. 그때부터 가래떡을 얻기 위한 첫 경험이 시작됐다.   

동네 방앗간에 전화를 걸어 물었더니 쌀을 깨끗이 씻어서 하루 정도를 불려, 물을 빼 가져오면 바로 뽑아 줄 수 있다고 하셨다. 나는 그 지침에 따라 묵은쌀 8kg를 씻기 시작했다. 대량의 쌀을 씻는 일은 평소 밥 지을 때 쌀을 씻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김장할 때나 꺼내는 큰 고무 대야에 담긴 쌀을 씻어 첫 쌀뜨물을 부을 때는 마치 밀가루라도 푼 물처럼 뽀얗다. 쌀뜨물이 맑아질 때까지 씻고 물을 낙낙히 부어 쌀을 불리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9시, 방앗간 할머니와 전화로 약속한 시간에 방앗간에 당도했다.   

동네 방앗간은 늘 열려 있지 않다. 필요한 사람이 미리 예약이나 주문을 했을 때만 방앗간이 돌아가는 편이다. 오늘 아침 9시에 할머니가 문을 여신 건 처음으로 가래떡을 뽑는 나라는 주문자가 있기 때문이다. 멈춰 있던 기계가 돌기 시작한다. 잘 불려진 나의 묵은쌀 한 톨 한 톨이 동그랗고 길쭉하고 하얗고 말랑말랑한 것으로 변해 나온다. 할머니와 오랜 세월을 같이 보낸 나무틀에 가래떡이 차곡차곡 쌓인다. 가래떡을 들고 나오면서 바로 한 입 물어 먹는다. 밥 한 숟가락과는 다른 쌀 맛. 그럼에도 또 다른 차원의 쌀의 맛, 그것만이 입 안 가득하다. 기본에 충실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맛으로 느끼게 하는 창조물이다.     

기본에 충실한 이 창조물은 변화 능력도 대단한 먹거리다. 집에 가져온 가래떡의 절반은 큰 쟁반에 쌓고 비닐을 덮어 하루 반나절을 굳혔다. 칼질이 편한 굳기가 되기를 기다린 것이다. 가래떡이 6~7cm 길이로 잘리면 떡볶이에 쓰이고, 어슷어슷 잘리면 떡국떡으로 쓰일 것이었다. 나머지는 겨울 간식이 된다. 냉동해 뒀다가 하나씩 꺼내 난로 위에서 구워 먹는다. 그냥 먹어도 좋고, 조청에 찍어 달달함을 더해 먹어도 좋다.    

가래떡을 냉동실로 넣기 전에 가깝게 지내는 분들을 불러 난로에 구워도 먹고, 에어프라이어에 돌려서도 먹어 본다. 겉은 노릇노릇 바삭하고, 속은 쫀득하다. 다들 지칠 줄 모르게 먹고 먹는다. 그렇게 가래떡을 나눠 먹다 생각했다. ‘나도 이제야 동네 방앗간을 찾아가 처음으로 가래떡을 뽑았는데... 하나 둘 사라져 가는 동네 방앗간처럼 가래떡을 뽑는 사람들도 점차 더 줄어들겠지?’ 낭만적 감상에 빠져 오래된 방앗간이나 옛 먹거리가 사라지는 것이 안타깝다기 보단, 가래떡의 참 맛, 기본에 충실한 이 맛을 누리는 기쁨을 보장받지 못할 것 같은 불투명한 미래가 불안하다. 특별한 맛을 누리는 권리는 특권 중의 특권인데... 방앗간이 없어지면 가래떡을 뽑아 먹는 내 특권은 어떡하나?
 
내 권리를 쉬이 누가 보장해 주지 않는 세상이다. 스스로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가래떡 뽑는 기계를 중고로라도 미리 사서 창고에 쟁여둬야 하나 고민이 생긴다. ㅋㅋㅋ


#나의작은숲 #구례 #겨울 #가래떡 #레시피 #먹거리 #시골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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