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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 Mar 20. 2019

겨울을 견뎌낸 생명의 맛

rural recipe #05 (March 15th, 2019)


“어떻게/왜 구례로 정착한 거예요?” 내가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다. 내 대답의 요점은 세 가지이다. 1) 지금까지 살아보지 않은 권역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2) 바닷가 보다는 산골이 좋다 3) 따뜻한 남쪽을 원한다. 이 조건들의 교집합이 되는 곳이 전라남도 구례였다. 이 중에 3번째, 따뜻한 남쪽을 원한다는 조건은 아주 중요했다. 나는 유난스레 추위를 타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유학도 동남아시아 국가로 갔을까;;)

추위를 타는 몸은 타고난 체질이다. 몸에 열이 많다는 아이였을 때부터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지칠 줄 모르며 온종일 밖으로 뛰어다니며 놀다가도, 겨울이 오기 시작하면 집으로, 방으로 기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학교는 다녔지만, 방학을 하면 온기가 있는 곳에 처박혀서 꼼짝 안 했다. 독립 후 서울에서 열두번의 겨울을 보낼 때는 늘 두려웠다. 높은 건물들 사이를 휘몰아치는 칼바람이 겁났고, 방 하나를 점유하고 살면서도 가스비가 무서웠다. (그래서 그 좁은 공간조차 훈훈하기 어려웠다.) 나는 위아래 내복을 꼭 갖춰 입었고, 실내에선 양말을 두 겹으로 신었다. 겨우내 터틀넥 셔츠만 입으며 한치의 바람도 몸속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동여맸다. 이렇게 겨울나기를 힘들어했으니, '내가 살 환경은 내가 결정해 살겠다'라고 마음먹으며 농촌 시골 마을로 이사를 결심했을 때, 따뜻한 남쪽 동네를 선택하는 것은 당연했다.     

따뜻한 남쪽 동네라고 해도, 겨울은 겨울이다. 지난 초겨울, 텃밭을 정리할 무렵 모든 작물들이 자연의 이치에 따라 흙으로 돌아갈 준비가 끝나 있었다. 시금치와 쪽파, 두 두둑만 제외하고서- 가을에 씨를 뿌리고, 종구를 심어 조금씩 크기 시작했던 이 두 채소는 추운 겨울 동안에도 황량한 밭에 남아 있었다. 찬 바람이 불었고, 눈이 내렸고, 땅마저 얼어붙었고, 주인도 발걸음 하지 않는 겨울내내. 이 둘은 어떻게 견뎠을까?     

농사를 시작하는 3월. 밭에는 아직 먹거리가 드문 시기. 겨울을 견뎌내고 살아있었던 탓에 새로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워 자라야 하는 다른 것들보다 더 빨리 초록을 되찾아, 더 빨리 자라난 시금치와 쪽파가 3월의 양식이 되어 준다.     

시금치로 된장국을 끓인다. 오랜만에 묵나물이나 냉동된 것이 아닌 신선한 채소가 들어간 된장국이다. 드디어 겨울이 끝이 나고, 푸릇푸릇한 날것을 먹을 수 있는 때가 돌아왔음을 알리는 것 같다. 한가득 캐온 시금치는 뿌리째 손질한다. 추위에도 끄덕하지 않은 비결이 이 뿌리에 있기 때문이다. 뿌리를 버리지 않고 국에 같이 넣으면 달큰한 맛이 생긴다. 시금치국은 몇 날 며칠을 먹어도 지겹지 않다. 아무것도 넣지 않고 한 번, 바지락을 넣고 한 번, 말린 새우를 넣고 또 한 번. 먹을 때 마다 맛이 다르다.    

쪽파로는 김치를 담는다. 비료를 많이 먹고, 따뜻한 비닐하우스에서 쑥쑥 자란 것들보다 키도 굵기도 작다. 끄트머리에는 추위에 시들었던 흔적인 노란 꼬리가 붙어 있다. 하지만 향은 더 은은하고, 흰 대는 더 단단하다. 쪽파 역시 뿌리를 잘라 버리지 않고 흙을 잘 털어내 여러 번 씻어 말린다. 겨울을 이겨낸 쪽파 뿌리는 약초와 다름없다. 잘 말려 뒀다가 감기 기운이 있을 때 대추, 생강과 함께 달여 먹으면 최고의 감기약이 되어 줄 것이다. 묵은지가 되어 버린 김장김치만 먹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갓 담은 김치를 먹는다.     

내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겨울. 시금치와 쪽파는 그 추위를 고스란히, 온몸으로 감당해 냈다. 그리고 아직은 신선한 푸른 먹거리들이 식탁에 올라오지 못하는 이 애매한 시기, 우리 밥상을 채워 준다. 나보다 훨씬 더한 추위를 견뎌낸 그들이 내게도 겨울을 지내느라 수고했다는 인사를 건네는듯 하다. 강한 생명력을 가진 프로의 기운이 느껴지는 맛 그리고 그 맛에서 얻는 새 기운. 이제 정말 겨울을 끝내고 봄을, 새로운 시작을 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3월, 겨울을 살아낸, 봄먹거리 보다 먼저 식탁에 오르는 식재료로 쪽파와 표고버섯이 있다. 쪽파김치와 표고버섯밥은 겨울을 이겨낸 밥상의 상징이다.


#작물 재배 이야기는 노지에서 비닐 멀칭 없이, 퇴비와 비료를 뿌리지 않고 키우는 과정을 기준으로 한 것임.


#나의작은숲 #시골살이 #구례 #봄 #봄식탁 #쪽파 #시금치 #표고버섯 #겨울을이겨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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